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人터뷰] 제주보훈대상 전몰군경 유족부문 조창의 씨…“아버지 故조인복 용사 평생 존경”

“아버지 시신도 찾지 못하고 가묘를 만들어 모시다 2010년에 서울현충원에 모셔진 묘를 찾았어요. 어머니는 제대로 된 아버지 묘도 못 보고 고생만 하시다 일찍 돌아가셨죠. 제대로 된 아버지 묘라도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전쟁으로 아버지와 이별하던 일곱살 소년은 벌써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그 아들은 제66회 현충일을 맞아 국가가 인정한 '보훈대상'을 받았지만 기쁨만큼 아쉬움도 크다. 70여년 전 전장에서 산화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가슴에 묻은채 40년전 일찍 눈을 감으신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그립기 때문이다.  

“이런 날 살아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살아계셨더라면...”

한겨레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며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1950년 6.25 한국전쟁. 조창의(78) 씨의 아버지 故조인복 용사는 잔인한 전쟁의 포화가 빗발치던 1951년 1월 1일 가평지구(지금의 경기도 가평군 일대)에서 장렬히 산화했다. 당시 나이 28세. 

집으로 날아든 전사통지서 한장으로 알게 된 아버지의 죽음에 그의 어머니는 오열하다 쓰러지길 여러 차례. 그러나 남겨진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모질고 서글픈 세월을 묵묵히 견뎠다. 물론 아버지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었다.  

조창의 씨 역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혼을 불태운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국가유공자의 아들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지역사회 발전과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펼쳐왔다. 

자신의 고향인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을 정성스레 가꾸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표선면 충혼묘지 이설사업 추진위원으로 참여해 호국선열의 넋을 달래기도 했다. 

또 어렵게 살아온 시절을 떠올리며 10년 넘게 아이들을 위해 기부금을 전달하고 결식아동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참여하고 있는 그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47회 제주보훈대상을 수상(전몰군경 유족 부문)하게 된 조창의 씨를 [제주의소리]가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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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에서 산화한 아버지 故조인복 용사와 가정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오다 먼저 아버지 곁으로 떠난 어머니 故김문화 여사의 사진을 들고 있는 조창의 씨. 그는 부모님을 가슴에 품고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 올해 전몰군경유족부문 제주보훈대상을 수상하게 됐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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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조인복 용사와 故김문화 여사. ⓒ제주의소리

아버지 故 조인복 용사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가 7살 무렵. 1951년 1월 초하루 새해가 떠오른 그 날, 전장에 뛰어든 아버지는 종이 한 장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아버지는 모슬포 육군훈련소에 입대한 뒤 겨우 총 쏘는 법만 배워 전쟁에 참여했고 몇달 후 가평지구에서 쓸쓸히 전사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은 부대 소속이던 마을 주민이 전쟁에서 돌아온 뒤에야 아버지가 어떻게 전사하셨는지 들을 수 있었다. 

마을 주민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28살의 나이로 전장에 뛰어들어 실탄을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보급을 위해 가평지역 마을에 들어가 작전을 수행하다가 돌아가셨다는 것. 엄동설한의 겨울, 치열한 전투와 제주에서 경험하지 못한 혹한으로 다리 마저 심한 동상이 걸려 잠시 후방에 있다가 절뚝거리는 발을 이끌고 마을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봤는데 어느 순간 그 마을이 불바다가 돼 있었다고 했다.

조창의 씨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기억은 동네 어른이 들려준 이 이야기가 전부였다. 전사통지서를 받아든 어머니는 오열하며 쓰러지길 몇 차례. 이후 아버지에 대해 말을 꺼내면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는 것. 더군다나 젊은 시절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가 생활해 친척들도 기억이 제대로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혼을 달래고 제대로 모시기 위해 표선면 충혼묘지에 가묘를 만들어 모셔왔다. 그러다가 60여 년이 지난 2010년, 우연한 기회에 서울 동작동의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했다가 그 곳에 아버지의 묘가 모셔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이 활동하는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서귀포시지회에서 참배를 위해 서울 현충원에 방문했을 때 행방불명 전사자 비석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아보려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없어 이상하게 생각해 현충원 측에 문의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당시 현충원에서는 아버지의 전사 일자와 성함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수차례 찾아봐도 없다는 대답이 반복되자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찾아달라고 요청했고, 그 순간 묘가 모셔져 있는데 왜 이제야 왔냐는 소리를 듣게 됐다. 

아버지의 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그는 함께 간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뒤 현충원 직원이 써준 ‘44묘역 9판 13070번’ 메모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가까스로 아버지 묘역을 찾은 그는 시간이 없어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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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에서 산화한 故조인복 용사의 묘.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60여 년 만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찾은 그는 먼저 떠난 어머니 생각에 인터뷰 당시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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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조인복 용사의 초상화. ⓒ제주의소리

창의 씨는 “20여 분의 개인 시간을 받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묘역을 뛰어다녔다. 겨우 찾은 아버지 앞에서 시간이 없어 소주 한잔 못 올려드리고 다음에 오겠다는 인사만 건넨 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계신 것을 어머니가 아셨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 “일주일쯤 뒤 다시 서울을 찾아 아버지 앞에 술 한잔 올리고 제대로 인사를 드렸다. 다음 해에는 집사람과 큰며느리, 장손을 데리고 가 인사도 시키고 아들 노릇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30여 년이 지난 1982년 십이지장암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어머니는 암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가뜩이나 가난한데 자식들에게 피해줄 수 없다며 한사코 음식을 거부하다 한 달여가 지나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집안 방에서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묘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표선면 충혼묘지에 가묘를 만들어 모시길 60여 년.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먼저 아버지 곁으로 떠나신 어머니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7살 때 한국전쟁에서 아버지가 산화하신 뒤 어머니와 힘들게 살았다. 고구마 파치와 밀 찌꺼기를 섞어 끼니를 때우고 집엔 빈대와 이가 가득했다”며 “살아있으니 살아진다는 말이 딱 맞는 표현이다. 힘들게 살아온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라고 먹먹한 속내를 내비쳤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부모님을 가슴에 묻고 가정을 지켜나감과 동시에 성읍민속마을의 고유성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관리 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1986년부터 표선면사무소에서 약 15년간 근무하며 남제주군수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또 사단법인 성읍민속마을 이사와 성읍노인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2013년부터는 전몰군경유족회 서귀포시지회 중앙대의원으로 활동하며 국가유공자의 유자녀로 모범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더불어 손자녀들이 대학을 진학하면 매해 100만 원의 장학금을 아버지 故 조인복 용사의 기일에 전해주며 6.25전쟁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키도 했다. 

아버지의 묘를 찾은 2010년에는 TV를 보다가 손주 나이의 아이들이 공부도 제대로 못하며 가장 역할로 가정을 짊어진 모습을 보고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월드비전을 통해 매달 정기 후원을 시작, 10년째 이어오고 있다.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아버지를 가슴에 품고, 더 나은 제주를 만들기 위해 자신 역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온 조창의 씨. 올해 제주보훈대상을 수상하게 된 그의 공적이 더욱 빛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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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0년이 넘도록 힘들게 살아가는 소년소녀 가장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힘들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적은 금액이라도 꾸준히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제주의소리

올해 제47회 제주보훈대상 수상자는 조창의 씨와 더불어 △상이군경 부문, 고원찬 △전몰군경미망인 부문, 강윤필 △중상이자배우자 부문, 박경순 △특별 부문, 김덕하 등 5명이다. 이번 제주보훈대상 수상식은 오는 10일 오후 2시 정부제주지방합동청사 1층 강승우홀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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