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57) 김동현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점령군’이라는 말이 한국 대선에서 논쟁이 될 줄은 몰랐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점령군’ 발언이 보도되자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 언론은 이념 대결을 부추겼다. 최장집, 심지연 교수의 발언을 인용해 여권 대선 주자들의 ‘미군=점령군’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대선 레이스 초반의 이념 논쟁의 빌미가 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발언은 간명했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사실 그 지배체제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느냐”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발언이 보도되었을 때만 해도 이 발언이 정치적 쟁점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90년대 이후 쏟아져 나온 수많은 해방기 연구들의 성과에 의해 ‘미소 분할 점령’은 학계의 상식이 되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야권의 주요 정치인들이 이재명 지사의 발언을 공격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미국이 점령군이라는 말은 일반 국민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미군정 포고문에 점령군이라는 표현이 있다며 사실 왜곡이라고 말하자 조선일보는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의 말을 인용해 “포고문 한 장만 가지고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고문 한 장”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미군정 포고문 2호는 포고를 위반한 경우 점령군 군율회의 결정으로 사형 또는 다른 형벌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포고뿐만 아니다. 미 점령군의 명령, 지시를 어기거나, 미국인 또는 연합국 소속 인사의 소유물과 보안을 해친 자, 공중의 치안과 질서를 교란하거나,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미군정 포고문은 국제법상으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점령된 조선의 입법, 사법, 행정을 관할하는 실정법으로 작용했다. 

미군정 포고 제2호. 사진=국가기록원 소장.

수많은 냉전사 연구의 성과들은 1940년대 이후 국제체제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 체제로 재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과 북의 단독 정부 수립에 미국과 소련이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냉전과 탈냉전의 세계사를 이해하려는 연구 성과들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축적되어 있다. 냉전 연구사는 그 자체만으로 방대한 작업이다. 그런데도 1980년대 한국의 대학가를 휩쓸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를 거론하면서 점령군이라는 발언을 공격하는 것은 한반도 역사 인식이 80년대에 멈춰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멀리 갈 이유도 없다. 제주와 오키나와의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냉전의 세계사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은 점령 그 자체였다. 시야를 넓히면 미국은 1945년 이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동남아시아, 중남미, 카리브해의 국가들의 내정에 개입해왔다. 미국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서라면 친일이라는 과거의 이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1979년과 1980년 미 국무부와 국방부 정보국 사이에 주고받은 정보문건들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 문제의 오래된 기원임을 보여준다.(이 정보문건은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차관,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글라이스틴 대사, 국가안전보장회의 최고 정보관리 도널드 그레그 사이 오갔던 문건들이었다. 암호명 체로키로 불렸던 이 그룹들 사이의 문건들은 남한 군대의 작전권을 미국이 유지하는 것이 한국 민간인들의 생명과 인권보다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장순, <미국의 한반도 개입에 대한 성찰>, 후마니타스, 2016, 29쪽 참조)

제주 4.3 항쟁의 원인 중 하나는 미군정과 친일 경찰의 제주도민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었다. 1947년 3.1 발포사건과 이후 벌어진 3.10 총파업은 4.3이 단지 남로당 제주도당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아니었다.(아직도 4.3만 이야기하면 남로당과 북조선 운운하면서 색깔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1945년 이후 고착화된 분단체제가 여전히 우리의 인식세계를 좌우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제주 4.3의 미국 책임을 묻겠다면서 유엔을 찾아가고, 국제사회에 제주 4.3을 알리는 노력을 하고 있는 이유도 미군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제주도지사가 ‘점령군’ 발언을 공격하는 것은 제주 4.3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거나, 그도 아니면 역사적 상식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꼼수다. 

제주가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유지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듯이 오키나와도 오랫동안 점령의 시간을 보냈다. 1972년 ‘복귀(반환)’ 이전까지 오키나와의 영토를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었던 것은 미국이었다. 지금도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의 80% 이상이 오키나와에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제주와 오키나와는 점령군 미국의 역사를 온 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섬이다. 너무나 뚜렷한 증거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 김동현

문학평론가. 제주에서 태어났다. 제주대학교 국문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국민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 《제주, 화산도를 말하다》(공저), 《재일조선인 자기서사의 문화지리》(공저) 등이 있다. 한때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제주, 오키나와를 중심에 두고 지역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제주 MBC, 제주 CBS 등 지역 방송 프로그램에서 시사평론가로, 제주민예총에서 정책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見證佔領歷史的兩座島嶼——濟州和沖繩

