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왓 칼럼] 차별 속 차별의 사회학

편견으로 무장한 이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여전히 반인권적 발언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존재 자체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어선 안됩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난민 등 대상은 다르나 일상 곳곳에서 여전히 차별이나 혐오,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인권문제에 천착한 '인권왓 칼럼'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인권활동가들의 현장 목소리를 싣습니다. [편집자 글]

지난 3월 중순, 미국 애틀랜타 마사지 숍에서 총격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사망자 8명 중 6명이 아시아계 미국인 이었다. 미국 인구의 6%가 아시아계이다. 그 전해 1년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아시아계 혐오사건’은 3800건으로 하루 평균 10건 이상이었다. 그 중 68%가 여성이었다. 소수 민족이고 여성처럼 상대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타깃이 된다. 전형적인 혐오 범죄이다. 트럼피즘은 미국의 중하층을 설움, 즉 열등감과 자존심을 건드리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생겨났다. 이에 동조하는 미국인의 60% 백인들은 아시아계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로 인하여 트럼프는 역대 최다 득표 낙선자가 되었다. 무시할 수 없는 지지 수치이다. 꿈결 같은 ‘아메리칸 드림’은 이미 사라진지 오랜 듯하다.

애틀란타 마사지 숍 총격 사건이 발생한 시기,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방자치단체가 이주노동자만 구별 분리하여 코로나19 진단검사를 시행하는 것은, 코로나19 감염가능성이 국적에 차이가 있지 않음에도 합리적 이유 없이,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지방자치단체에게 시정명령을 내렸다. 한국에서 외국인은 4% 정도 차지하는 ‘그들’이다.

트럼프가 코로나19를 중국바이러스라고 주장할 때마다, 한국 일각에서 중국의 책임을 추궁한다고 박수가 나왔다. 미국 사람들에게 ‘그들’인 한국사람들에게 중국인은 ‘그들’이었다. 총격 살해 사건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일부 한국인들은 댓글에 “아시안이라고 뭉뚱그리지 말고 국적을 정확히 밝혀라”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백인들은 아시안을 혐오하고, 아시아의 한국인은 아시안의 다른 국가 사람들을 혐오한다. 

미국의 백인들은 아시안을 혐오하고, 아시아의 한국인은 아시안의 다른 국가 사람들을 혐오한다. 출처=플리커.
미국의 백인들은 아시안을 혐오하고, 아시아의 한국인은 아시안의 다른 국가 사람들을 혐오한다. 출처=플리커.

도내 외국인계 주민은 약 5%... 역시 ‘그들

경기도와 서울에서 모든 외국인들에게 코로나19 검사를 요구해서 인권 문제를 일으키기 한 달 전, 제주도에서도 같은 내용의 정책을 발표했다. 외국인근로자상담소를 통해서 모든 외국인들에게 코로나19 검사를 종용한 바 있다. 인권 단체의 반발로 익명 검사로 전환되었지만, 궁극적으로 외국인 전수검사는 진행되었고, 그 성과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제주도정는 이에 대한 반성은 물론 한마디 사과도 없었다.

차별은 특정한 누군가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성별, 나이, 장애 여부, 출신 지역 또는 국가, 학력, 용모 또는 신체조건, 혼인 여부, 가족 상황, 인종, 피부색,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병력이나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 개인이 가지는 정체성이나 조건에 따라 위치나 경험이 달라지는 사회에서 차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이다.

미국인은 아시아인을 차별하고, 아시안 한국인은 다른 아시안을 차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서울이 지방을, 부자마을이 가난한 마을을 차별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차별이 사람들을 가르고, 그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차별은 어느 정도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어야 한다. 

어느 사회든 주류가 있고 비주류에 대한 차별이 있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기준 16세 미만 인구구성이 히스패닉계 26%, 흑인 18% 등 유색 인종이 백인을 제치고 인구 과반을 차지했다. 출산률을 고려하면 25년 뒤 백인이 소수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주류인 백인이 소수 인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생산인구 절대 부족현상을 안고 있는 한국 또한 25년 뒤 비슷한 처지이다. 우리가 ‘그들’이라고 불렸듯이 그들이 우리를 ‘그들’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전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바로 지금, 바로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모두가 사람으로서 공정하고 공평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지금부터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차별을 없애야 한다. 미래에도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 구도를 안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반차별의 첫걸음으로서 차별금지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 신강협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상임활동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