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서른다섯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덕판은 탐라시대 제주 연안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자리돔 등을 잡는 데 주로 이용하였던 ‘테우’에서 발전했다. 이물머리(배의 맨 앞쪽 비어 있는 공간)에 설치하는 큰 멍에를 의미한다. 멍에(駕)는 쟁기질 할 때 소목덜미에 얹는 굽은 나무다. 한자로는 덕판(德板), 중국에서는 상곤두(上袞頭) 또는 일자목(一字木)이라고 부른다. 명대(明代) 심대(沈岱)는 ‘남선기(南船記)’에서 복사두(伏獅頭)라고 했다. 

덕판은 목선에서 봉두판(封頭板) 위에 덧붙인 가로로 설치한 반원목(半圓木)을 이르며, 봉두판을 받쳐주는 작용을 한다. 그 위의 좌우에는 닻줄이나 계류줄을 맨 낮은 나무 기둥을 각각 세웠다. 덕판 위의 양쪽 끝머리에 버릿줄(배를 딴 배나 육지와 연결해 잡아 매는 줄)을 매기 위해 박은 것은 참나무 몽고지다. 물을 헤쳐 나가는 노(櫓)는 배 구멍 끝에 세우는 짧은 나무인 ‘사지’다. 

제주 현무 암반 해변에 잘 견디는 것이 바로 덕판이다. 자료에 의하면 덕판은 원양 어선이나 연륙선으로서의 기능 외에 해전용으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변방의 아홉 개 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의 4층이 탁라(托羅, 탐라)를 상징했을 정도로 제주 사람들의 원거리 항해와 해전 능력은 탁월했다. 제주 배를 ‘싸움판배’ 또는 ‘당도리배(바다로 다니는 큰 목조선)’라고 불렀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도리배는 당돌하다에서 유래한다.

덕판은 확실한 명칭은 없으나 고려 시대에 제주에서 배 두 척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제주에 배 100척을 짓도록 요청한 적도 있었다. 조선 수군 역시 덕판을 진화해 병선(兵船)을 만든 것이 판옥선(板屋船)이 아닌가. 이는 모두 거센 파도와 현무 암석에 강한 제주배의 기능을 인정했기 때문. 덕판은 1939년까지 21척이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어선 개조 정책과 과다한 건조 비용 등이 문제가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해, 해방 당시 우도에 한 척 남아 있던 것마저 사라졌다. 1996년에 재현한 덕판배가 한때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국립제주박물관 야외에서 전시됐던 덕판배.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덕판은 약 5톤 미만의 소형선으로 한라산록의 ‘자배낭’이나 ‘조밤낭’ 등으로 불리는 구실잣밤나무로 제작됐다. 섬유질이 강한 솔피나무[쇠석과 솜비 줄, 가린 석 등 농기구를 만들었는데 돌오름에서 나무를 해다가 덩두렁마께(짚을 손질하기 위해, 덩두렁이라는 둥글고 넓적한 돌 위에 짚을 올려 놓아서 두들기는 뭉툭한 방망이)로 나무를 두드리고 쇠석을 만드는 선친을 도운 추억이 있다]로 나무 재질의 못인 ’피새’를 만들어 이음 부분을 연결했고, 이물의 상부에 두툼한 나무판인 ‘덕판’과 그 밑으로 통나무 보호대를 가로로 놓고 웬만한 충격도 흡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현무암이 많은 해안접안을 고려했다. 또한 돛이나 노, 키 등 모든 동력원이 기능을 상실했을 때 배가 안전하게 표류하도록 대나무로 만든 부동식 닻인 ‘풍(風)’을 장착해 원거리 항해에서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1996년에 덕판 복원에 참여했던 故 김천년 옹이 기록한 자료를 보면, “피새는 오줌을 받아 뒀다가 썩으면 그 오줌에 나무를 삶은 후 다시 맹물에 삶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기록한 것이 보인다. 썩은 오줌에 나무를 삶은 것은 질기고 썩지 말라는 뜻이고, 맹물에 다시 한 번 삶은 것은 냄새가 나지 말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배 한 척을 짓기 위해서 한라산에서 1년 동안 나무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한 덕판을 이물에 대어 제주 연안에서의 자유로운 접안 항해와 원양에서의 안정성을 확보한 데서도 알 수 있듯, 덕판은 제주 바다가 갖는 지역성을 철저하게 반영한 배로서, 옛 제주인의 조선술의 수준을 가늠하게 한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지금은 서귀포 칠십리에 덕판 미술관이 있다. 