金東賢

我不認為「佔領軍」這個詞會在韓國總統大選中引起爭議。據報導,當京畿道知事李在明(notsure)說「佔領軍」時,包括朝鮮日報在內的極右媒體激起了意識形態對峙。它甚至引用了崔詹正(notsure)教授和沈智英(notsure)教授的話說,執政黨的總統候選人將美軍視為佔領軍的看法存在問題。李在總統競選初期曾引起許多意識形態爭議,他的評論很明確。他說,韓國的政府建立階段與其他國家略有不同,無法安定親日,因此親日勢力可能與美國占領軍合作,維持控制體系。

1990年代以來出現的大量解放時期研究成果,使「美蘇分割佔領」成為學術界的常識。儘管如此,主要的反對派政客還是抨擊了李的言論。濟州省知事元熙龍(notsure)說,普通民眾從未聽說過美國是佔領軍。有人認為這是對事實的歪曲,因為美軍公告中使用了“佔領軍”一詞。《朝鮮日報》援引慶南大學名譽教授沈智英(notsure)的話說:“爭論一個公告文件是沒有意義的。

但是,“一個公告文”的說法是不恰當的。美國軍政府第 2 號公告指出,“違反本公告的行為將被處以死刑或由職業軍事紀律委員會決定的其他處罰。本公告不是唯一的。任何違反命令或指示的人美國占領軍,或擾亂美國或盟國的財產或安全,或擾亂公共安全和秩序,或蓄意從事敵對行動的,將受到懲罰。美國軍政府公告在國際法上具有重要地位,作為管轄被佔領朝鮮的立法、司法和行政上的發揮作用的實在法案。

照片:美國第 2 號軍事公告,韓國國家檔案館
對冷戰歷史的大量研究表明,國際體係從 1940 年代開始重構為以美蘇為中心的冷戰體系,在此過程中,美蘇積極支持建立朝鮮和韓國各自獨立的政府。這是顯而易見的。有無數研究試圖了解冷戰和冷戰後的世界歷史。研究冷戰研究本身就是一項艱鉅的任務。然而,在談到在 1980 年代在韓國大學城引起轟動的《承認戰後解放史》時抨擊「佔領軍」言論,自相矛盾的是,對朝鮮半島歷史的承認在 1980 年代停止了。

我們不需要走多遠。僅從濟州和沖繩的案例來看,僅從濟州島和沖繩島的案例來看,冷戰世界歷史上的美國外交政策就是佔領本身。從更廣泛的角度來看,美國自1945年以來就為了自身利益介入東南亞、拉美和加勒比國家的內政。過去的親日史對於維持美國霸權並不重要。美國國務院與國防部情報部在1979年和1980年交換的情報文件顯示,美國的這一政策是朝鮮半島問題的“老淵源”(情報文件為卡特)。前總統、國務卿萬斯、助理國務卿克里斯托弗、助理國務卿霍爾布魯克、格里斯廷大使和國家安全委員會首席信息官唐納德格雷格賽。韓國軍隊比韓國平民的生命和人權(Jung Seung,對美國干預朝鮮半島的思考,Humanitas)。2016 年見第 29 頁)

造成濟州4.3抗爭的原因之一是美軍政府和親日警察對濟州人民的嚴厲鎮壓; 1947 年的 3.1 槍擊事件和隨後的 3.10 總罷工中, 4.3 不僅僅是濟州南勞黨之間的意識形態鬥爭。 (現在還有人在談4.3時提出南勞黨和北朝鮮的顏色編碼論,證明1945年以來根深蒂固的分裂體制仍然影響著我們的認知世界。

美國軍政府也是濟州島努力通過訪問聯合國向國際社會通報濟州島4.3事件的原因,要求美國對濟州島4.3負責。濟州知事抨擊「佔領軍」的言論,要嘛是對濟州4.3缺乏了解,要嘛是將歷史常識政治化的策略伎倆。

正如濟州島成為美國在東亞霸權的替罪羊一樣,沖繩在1972年“回歸”之前被美國占領了很長時間,這也是為什麼駐日美軍70%以上的軍事基地仍在沖繩的原因。濟州島和沖繩島是見證美國占領軍歷史的島嶼。那些對如此清晰的證據視而不見的人是誰?


Two islands testify the history under occupation- Jeju and Okinawa
Kim Dong-hyun

The term "occupying forces" was not expected to be a contentious issue in South Korea's presidential election. When Lee Jae-myung, governor of Gyeonggi Province, was reported to have said "occupying forces", the far-right media, including the Chosun Ilbo, stirred up a confrontation of ideology. It even quoted Professor Choi Jan-jeong and Shim Ji-young to point out the problem with the ruling party's presidential candidates' perception of the US military as an occupying force. Lee, who was the source of much ideological controversy in the early stages of the presidential race, was clear in his comments. He said that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 was a little different from that of other countries, and that the pro-Japanese forces had not been able to liquidate the country, and that they had joined forces with the US occupation forces to maintain the ruling regime intact.

