[서명숙의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4) 한라산 둘레길 동행 이야기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
사진=서명숙.
사진=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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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제주올레 초대 탐사대장이자 첫 동지인 동생 동철이를 떠나보낸 뒤, 코로나 블루와 동철이 블루라는 악재가 겹친 시절을 견디게 만든 건 한라산 둘레길이었음을 이 편지글을 처음 내보낼 때 이미 고백한 바 있다. 그런 한라산 둘레길을 5박 6일 동안 걷는 프로그램을 제주올레 파트너 기업인 사회적 기업 퐁낭에서 만들게 된 건 지난 4월부터. 한라산 둘레길은 한라산 자락의 생태계가 오고생이(고스란히 뜻의 제주어) 보전된 너무나도 거대하고 아름다운 녹색의 비밀 정원이다. 

하지만 주민들이 사는 마을 길과 연결된 제주올레 길과는 달라서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가 어렵고, 멧돼지 출몰 위험이 있는 데다가, 아직은 탐방객이 그리 많지 않아서, 혼자서 찾아서 즐기기에는 여러모로 힘든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코로나19 방침에 맞춰 함께 이동하고, 그러나 숲 속에 접어들어서는 각자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 홀로 걷기도 가능한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유는. 이런 프로그램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이들이 많았던 건지 한라산 둘레길 여행은 매회 마감돼 추가 회차까지 만들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사진=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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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두 번째 여행팀의 나흘째 산행에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건 지난 5월 22일.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앞에 서 있는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 문성범 님이 참가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전날 둘레길이 너무 힘들었는지 그날 둘레길 대신 제주올레 5코스를 걷기로 한 부부 참가자만 제외하고 다른 참가자들은 사흘 연속 산길을 걸은 이들 답지 않게 이른 아침에도 생기발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중에는 지난번에 23일간 제주올레 길을 완주한 참가자 장춘희 씨도 있었다. 한 달여 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첫날 울퉁불퉁한 바닷길을 걸으면서 네 발로 기듯 벌벌 떨었던 그녀. 그런 그녀가 제주올레 길을 다 완주하고서도 모자라 한라산 둘레길 완주에까지 도전하고 있다니. 뭐든 처음이 어렵지, 몸에 습이 들면 적응하기 마련임을 그녀에게서도 다시금 확인한다. 

# 길 위에 불쑥 나타난 인생 고수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일일 안내양이 되어서, 차내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이는 한라산의 꼭대기 모습을 놓고 ‘제주도를 만든 창조신인 설문대할망이 머리칼을 풀어서 드러누운 모습’이라고 설명을 해주면서, 할망께서 여러분의 산행을 많이 도와주시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참가자들 모두가 다 육지에서 온 분들인지라 몇몇을 빼놓고는 설문대할망은 잘 몰랐기에 흥미롭게 경청해 주었다. 내친김에 제주도를 만들고, 한라산을 만들고, 367개에 이르는 오름을 만들고, 바닷가 마을을 돌면서 용천수가 나올 수 있도록 행주치마에 물을 담아서 흘려주고, 마침내는 오백 명의 아들을 먹일 팥죽을 쑤던 중 거대한 죽솥에 빠져서 죽은 그 위대한 모성의 최후까지 초간단 버전으로 들려주었다.

사진=서명숙.
사진=서명숙.

드디어 우리는 한라산 둘레길 5개 구간 중 하나이자 가장 긴 코스로 꼽히는 수악길 입구 돈내코 시작점에 접어들었다. 십여 분쯤 걸어 올라갔을까. 단박에 한라산의 깊고 울창한 숲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참가자들은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어제 그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란다. 한라산 둘레길이나 제주올레 길은 워낙 길고 너른 공간인지라 절로 이격거리가 지켜지기 마련이다. 이날의 가이드와 퐁낭 스탭이 선두와 후미를 이끌고 지키는 가운데 각자가 저마다의 속도와 방식으로 숲길을 즐긴다. 누군가는 길섶에 핀 야생화에, 누군가는 울울창창 하늘을 가를 듯 빼곡히 늘어선 각기 이름이 다른 수목에, 누군가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얼마나 갔을까. 가는 내내 수십 가지 색깔로 변주하는 초록을 눈에 담으면서. 

