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집 ‘끝나지 않은 이야기’ 출간

시집 한 권이 도착했다. 

“당시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홍보와 주민 회유가 급선무였던 시정에서는 나에게 팀장을 제안하였지만, 이를 정중하게 거절한 결과, 나에 대한 후폭풍은 참담 그 자체였다. 그나마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료들의 따스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석가세존의 가르침과 문학이 있었기에 암울했던 역량을 넘을 수가 있었다.”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책머리

순간, 내 기억은 10여년 전 서귀포로 돌아갔다. 지금보다 더욱 서툴었던 기자 시절이다. 막으려는 주민과 막으려는 경찰 간의 충돌로 서귀포 강정마을은 깊이 병들어 갔다. 

구럼비 바위 발파 이전이었을까, 해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문화재 관련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서귀포시청 문화예술과에서 근무하던 담당자는 꽤나 지친 목소리로 취재에 응했다. “유적지 일부라도 기지 안에 꼭 남겨놔야 한다고 (해군 측에) 전달했다”는 대답이었다. 그 순간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수화기 너머 말단 공무원의 힘없는 목소리 속에 작은 울분을 느껴서일까, 탈법·위법적 국책사업이란 강고한 압박 앞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위태로웠기 때문일까. 

시간이 흘러 기자는 계속 별 볼일 없는 기자로, 시청 담당자는 공직을 떠나 자유로운 예술인으로 살고 있다. 상처 입은 구럼비 바위는 두터운 콘크리트 아래 깊이 잠들었고, 그 위에서 사람들은 “상생·화합”을 말하고 있다.

그때 그 시청 문화예술과 직원이 내게 들려준 참담한 감정의 원인을, 시간이 흘러 시집 책머리에서 비로소 읽어낼 수 있었다. 

강정마을에서 “8대의 삶”을 살아온 윤봉택(66) 시인. 그가 21년 만에 내놓는 세 번째 시집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층 출판사)는 말 그대로 여전히 끝나지 않은 강정마을의 이야기를 다룬다.

2007년 바람보다 가을보다 가벼운 “우리가 만난 이 계절”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41일째 이어진 단식기도, “동면에서 깨어나던 개구리"와 "큰 내깍 물줄기를 타오르던 올림은어”를 멈추게 만든 구럼비 폭발음, “정낭 내리며 아끈줴기 물기 열어 오시는 이”를 기억하는 19번째까지 이어진다. 2007년부터 2021년까지 시간의 흐름이 녹아있는 구성 안에는 참담함, 슬픔, 분노, 통곡 등 강정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16
― 구럼비 도꼬마리

윤봉택

시방도 구럼비동산에 가면
나 설운 어멍 물매기가는 잔영이 보인다.
서귀포시 강정동 2742번지 
개구럼비, 큰구럼비, 조근구럼비 답케를 가르는
도꼬마리 물코에 정갱이 걷어붙이고
물코판이에 서서
논두렁 다지시던 낡은 골갱이 조록,
춘삼월 개구리 울음 따라 물메기 하며
가름에 앉아 답회를 하던 그 날 그대로인데,

2015년 8월 11일 현장엔 
포크레인 한 방으로 찍어 날린 흔적뿐
나 설운 어멍의 손 깃 묻은
구럼비 도꼬마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도꼬마리 없는 구럼비는 구럼비가 아니다.
도꼬마리 없는 일강정은 일강정이 아니다.

모른다고만 한다.
보지 못했다고만 한다.
알지 못했다고만 한다.
듣지 못했다고만 한다.
전한 바가 없다고만 한다.
하면,
팔짱을 낀 채 히쭉거리는, 그대들은 
일강정의 심장 구럼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일강정의 자존을 위해 구럼비에 남겨진 게 무엇인가.

포클레인 다이너마이트로 부서진 게
구럼비 도꼬마리뿐이 아니다.
좀녜들의 단골 개구럼비당, 개구럼비코지, 구답물, 모살덕, 선널, 
진소깍, 톤여, 선반여, 할망물, 개경담, 소금밧, 중덕, 너른널, 
서문의안통, 너른널, 물터진개, 큰여, 몰똥여, 돗부리암여, 돗부리암, 
톤돈지여, 톤돈지불턱, 솔박여, 톤여, 세벨당, 막봉우지, 밧번지, 
동도렝이안통, 동지겁

우리는 여기에 서 있지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구럼비에서 들숨은 쉬지만, 날숨을 내뱉을 수가 없다.
일강정의 깃발 솔대가 쓰러지고 
팔소장 목축이던 몰질이 갈라지고
혼올래 돌담이 하룻밤에 허물어지고

집집마다 문지방 긁으며 토하는 각혈 소리로
구럼비를 지나는 우리 미쁜 일강정 사람들
하늘이 울고,
밤하늘이 울고, 
허연 대낮이 울고
중덕 물마루에 걸린 낮달이 울고 있다.

“일강정의 마음으로 평화의 마을을, 목 놓아 함께 노래하자”고 써놓고도 공직 신분이란 이유로 알리지 못하고 때를 기다려야 했던 그는, 지금 서귀포 예술계뿐만 아니라 지역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민의 하나 된 마음을 촛불로 구현한 순간 역시 또렷이 기억하며 “시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스승 故 김광협의 가르침을 지켜나가지만, 5년 마다 시집을 발표하라는 당부는 놓치고 말았다.

그는 “수눌젠 해도 비치로운 게 조팟 검질 세불매기인데, 이제부터는 늘 깨어 있는 자세로 나 설운 어머님 오뉴월 조팟 검질 세불매듯이 하여야 겠다”며 독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시인은 1956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태어나 1991년 등단했다.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제주 바람), 같은 해 ‘문예사조’ 4월호 시 부문 신인상(바람 부는 섬 외 4편)을 수상했다. ▲농부에게도 그리움이 있다(1996) ▲이름 없는 풀꽃이 어디 있으랴(2000) ▲끝나지 않은 이야기(2021)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 문화재학으로 전남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2012년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서귀포문인협회, 제주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한국본부에 회원으로 몸 담고 있다. 동시에 문섬·한민족방언시학회·제주불교문학회·솔동산문학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서귀포문인협회 회장과 서귀포시 문화도시사업추진협의체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귀포예총 회장과 (사)탐라문화유산보존회 이사장, (사)서귀포불교문화원 원장, 서귀포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서귀포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민 모임(서미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불교 원각회 쌍계암 시자로 명상 간경 하고 있다.

다층, 133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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