The results of numerous studies of the liberation period that have emerged since the 1990s have made the "divided occupation of the US and the USSR" common knowledge in academic circles. Despite this, leading opposition politicians have attacked Lee's comments. The governor of Jeju Province, Won Hee-ryong, said that the general public had never heard of the US as an occupying force. It was argued that this was a distortion of the facts because the word "occupying forces" is used in the US military proclamation. The Chosun Ilbo quoted Shim Ji-young, a professor emeritus at Kyungnam University, as saying, "It is meaningless to argue about a single document.

However, the saying "a single proclamation" is not appropriate. U.S. Military Government Proclamation No. 2 states that "Violations of this proclamation shall be punishable by death or other penalties as determined by the Military Disciplinary Board of the Occupation. This proclamation is not the only one. Anyone who violates the orders or instructions of the American occupying forces, or who disturbs the property or security of the American or Allied Powers, or who disturbs public safety and order, or who willfully engages in hostilities, is subject to punishment. The U.S. Military Government Proclamation had considerable status under international law and functioned as the substantive law governing legislation, judiciary and administration in occupied Korea. judiciary

Photo: U.S. Military Proclamation No. 2, National Archives of Korea

Numerous studies on the history of the Cold War have revealed the fact that the international system was restructured into a Cold War regime centered on the US and the USSR from the 1940s onwards, and that the US and the Soviet Union actively supported the establishment of independent governments in North and South Korea in this process. There are countless studies that attempt to understand the world history of the Cold War and post-Cold War. Studying the Cold War studies is an enormous task in itself. Nevertheless, attacking the "occupying forces" remark while addressing the <perception of post-liberation history> that caused a stir in Korean university towns in the 1980s paradoxically shows that the historical perception on the Korean peninsula stopped in the 1980s.

We need not go far. Even if we look only at the cases of Jeju and Okinawa, the US foreign policy in the Cold War history has been “occupation”. From a broader perspective, since 1945 the US has intervened in the internal affairs of countries in Southeast Asia, 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 to serve its own interests.

Intelligence documents exchanged between the U.S. State Department and the Defense Intelligence Agency in 1979 and 1980 show that this U.S. policy is the "old origin" of the Korean Peninsula problem. (The intelligence documents were passed back and forth between former President Carter, Secretary of State Vance, Under Secretary of State Christopher,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Holbrooke, Ambassador Greystein, and National Security Council Chief Information Officer Donald Gregg Say. The documents between these groups, code-named "Cherokee", show that the US's maintenance of operational authority over Korean forces was more important than the lives and rights of Korean civilians (see Chung Sun, Reflections on US Intervention on the Korean Peninsula, Humanitas 2016, p. 29).

One of the causes of the Jeju 4.3 struggle was the harsh repression of the Jeju people by the US military government and the pro-Japanese police; the 3.1 shooting incident in 1947 and the 3.10 general strike that followed meant that 4.3 was not just an ideological struggle between the South Korea Labor Party in Jeju. (The fact that there are still people who raise the colour theory of the South Labor Party and North Korea when talking about 4.3 proves that the divisional system that has become entrenched since 1945 still influences our perception of the world.

The fact that there are still people who, when discussing 4.3, raise the issue of color-coding, referring to the South Labor Party and North Korea, proves that the divisional system that has become entrenched since 1945 still influences our perception of the world.

The U.S. military regime was also the reason why Jeju is making efforts to inform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bout Jeju 4.3 by visiting the United Nations to hold the U.S. responsible for Jeju 4.3. For the governor of Jeju to attack the "occupying forces" comment is either a lack of understanding of Jeju 4.3 or a ploy to politicize even historical common sense.

Just as Jeju became the scapegoat for US hegemony in East Asia, Okinawa spent a long time occupied by the US, which was the real occupier of the territory before its "reversion" in 1972. This is why more than 70% of all US military bases in Japan are still in Okinawa. Jeju and Okinawa are islands that bear full testimony to the history of the US occupation forces. Who are the people who turn a blind eye to evidence so clear?