사진=서명숙.
사진=서명숙.

서로 모습이 다른 여러 계곡을 건넌 끝에 마침내 일부러 만들어놓은 것처럼 너르고 편편한 너럭바위가 나타났다. 수십 명은 너끈히 앉을 만한 너비였다. 다들 거리를 두며 흩어져서 각자 휴식을 취했는데 개중에는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탁족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이 도통 안 보이던 숲길에 두 남자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우리 일행을 보고선 한마디 했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로구먼” 졸지에 우리는 신선급으로 격상했다. 한데 그중 한 남자가 동행한 남자에게 “여기 신선들 앞에서 노래 한 곡 들려주시지. 자, 다들 박수로 청해 주세요” 하는 게 아닌가. ‘가수인가 보다’ 우리 일행은 손뼉을 쳐댔고, 그 남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허리를 곧추세우고 마스크를 쓴 채 소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아, 뜻밖에도 너무나도 낭랑하고 그윽한 반야심경이 온 계곡에 흘러넘쳤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그의 독경을 감상한 건 우리 일행만이 아니었다. 계곡 아래편에 한 남자가 캠핑용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도 공연이 끝난 뒤 일어나서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가려 하자,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선생님도 혼자 다니시는 걸 보니 고수 산꾼 같으신데 한마디 들려주고 가시지요”라고 청했다. 그분은 당혹해하지도 않고 딱 한마디를 했다. “나중에 꼭 제주 와서 사세요.” 그 말에 누군가가 “그러고 싶은데 집값, 땅값이 너무 비싸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분은 “저도 제주에 땅 한 평 없지만 이렇게 자연을 즐기고 있잖아요”라고 답했다. 앗, 도처에 고수들이 많다. 사실 꼭 소유해야만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진 게 많을수록 근심도 많고 할 일도 많아서 제대로 누리기 힘든 경우도 많지 않은가.

# 벨기에, 일본, 독일에서 온 유학생들과 동행하다

길 위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5.16 도로에 이르기 직전 쉼터이자 화장실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일행을 만났다. 호구조사를 해보니 그녀들은 부경대에 재학 중인 벨기에, 독일, 일본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그녀들은 한라산 등반을 하려다가 정보 부족으로 사전 예약을 하지 못해서 당혹해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곧 가게 될 수악오름(물오름이라고도 한다)이 나지막하지만 기막힌 전망이 펼쳐지는 곳임을 설명했더니, 그녀들도 선선히 따라나섰다. 졸지에 우리는 글로벌 답사반이 되어 수악오름에 올랐다.

사진=서명숙.
사진=서명숙.

드디어 수악오름 정상. 뒤쪽으로는 손에 잡힐 듯 윤곽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한라산, 앞쪽으로는 다섯 개의 섬이 점점이 떠 있는 푸르른 서귀포 바다, 옆으로는 초록으로 물든 오름 연봉들과 머체왓 숲이 보이는 360도 서라운드 풍광에 다들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풍광이 그녀들을 홀린 것일까. 그녀들은 나머지 수악길 구간도 동행하겠단다. 그로부터 세 시간여. 우리는 끝없는 초록의 향연에 몸을 내맡겼다. 몇 개의 결이 다른 계곡을 건너고, 화산탄 위에 나무들이 뿌리를 내려서 일명 ‘앙코르와트’로 불리는 구간을 지나서,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여정. 오전 9시에 출발한 그 길은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지만, 출발할 때보다 일행의 얼굴들은 오히려 더 싱그럽고 빛이 났다. 대본 없는 길 위의 드라마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사진=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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