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의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5) 제주올레 1만 번째 완주자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

6월의 첫 날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들렀더니, 직원이 날 반갑게 맞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녀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머지않아 1만 번째 완주자가 나올 것 같아요. 빠르면 오늘내일이나 늦어도 이번 주 안에는요. 그래서 사무국에서 특별한 선물을 주기로 했으니 이사장님께서 사인을 해주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 1만 번째 완주자라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사실 425km를 완주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주올레 길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이 아니라, 시간과 체력과 비용이 뒷받침해줘야 가능한 일이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를 도는 길, 마을과 바다와 오름과 숲길과 곶자왈을 자신의 두 발로 꾹꾹 밟으면서 걷는 길을 다 이은 것은 2007년 9월 1코스를 개장한 뒤 5년 4개월 만이었다. 그렇게 길을 다 낸 뒤에 제주올레 패스포트를 내놓았고, 한 코스에 세 번(시작점, 중간지점, 종점) 스탬프 확인 도장을 찍으면서 26개 코스를 완주한 올레꾼들에게 완주증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그 1만 번째 완주자가 이번 주 안에 탄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각 코스를 상징하는 스탬프 와펜이 26개나 달린 완주 족자에 이름만 빈칸으로 남겨둔 채 축하한다는 사인을 해주었다. 완주 족자를 넘겨주면서 직원에게 부탁했다. 만 번째 완주자가 센터에 도착할 즈음에는 꼭 내게 전화를 해달라고. 되도록 시간 내서 센터로 달려오겠노라고. 1만 번째 완주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었기에.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다음날 저녁에 듣자 하니 20명이 남았단다. ‘ 아, 내일쯤엔 1만 번째 완주자가 오겠구나.’ 생각했다. 올해 봄부터는 하루에도 30명 안팎의 완주자가 골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나, 다음날 온종일 두근두근 거리면서 기다렸지만 8명이 남았단다. 혹시나 완주자가 올까 해서 중문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학술대회 기조 특강을 마친 뒤에 부랴부랴 센터로 달려와서 기다려봤지만 허탕이었다. 

세 번째 날. 8명밖에 안 남았으니 점심시간 전에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일부러 센터로 나가 원고 작업을 하면서 기다렸지만 이날 따라 완주증을 받으러 오는 완주자는 별로 많지 않았다. 오후까지 기다리다가 일정이 있어서 모슬포 쪽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오늘 안에 1만 번째 완주자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체념하면서. 이곳에서 걸은 뒤에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센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1만 번째 완주자가 드디어 도착했단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의 자매분이 동시에. 하지만 난 서귀포에서 자동차로 50분이나 걸리는 모슬포에 있었다. 날아가도 불가능했다. 난 직원에게 사정했다. 그분들께 다음날, 아침 혹시나 나와 차 한잔을 할 수 있는지 여쭤봐 달라고. 조금 뒤 전화가 또 걸려왔다. 다행히도 다음날 오후 비행기로 떠날 예정이라서 9시에 만날 수 있단다. 

# 자매는 용감했고, 서로를 아꼈다

다음날 설레는 맘으로 약속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센터에 도착했다. 1층 만남의 공간으로 들어서는데, 두 여자가 뭔가 서류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었다. 직원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옷소매를 끌어당기면서 그들 앞으로 데리고 가더니 “이분들이 1만 번째, 1만 1번째 완주자분들이세요.”라고 외쳤다. 그분들은 후원회원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중이었다.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아, 이분들이 사흘 내내 애를 태우게 만들다가 밤늦게 도착했던 그 자매분들이구나.’ 
마주 앉아 통성명을 했다. 세상에나. 자매 중 언니인 윤계옥 씨는 만 65세란다. 여동생인 윤은옥 씨는 그녀보다 네 살 아래. 두 60대 자매가 함께 걸어서 제주 한 바퀴를 돌았다니. 지난해 세상을 떠난 두 살 아래 남동생 동철이와 시흥리를 마흔일곱 번이나 드나들면서 길을 찾던 초창기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남매가 시작한 길의 1만 번째 완주자가 자매라니, 이 또한 기막힌 우연이 아니고 무엇이랴. 

1만 번째 완주자가 된 소감부터 물었다. 사십 여 년 중고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했다는 언니가 차분하게, 그러나 너무나 당혹스럽다고 대답했다. “어젯밤부터 정말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너무나 축하해 주셔서 어리둥절하고 믿기지도 않고 이런 축하받을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고.” 제주올레 홈페이지도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제주올레 완주자 숫자도 몰랐고, 그런 만큼 1만 번째 주자가 되리라고는 짐작도 기대도 못 해봤단다.