占領の歴史を証言する二つの島 ―済州と沖縄
キム·ドンヒョン

「占領軍」という言葉が韓国の大統領選挙での論争になるとは思わなかった。イ・ジェミョン京畿道知事の「占領軍」発言が報道されると、朝鮮日報をはじめとする極右メディアは理念対決をあおった。チェ・ジャンジプ、シム・ジヨン教授の発言を引用して、与党大統領選候補の「アメリカ軍=占領軍」認識の問題点を指摘したりもした。大統領選レース序盤で理念論争の種となったイ京畿道知事の発言は明快だった。韓国の政府樹立段階が他国とは少し異なり、親日清算ができなかったために、親日勢力がアメリカ占領軍と合作して支配体制をそのまま維持したのではないかと。

90年代以降あふれ出た数多くの解放期の研究の成果によって「米ソ分割占領」は学界の常識となった。こういう事情にもかかわらず、野党の主要政治家はイ知事の発言を攻撃した。ウォン・ヒリョン済州道知事も「米国が占領軍であるとは一般国民は初めて聞く話だ」と述べた。それに対しては、米軍政布告に「占領軍」という表現があるのだから事実の歪曲だと批判があったが、朝鮮日報はシム・ジヨン慶南大名誉教授の言葉を引用し、「布告文一枚でそんな論議をしても無意味だ」と報道した。

だが、「布告文一枚」という表現は適切ではない。米軍政布告2号は「布告に違反した場合、占領軍軍律会の決定により死刑または他の刑罰に処する」と定める。この布告だけではない。 アメリカ占領軍の命令や指示を破ったり、アメリカまたは連合国に所属する者の所有物と保安を害した者、公衆の治安と秩序をかく乱したり、故意に敵対行為をする者、いずれも処罰の対象となった。米軍政布告は国際法上も相当の地位を持ち、占領された朝鮮の立法、司法、行政を管轄する実定法として機能した。 
写真=米軍軍政布告第2号、国家記録院所蔵

数多くの冷戦史研究の成果は、1940年代以降、国際体制が米ソを中心とする冷戦体制に再編され、この過程で南北朝鮮それぞれの単独政府樹立に米ソが積極的な支援をした事実を明らかにしている。冷戦とポスト冷戦の世界史を理解しようとする研究は、枚挙にいとまがないほど蓄積がある。冷戦研究史はそれだけで膨大な作業だ。それでもなお1980年代に韓国の大学街を騒がせた<解放戦後史の認識>を取り上げつつも「占領軍」発言を攻撃することは、韓半島の歴史認識が80年代で止まっていることを逆説的に物語っている。

遠くへ行くまでもない。済州と沖縄の事例だけを見ても、冷戦の世界史におけるアメリカの対外政策は占領そのものだった。視野を広げれば、アメリカは1945年以降、自国の利益のために東南アジア、中南米、カリブ海の国々の内政に介入してきた。アメリカのヘゲモニー維持のためなら、親日という過去の履歴は重要ではなかった。1979年と1980年にアメリカ国務省と国防総省情報局の間でやり取りされた情報文書は、このアメリカの政策が韓半島問題の「古い起源」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同情報文書は、カーター元大統領、ヴァンス国務長官、クリストファー国務次官、ホルブルック国務次官補、グライスティン大使、国家安全保障会議最高情報管理ドナルド·グレッグ·サイ行き交った文書だった。暗号名「チェロキー」と呼ばれたこれらのグループ間の文書は、韓国軍の作戦権をアメリカが維持することが、韓国民間人の生命と人権より重要であ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 (チョン・スン『アメリカの朝鮮半島介入に対する省察』、フマニタス 2016 29頁参照)

済州4.3抗争の原因の一つは、米軍政と親日警察の済州道民に対する過酷な弾圧だった。1947年の3.1発砲事件とその後に起こった3.10ゼネストは、4.3が単に南労党済州道党によるイデオロギー的闘争ではなかった。(4.3を語るにまだ南労党と北朝鮮を云々する色分け論を提起する人々がいるのは、1945年以後固着化した分断体制が依然として我々の認識世界を左右していることを傍証する。)

済州4.3に対するアメリカの責任を問うべく国連を訪れ、国際社会に済州4.3を知らせる努力をしている理由も、米軍政があったからだ。それを知らないはずがない済州道知事が「占領軍」発言を攻撃するのは、済州4.3への理解が不足しているか、さもなければ歴史的常識さえ政治的に利用しようとする策略だ。 

済州がアメリカの東アジア覇権を維持するためのスケープゴートになったように、沖縄も長い間、占領の時間を過ごした。1972年の「返還」前まで沖縄領土を実質的に占領していたのはアメリカだった。日本に駐屯する米軍基地の70%以上が今も沖縄にある理由もこのためだ。済州と沖縄は占領軍アメリカの歴史を全身で証言する島だ。あまりにも明確な証拠に背を向ける人々とは果たして誰な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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