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③ 포로, 냉전에서 평화를 말하다

한국전쟁 제71주년.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전쟁기의 제주도는 어떤 역사로 기록되고 있을까. 4.3과 예비검속,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참혹한 현장이나 희생자들이 해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1950년 6월25일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육지에서 밀려온 수많은 피난민,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설치된 육군훈련소, 중국인민지원군 전쟁포로수용소의 설치, 미군 비행장으로 조성된 알뜨르비행장(모슬포)과 정뜨르비행장(용담). 거기에다 끝나지 않은 4.3의 비극은 한라산 등지에서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으로 무고한 목숨들이 주검으로 쌓여갔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지난해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에 이어 올해 71주년을 맞아 [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 기획을 다시 연재한다. 냉전시각에서 고착화된 한국전쟁기 제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제 평화유산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기억하는 작업이다. 제주가 ‘박제화된 평화의 섬’이 아니라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를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를 이끄는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 편집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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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모슬포포로수용소 포로들. 미송환(대만행) 중국인민군포로들은 “반공포로”(한·미군) 또는 “반공의사”(대만)라고 불렸다(RG 111-CC, Box 1, NAⅡ).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의소리

“인종, 국적, 종교적 신앙이나 정치적 의견에 근거를 둔 불리한 차별 또는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기타의 모든 차별없이 균등하게 대우”(제네바 제3협약 16조, 1949. 8. 12).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은 전쟁포로의 규정과 인권, 대우에서 진일보한 정책을 제안하고 제네바 3협약에 합의했으나 모두 비준은 하지 않았다. 뒤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은 제네바 3협약의 적용을 받은 첫 사례이다.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전쟁초기 포로에 대한 국제협약을 준수한다고 선언했으나 전황과 정책이 변화하면서 태도를 돌변했다. 포로 정책의 변화는 국제협약과 달리 포로 처리와 분류, 송환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동아시아의 냉전체제와 남북한의 체제 경쟁, 한국사회의 군사화 강화에 핵심적인 사상적 근저로 작용했다. 이는 제주도 포로수용소와 평화의 섬이라는 담론에서도 풀어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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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8월 8일 8제주시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이들은 “악질포로”(한국군경비) 또는 “강성포로”(미군)라고 불렸다(RG 111-SC, Box 927, 432772, NAⅡ).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의소리

왜 21세기 제주도에서 포로 문제를 소환하는가?

앞의 사진은 생경한 장면이 아니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쩌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처음 보는 포로 사진과 영상이 계속 발굴되거나 언론에 소환되면서 포로 문제는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71년 동안 동아시아 냉전 체제에서 일상화된 단어인 “반공포로”와 “악질포로”가 한국의 군사, 정치, 문화, 교육 저변에서 사라지지 않고 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 근원이 포로와 4.3 그리고 평화를 지향하는 제주도의 정체성이지 않을까. 

‘반공포로’는 군사작전 과정에서 “유엔군의 지속적이고 편파적인 교화프로그램”에 기반한 고도의 심리전 용어이다. 국내 심리전에서 이승만 정권은 허약한 정치 기반을 만회하고자 “반공애국포로”, “반공애국청년포로”라는 신생어를 ‘영웅 서사’와 반공서사로 재생산했다. 대만은 중국인민지원군 중 비송환포로를 ‘반공의사(義士)’ 라는 영웅이미지로 탈바꿈시켰다. 

‘악질포로’란 미군이 송환포로들 중 장교 또는 지도자급의 인물을 강성포로(Pro-Communist PW)라고 지칭했던 것을, 한국군과 민간인이 입에서 입으로 ‘악질포로’로 재해석한 것이다. ‘반공포로’와 ‘악질포로’는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빨갱이(Red)’ 담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두 포로 집단을 바라보는 제주도민과 국민의 시선은 정부가 생산하고 언론이 받아적는 두 단어에 고정되었다. 이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한국전쟁 포로, ‘심리전의 잠재적 자원’