탐라의 덕판배를 업데이트 시킨 판옥선(板屋船)과 거북선: 덕판배의 나무못 ‘피새’사용, 왜구병선(兵船) 격파

1473년(성종 4년) 신숙주는 “왜선을 관찰하니 판자가 얇고 쇠못을 많이 썼다. 왕래하는데 경쾌하고 편하지만 배가 요동치면 못 구멍이 차츰 넓어져 물이 새기 때문에 배가 쉽게 썩는다”고 주장해, 나무못 피새를 판옥선 건조의 기본 틀로 사용했다. 판옥선은 조선 명종 때인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계기로 건조, 왜구들이 6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남 해남에 쳐들어와 난동을 피우자, 조선 수군은 해상 전투에 대비해 판옥선을 만들었다. 판옥선은 위 갑판(판옥)과 아래 갑판 등 2층 구조로 돼 있다. 아래 갑판에서는 격군들이 노를 젓고, 위 갑판에서는 병사들이 적선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다. 판옥은 배의 갑판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의 사면을 판자로 둘러 가린 다음, 그 위에 판판한 나무를 덮어 만든 옥상이 있어서 판옥선이다. 일본 배에 비해 크기가 크고 선체가 높아 일본 배보다 더 많은 병력과 무기를 실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기본 전술은 상대의 배에 다가가 총을 쏘거나, 병사들이 상대의 배에 옮겨 탄 뒤 백병전을 벌이는 것. 반면 조선 수군의 전술은 적선과 거리를 두고 대포나 활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보병과 포병의 싸움, 판옥선은 크고 높아서 일본군이 뛰어 오르기 어려웠고, 일본 배보다 화력이 월등했다. 따라서 빠르기는 해도 화력이 떨어지는 일본 수군의 작은 전투선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판옥선의 단점은 이동 속도가 느린 것이었다. 조선 수군을 이끌었던 이순신(1545-1598)은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해 거북선을 만든 뒤 돌격선으로 삼았다. 속도가 빠른 거북선을 먼저 돌진시켜 적의 대열을 흩트린 다음, 판옥선에서 화포 공격을 퍼 부었다. 1592년 당시 임진왜란에서 판옥선 200여척과 거북선 7척이 있었다.

오늘 날 제주의 ‘당도리 배’는 무엇인가?

한편, 1105년 고려 숙종 때,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 행정 구획인 군(郡)으로 개편돼 독립 체제가 사라졌다. 만일, 탐라국이 오늘까지 남았다면 탐라국은 어떤 모습일까. 

제주는 2006년에 특별자치도가 됐다. 어느 정도 독립 체제인 셈인데, 뿌리 철학이 없다보니 곶자왈 파괴와 관광객 유치가 제주 발전이라고 여겼다. 제주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혁신적인 농·수산업과 생산 제조업이나 세계적 특성 대학 설립, 반도체 설계 산업 유치 등은 생각 못했다. 시대착오적 비전이었다. 조선시대(1629-1823)는 흉년을 이기지 못해 뭍으로 나가는 사람 많아 내려진 제주도민 200년 간 출도(出道) 금지령, 1947년 7년여에 걸친 4.3을 겪은 제주섬. 지금은 평화의 섬이란 국제 세미나가 해마다 열린다. 평화의 섬 제주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국가에서 4.3 보상은 제주도민이 100년 앞을 내다보고 살아갈 수 있는 기본 틀을 놓으며 제주민이 자강(自强)할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코로나 백신 주사도 자국민 먼저란 자강론을 보면서, 제주는 제주인이 지켜야한다고 느낀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으로 명명된 제주특별법의 핵심 가치를 논의하고 있다. 국제자유도시 추진으로 인해 제주의 환경 파괴와 불평등 증대, 천정부지의 지가 상승, 생활환경 악화 등 제주의 가치가 훼손되고, 도민의 삶의 질이 후퇴하고 있는 현실을 아는가? 제주특별법에 탐라국의 ‘당도리 배’의 혼(魂)을 담아야한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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