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가치 지방선거 아카데미] 이규배 이사장 “정의로운 저항, 민주주의가 4.3 정의” 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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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는 24일은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제주국제대학교 교수)을 초청해 네 번째 ‘제주 지방선거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제주의소리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는 24일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제주국제대학교 교수)을 초청해 네 번째 ‘제주 지방선거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제주가치는 6월 3일부터 7월 8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지방선거 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대비하기 위한 정치, 사회 분야 특강이다. 

이날 ‘제주4.3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특강에서 이규배 이사장은 “제주4.3이 궁극적인 화해에 이르는 길은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억울함을 푸는 해원에 이른다. 이어서 가해자들의 과거 잘못에 대한 고해를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참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의는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zoom을 이용해 진행됐다.

이규배 이사장은 일제강점기부터 4.3봉기와 대학살까지 주요 과정을 국내외 자료를 가지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까지 제주에 대한 기록은 한마디로 원만하다. 1946년 12월 동아일보 노일환 기자의 ‘보고(寶庫) 제주도 시찰기’에 따르면 “도민은 거개가 노동부대며 유한층은 극소하다. 생업은 반어(半漁) 반농(半農)으로서 8할이 중산이고 토지혁명이 불필요하리 만치 도민 일반에게 균배(均配)되어 있으므로 비교적 육지와 같이 도민 상호간에 있어서 자본가적 착취를 감행하는 경향도 희박”하다며 “해방 후 5~6만명의 전재민이 이 섬에 돌아왔으나 거리나 촌락에 헐벗고 기아에 떠는 동포의 모습이 없음은 육지에서 못 보던 도내의 실태 … 희망에 찬 제주야, 잘 자라라”라고 보도한다.

미군정 사법부장 우달 박사의 고문 김영희 박사, 검찰총장 이인, 김익렬 연대장 등도 이와 비슷한 인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규배 이사장은 “인심도 풍속도 자연도 물산도 풍요롭고 평등한 사회, 해방 전후의 제주도는 이러한 땅이었다. 그리고 4.3의 참극이 발생한 곳도 이런 땅이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규배 이사장은 1947년 3.1운동 기념대회 발포사건 이전까지 제주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친일파·민족반역자·악질 경관 숙청이라고 꼽았다. 여기에 제주도의 군사기지화, 입법의원 선거와 삐라 문제, 모리배들의 부패, 공출 제도, 도(道) 승격 여부 등도 꼽힌다.

특히 당시 제주에 조직됐던 ‘제주도 인민위원회’ 역시 당시 언론에 의해 “중간 노선”,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했다는 평가받았다. 1948년 1월 미군 제24군단 정보보고서는 “제주도는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으로 분열돼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이규배 이사장은 당시 제주사회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정치 노선을 평가하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이 높았을 뿐 공산주의와는 달랐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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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 ⓒ제주의소리

1946년 8월 미 군정청 여론국이 진행한 국민 8453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찬성하는 정치 형태’를 묻는 질문에 85%(7221명)가 대중정치(대의정치)로 응답했다. ‘어떤 이념에 찬성하냐’는 질문에는 70%(6037명)가 사회주의라고 답했다. 자본주의는 14%, 공산주의는 7%에 불과하다. 

1947년 조선신문 기자회가 서울 시내 10곳에서 2495명에게 진행한 가두 설문조사에서도 ‘선호하는 정권 형태’에 71%가 인민위원회라고 답했고, 국호는 70%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택했다.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르다.

이규배 이사장은 “이런 기록들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압도적으로 선호했던 해방 조선인의 70%도 좌익이었다는 의미다. 제주만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주=좌익=붉은 섬'이라는 논리라면 '해방 조선=좌익=붉은 반도'가 되는 셈”이라고 피력했다.

그러나 제주북국민학교에 3만명이 모인 1947년 3월 1일, 벌어진 발포사건은 제주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놓는다.  

제주도군정 책임자 스타우트 소령도 “3월 1일 시위군중은 플래카드만 들고 있었을 뿐, 평화적으로 S자 모양으로 열을 지어 행진하던 평범한 제주사람들이었다”고 말했지만 경찰 당국은 습격 행위에 대응하는 정당방위로 고집했다.

이에 반발해 제주도정과 경찰까지 참여한 전체 직장 95%의 총파업까지 불사했지만 당국은 민심 수습이 아닌 강공책을 고집했다. 이규배 이사장은 “이런 판단은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과오가 됐다. 결국 제주는 1947년 3월 1일 이후 극히 일부 경찰·우익단체 수뇌부에 의해 ‘붉은 섬’으로 낙인찍히고 혹독한 탄압에 직면했다”고 바라봤다.

이규배 이사장은 일부에서 제기하는 ‘4.3공산폭동’을 반박했다. 그는 “무력적인 측면에서 350명의 무장대와 30정의 소총, 죽창, 도끼 같은 원시적 무기로 혁명이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당시 특파원 보도를 인용하며 “(4.3 봉기에 사용된 무기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무기”라고 왜곡 주장에 맞섰다.

그러면서 “혁명을 위한 경제 사회적 조건과 무력적 조직은 지나치게 열악했다. 무장 봉기는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된 거사가 아니라, 경찰·서청의 탄압에 저항하고 단선 단정 반대를 위해 앉아서 죽느니, 서서 죽기를 각오한 의연한 봉기”라고 평가했다.

이규배 이사장은 4.3과 관련해 앞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4.3정신의 본질 회복’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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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특강은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됐다. ⓒ제주의소리

그는 “만약 4.3이 무고한 양민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수난사’만 거론된다면 ▲제주사람은 가련하다는 인간적 동정심 ▲제주사람들은 무기력했다는 몰주체성 ▲찬란한 관광지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슬픈 역사와 과거로만 기록될 것이다. 결국 봉기의 명분이 증발해버린다”고 우려했다.

더불어 “선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과 바꾸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불의와 폭력에 맞서는 정의로운 저항, 단선 단정에 맞섰던 조국 통일에의 지향, 불가침의 생명·자유·재산에 대한 존중과 이를 위한 평화, 그리고 민심을 헤아리는 정권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이 바로 4.3의 정의”이라고 규정지었다.

여기에 4.3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미군정의 정책과 제주 인식, 대응 방식도 진상 규명의 대상이라고 더했다. 

제주가치의 지방선거 아카데미는 ▲7월 1일 특강 ‘탑동·강정·제2공항’(홍영철 제주참여환경연대 공동대표) ▲7월 8일 집담회 ‘우리가 정치 참여를 해야 하는 이유’(양희주·김현지·고권일·박찬식)로 마무리한다. 

참가 신청은 전날 까지 온라인( www.bit.ly/제주_지방선거_아카데미 )과 전화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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