(영상설명=교환작전(Operation Swap)이라는 제목으로 35mm 8분 53초분량의 무성 필름(위 영상은 편집본)이다. 1953년 8월 4일 226통신중대 폴 굴드 슐레신저(Paul Gould Schlessinger, 1930∼2009)가 8제주시포로수용소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이 송환 절차에 따라 제주도를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 장면, 폐쇄된 수용동의 내부 모습 등을 촬영했다. 이 영상은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포로들의 표정과 주변 풍경, 수용동 내부의 여러 곳을 세밀하게 담고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를 더하고 있다.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중국군 포로는 제주도에 오기 전 거제도에서 포로 정책에 따라 재분류와 재교육을 강요받았다. 그 과정에서 두 단어와 두 집단이 탄생한 것이다. 개전 이후 1950년 7월까지 미국은 포로 정책에서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들을 1:1 교환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전세 역전을 위한 미군의 대규모 작전은 38선 회복뿐만 아니라 중국의 참전을 예상한 상태에서 심리전 강화 정책으로 급선회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1950년 8월 조직된 국가 심리전 전략위원회(PCB)는 저예산과 최대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게 심리전이라고 판단했다. 9월 대규모 작전 직후 CIA와 군 조직은 포로를 재분류하고 이들에 대해 전향 또는 재교육을 시켜 본국에 송환되지 않도록 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이때 미 육군 심리전국장 맥클루어는 육군부와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군까지 포함한 신문, 교화, 훈련 센터를 통해 포로에 대한 전쟁범죄조사와 “헌신적인 반공주의자로서 포로를 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정치적 재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한국정부는 미국에 ‘남한 출신 의용군’의 분류와 석방 요구, 수용소 내 공작원 침투 등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1950년 11월부터 제네바 협약과 달리 이념에 따라 포로를 분류하면서 포로 간의 내부적 갈등을 유발시켰고 그 과정에서 폭력적 시위나 살인이 빈번해졌다. 응축된 포로들의 불만은 1951년 6월 이후 포로 재교육 과정에서 극단적 폭력으로 비화되었다. 1952년 5월 7일 거제도포로수용소 소장 도드 장군의 납치 사건은 포로 간의 갈등과 대립, 수용소 포로 정책의 실패,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재교육 프로그램의 문제점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미군은 미송환 포로와 “편파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이식”을 통해 ‘반공포로’로 규정했으며, 송환포로 중 전향 공작이나 재교육에 저항·방해하는 세력을 분리·격리하여 “강성” 또는 “악질포로”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분류된 포로는 송환 유무에 따라 육지와 섬 등지에 분산·격리되었다. 이 작전 중에서 이송을 반대하는 포로는 ‘악질포로’, 찬성하는 포로는 ‘반공포로’ 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러한 포로 정책은 PCB의 심리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용소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은 그 원인과 과정보다는 ‘악질포로들’의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기획된 ‘폭동’, ‘소요’라고 포장되어, PCB가 전 세계 언론에 선전하는 심리전의 도구가 되었다. 라디오, 삐라, 기록영상(뉴스), 음악, 연극 등 여러 장르에서 ‘악질(빨갱이) 포로’와 ‘반공포로’의 대결, 반소·반중의 ‘거짓 평화’와 미국식 자유·반공주의를 대립하는 전쟁 심리전이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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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유엔군 3모슬포포로수용소 전경. 초기 천막 수용동 뒤로 산방산이 보인다(RG 111-C, Box 1, NAⅡ).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의소리

제주도에 온 포로들, 그들은 누구인가

전쟁 초기 제주도는 포로의 섬으로 낙점될 뻔했다. 1950년 12월 30일 2병참사령부는 유엔군 1부산포로수용소의 민간인 억류자 50명과 포로 100,000명을 포함한 104,775명 전원을 2제주공항(정뜨르비행장·수근동(水根洞, 다끄네 마을)과 1제주공항(지금의 알뜨르비행장) 동쪽 지역 하모·산이수동 일대 해변 두 곳을 포로수용소로 지정해 이송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비 조사단은 제주도의 급수 및 전기 시설의 부족, 정치적 불안(미군에서 한라산의 100명의 ‘게릴라’ 문제를 언급) 등을 이유로 거제도를 선택했다. 1951년 8월부터 주한미군사고문단 파견대는 제주 육군훈련소에 대규모 막사를 신축하는 데 거제도 포로를 동원했다

