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정조의 위협(?)을 느낀 데칸고원
나는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과거에 이미 일어났던 일을 배워, 그 지식을 현실에 반영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유추해보는 것은 공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놀이에 가깝게 여겨질 정도로 즐거운 일이다.
수학이나 물리는 영 아니올시다! 이지만, 역사만큼은 내가 재구성해가는 재미가 쏠쏠해 이과를 선택한 지금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만약 랑케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건 역사가 아냐!’ 하며 무덤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재미난 걸 어쩌란 말인가. 하하하.
인도여행을 시작하고 20일. 엘로라를 방문했을 땐 이미 질리도록 지쳐있던 상태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16번 굴의 ‘현지인은 10루피, 외국인은 250루피’라는 엄청난 입장료 차이에도 분개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 10루피를 아끼려고 옷가게 점원과 30분을 실랑이 했었던 나였기에 이때 내가 얼마나 안 좋은 상태였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세말하면 입 아플 정도이리라.
내가 정말로 이 자리에 서 있구나. 가끔은 정말 이 지도상의 모든 나라가, 모든 도시가 실존하는 곳일까? 싶었지만, 정말로 실존하고 있는 거였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차라리 바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 잘 올랐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그 바위에서 생명의 위협과 정조의 위협을 동시에 느꼈으니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그리 거창한 일은 아니다. 한 무리의 현지인이 내게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해오고, 내가 찍어주며 립 서비스로 'You look good.'이라고 말하자 한 인도인이 갑자기 One kiss please라 말하는 것을 one-piece please로 알아듣고 I don't have one-piece라고 대답한 생뚱맞은 사건일 뿐이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 상황에 One kiss please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남자들을 박씨시라고 생각한다면 one-piece please는 차라리 설득력 있는 문장 아닌가? 솔직히 그렇게 빈티 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물론 그게 엄청난 착각이라는 건 채 10분도 되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가족끼리 놀러 온 현지인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느라 안면근육에 경련이 일어 날 정도였으니까. 나중엔 대기 팀(?)들이 몇 팀씩이나 기다려서, 결국 삼십 여분 동안 한 번도 앉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저기 저쯤엔 인부들이 돌을 깨내려고 망치질을 했겠지?’, ‘저쯤에선 지휘하는 사람이 서 있었을라나?’ 하는 생각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내가 깔고 앉은 돌의 표면 하나하나마저도 다 의미 있게 느껴져서, ‘거칠거칠한 이 부분은 꼭 사람이 웃는 모습 같네, 이 부분을 작업한 인부도 그렇게 느꼈을까? 그랬다면 정말 시대를 뛰어넘은 공감이잖아! 영화 동감같아!’ 하고 생각해버렸다. 한국에 돌아오면 꼭 영화 동감을 다시 보자는 생각과 함께.
가만 보면, 난 멀뚱히 앉아있는 시간을 참 좋아한다.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전개시키다 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요즘처럼 정신없이 지내는 때엔 엘로라 16번굴의 석조건축물 위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던 시간이 너무나 그립다. 과거와 현실이 온통 뒤섞여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과거인지 분간해 낼 수 없었던 공간. 그리고 시간.
그리움. 내 빈곤한 어휘력으로 인도를 이 이상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기나 할까. 아직도 틈이 날 때마다, 정말로, 정말로, 수학문제를 풀다 어깨가 뻐근해서 기지개를 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마음은 인디안 에어라인을 타고 인도로 날아가 버리곤 한다. 내가 걷지 못한 길. 내가 마시지 못한 공기. 내가 겪지 못한 수많은 사건과,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수많은 무언가들.
델리, 아그라, 바이샬리와 엘로라. 아직 바라나시의 장터도, 녹야원에서 만난 초전법륜상에서의 감동도, 고아에서 만난 인상 좋은 민박집 사장언니와 함께 했던 미사도, 푸리에서 만난 과일장수 아저씨에게 덤으로 받은 포도 이야기도, 아우랑가바드에서 세 시간동안 졸다 보다 했던 인도의 맛살라 영화 ‘GURU'나, 뭄바이의 눈 튀어나오게 비싼 물가도, 함피에서 소매치기 당한 100달러의 설움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것 같은데…. 6월도 끝자락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수험생에게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음속과 같다지만, 그간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으면, 산더미 같은 이야깃거리 중 고작해야 너댓개밖에 풀어놓지 못한 것인지.
지금까지는 인도를 ‘되돌아’ 봤으니, 이젠 앞을 ‘내다’ 봐야지. 일단 불만이 많아서 먹고싶은 것도 많은 수험생 생활을 멋지게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서 내가 땀 흘려 번 돈으로, 어디로든지 떠나자! 그 곳이 한국의 숨겨진 마을이 되었던지, 아프리카가 되었던지, 유럽의 ‘헉’소리나게 사치스러운 호텔이 되었던지! 지금 기분 같아서는 왠지 또다시 인도의 게스트하우스가 될 것 같지만.
생각하면, 그리움 뿐이다. 무서워서 울면서 밤을 지새웠던 빤짐의 엘리트 롯지도, 지금은 그저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뿐. 그러니, 더 이상은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다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열일곱의 끝과, 열여덟의 시작을 함께했던,
‘나의’ 인도에게.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