사실 제주올레 완주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단다. 2019년 2월에 퇴직하고 산티아고 길을 걸으러 가고 싶었지만, 왠지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망설이던 중 남미 33일 여행상품을 보고선 그것부터 다녀오자 싶어서 다녀왔단다. “그런데, 이제 가볼까 싶었는데 딱 코로나 19가 닥치면서 해외 길이 다 막힌 거예요. 사실 국내에 있는 제주올레는 좀 더 나이 들어서 해도 되니까 맨 나중에 하려고 밀어두고 있었는데, 그걸 먼저 하자고 계획을 수정했어요. 코로나 때문에, 아니 아니! 코로나 덕분에 제주올레 길을 완주한 거지요. 그런데 1만 번째라니, 이런 행운이 대체 어떻게 찾아온 건지 모르겠어요.”

40대 때 동료 교직원들과 연수차, 담임으로서 학생 수학여행단을 인솔해서 와보기도 했던 제주였지만 여동생과 걸어서 한발 한발 밟은 제주는 또 다른 곳이었단다. “대한민국에 제주도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재미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바다와 숲.....그리고 오름.. 참 행복한 완주였어요.”

사실 처음에는 뭘 몰라서 고생도 했단다. 지난해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사흘간, 10월 초에 4박 5일간 두 차례 길을 걸으러 왔지만, 초행이라서 고생을 사서 했단다. “공항에서부터 코스를 시작해서 그 무거운 배낭을 잔뜩 짊어지고 길을 다 걸으면 숙소를 잡는 식으로 걸었거든요. 그러니 엄청 고생했지요. 나중에야 숙소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으면서 한 숙소에 짐을 딱 부려놓고 간단하게 그날 쓸 것만 챙겨서 나오는 방식으로 바꿨더니 훨씬 편해지더라고요.”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올해 들어서는 2월, 3월, 4월, 6월 초 총 6번에 걸쳐 3박 4일, 4박 5일씩 제주를 찾은 끝에 드디어 14코스를 마지막으로 윤 자매는 대장정을 끝냈단다. 아무리 자매라지만 그 긴 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 갈등은 없었던 걸까. “여동생이 나보다 체격도 크고 키도 크고 해서 언니인 절 잘 챙겨주는 편이고요. 뭐 취향은 조금씩 달라서 가끔은 소소하게 갈등도 있었고, 아 쟤랑 다시 오나 봐라, 생각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핏줄이라서 그런지 또 금방 풀리더라고요. 그게 자매의 힘이랄까.”

언니는 평생 교사, 동생은 작은 여행사 직원으로 일하다 코로나로 인해 현재 휴직 중. 둘 다 딸만 하나 둔 엄마였지만, 자식은 다 키웠기에 가족으로 인한 부담은 없었단다. 하지만 자매 모두 길냥이의 엄마들이었기에 자기들이 집을 비운 사이에 찾아들었을 길냥이들 걱정이 늘 마음 한편에 있었다고 그녀들은 말했다. 처음에는 키우는 금붕어도 걱정돼서 이웃집에 맡겼지만, 일주일 정도는 끄떡없다는 말에 마음을 놓았단다.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가장 기억에 남는 코스는 어디였을까. 둘 다 동시에 추자도를 꼽았다. 추자도를 워낙 좋아하는 나인지라 무척 반가운 마음에 그 이유를 좀 더 캐물었다. 너무나도 풍경이 아름다웠는데, 배 시간에 쫓겨서 막판에 지름길을 택해서 올레길 구간을 살짝 생략한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단다. (내가 책에서 그토록 추자도에서 길을 제대로 걸으려면, 그리고 추자도의 아름다운 일몰과 일출을 즐기려면 반드시 1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건만.. 우우). 기회가 생기면 꼭 추자도를 천천히, 여유 있게 즐기면서 걷고 싶단다. 

언니 윤계옥 씨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완주는 처음이라서 성취감에 쫓겨 좀 급하게 한 거 같아요. 다음에는 정말 천천히 즐기면서 걸어야겠다, 그럴 수 있겠다 싶어요. 올레길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방방곡곡 정말 아름다우니 여기저기 걸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우선 신안 주변 섬들도 다 돌아보고 싶어요. 섬티아고라든가.”

사진=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완주자가 하필 동시에 들어온 자매인지라 우리 사무국은 1만 번째 완주자 선물인 완주 족자를 부랴부랴 하나 더 만들어서 동생에게도 선물했다. 1만 번째 완주자를 향한 사흘간의 기다림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제 또 우리는 10만 번, 100만 번째 완주자를 맞는 날을 기다리면서 꼬닥꼬닥 이 길을 걸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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