그 이후 미군 민간정보교육국의 재교육 과정에서 중국군 포로는 수용소 내 권력의 불균형, 포로의 송환 선택에 영향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용소 내의 폭력과 시위는 ‘악질포로의 지하공작’이나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통해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포로에 대한 심리전 기획에서 제네바 송환원칙 대신 ‘자원송환원칙(포로 스스로 송환국가 선택)’으로 선회하면서 폭력과 시위는 예고된 것이다. 그 원인은 첫째, 애초 미군이 포로에 대한 경비와 대응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둘째, 포로에 대한 정치교화 또는 배신자 프로그램인 재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미 육군과 조지워싱턴대 인적자원연구소가 분석한 보고서에서는, 미군이 수용소 내 포로 간의 갈등 조장, 한국정부가 공작원을 파견하여 상대방 수용동 파괴 공작을 하는 데에 대한 방조, 포로 간의 폭력이나 살인 및 교사를 묵인·방조하고 ‘반공포로’ 조직을 지원하는 등 편파적인 수용소 정책을 유지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송환포로들은 시위와 저항에 나선 것이다. 그 때 국내외 언론은 미군의 보도 자료를 토대로 “악질포로들의 폭동”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 끝에 중국군 포로는 1952년 4월 19일과 6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애초 예정한 부지에 이송되었으며 1952년 12월 말 3모슬포수용소와 8제주시수용소에 각각 14,217명과 5,887명 등 총 20,104명이 수용되었다. 3수용소는 대만에서 파견된 23명의 재교육 교사(요원)들과 함께 기존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었다. 8수용소 포로들은 1952년 10월 1·10일 두 차례 송환 요구의 대규모 시위 과정에서 미군의 강경진압으로 56명이 사망하고 21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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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채취. 1953년 여름 모슬포 산이수동 해변에서 포로들이 미역 채취하는 장면(Logistical Support to PW, 1953, RG 338, A1 224, Box 1160, NAⅡ).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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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 채취. 1953년 여름 모슬포 산이수동 해변에서 포로들이 미역 채취하는 장면(Logistical Support to PW, 1953, RG 338, A1 224, Box 1160, NAⅡ).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의소리

포로, 냉전에서 평화를 말하다

한국군과 제주 1육군훈련소 훈련병은 제주도 두 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하고 한라산 ‘토벌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악질’ 혹은 ‘빨갱이’로 지목되어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의 유족들은 두 수용소의 포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지금 도민들은 두 수용소를 어떤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을까.

전후 한국군은 한국전쟁기 포로수용소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악질포로’의 기획된 폭동이나 사건으로 못박고 있다. 이는 그 당시 재교육과 심리전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미군 자료의 경우 ‘반공포로’의 영웅 서사에 첨언하거나 ‘악질포로’의 행위를 증명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사료의 비판적 해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폭력적인 ‘자원송환 원칙’이 인도주의라고 포장되었으며,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의 탈출이 “석방”으로 신화처럼 선전되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아군과 적군이라는 반공주의에서 기초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극단적인 반공주의는 4.3에서 “악질포로”와 “반공포로”의 재생산, 전후 반공 재교육으로 확장되었다. 

이제 군사화와 냉전의 시각에서 벗어난 한국전쟁기 포로 이야기가 제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선 용어를 “악질포로”에서 송환포로, “반공포로”에서 비송환포로로 환원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평화와 인권에 기반한 관점과 철학에서 한국전쟁기 포로와 4.3 이야기가 다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The Political Behavior of Korean and Chinese POW in the Korean Conflict: A Historical Analysis, 19 Security Classified General Correspondence, 1942-1970, Entry A1 452-B, RG 389, NAⅡ
History of PW Camp #3 Cheju-do Korea, 14 Apr.52-12 Jul. 53, Records Relating to Enemy Prisoners of War, 1951 – 1960, Entry A-1 224, Box No. 1659, RG 338, NAⅡ

# 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국현대사를 전공했고, 연구 관심 영역은 근·현대 민간인 학살과 다양한 수용소, 군의 민간인의 통제, 동아시아의 군사기지 및 스파이전,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냉전시기 사상심리전으로 각국에서 조사·수집을 통해 아카이브 및 컨텐츠 생산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논문은 「한국전쟁 포로와 사진: ‘동양공산주의자’ 인종 프레임과 폭력성 재현」(이화연구, 2018)과 「수용소에 갇힌 귀환용사-‘지옥도’ 용초도의 귀환군 집결소와 사상심리전」(역사비평, 2018) 다수 있으며, 저서는 『열전 속 냉전, 냉전 속 열전 : 냉전 아시아의 사상심리전』(진인진, 2017), 『한국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선인, 201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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