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서른아홉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제주시 서남쪽 해안지경 어승생악(御乘生嶽, 1169m). 임금님의 말을 길렀고 일제강점기 시 일본군의 GP벙커 두 개와 세 개의 동굴 진지가 있다. 산 정상은 제주시와 서부, 북동부 조망이 잘된다. 1945년 5월 초순 오후 2시 경 일본 전투기 4대와 미국전투기 두 대 사이에 제주시 주정공장 하늘 위에서 공중전이 벌어져 미국전투기 한대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바다로 추락하는 것을 관측했던 곳. 저의 선친께서는 이곳에 강제 징용돼 진지 굴을 팠다. 1966년 6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어승생 수원지 ‘한 밝’을 스케치했다. 99곡과 Y계곡 물이 자연유하식도수로(7.6Km)를 통해 약10만 톤 물이 저수된다.

「아흔 아홉 골」.크고 작은 골짜기가 마치 밭고랑처럼 뻗어 내린 기봉. 백에서 한 골이 모자란 「아흔 아홉 골」, 그래서인가,  제주에는 호랑이도 없고 왕(王)과 큰 인물도 안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그 진실은 무엇인가?

Negative적인 전설, 그 배경에는 제주의 태생적인 삼다도의 고단한 삶을 나타낸 말, [어승생 99골의 비밀 99+1=100, 골 하나는 ‘어디에’]를 푼 사람이 백의천사 백영심, 아프리카 중동부의 말라위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간호사로, 제2회 이태석상 수상자이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여고, 제주 한라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 의대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1990년 28세에 아프리카 케냐로 가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백영심 간호사가 말라위 어린이와 웃고 있는 모습. 사진=중외학술복지재단.

말라위 치무왈라로 간 백 씨는 유치원 등을 비롯한 교육기관과 진료소를 세웠으며 2008년에는 한 기업인의 기부를 받아 릴롱궤에 대양누가병원을 설립했다. 2010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으면서도 대양간호대학을 개교하는 등 진료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2012년 11월 27일에는 이태석상(아프리카 수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이태석(李泰錫, 1962~2010) 신부를 기리기 위해 외교부가 2011년 제정한 상) 제1회 수상자인 이재훈 의사에 이어 제2회 이태석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20년 8월 31일 음지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참 의료인을 찾아 수여하는 ‘제8회 성천상 시상식’이 개최됐다. 이번 성천상은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30년째 의료봉사를 실천하고 있는 백영심 간호사가 선정됐다. 8회성천상 수상자에 간호사가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 올해가 세계보건기구가 지정한 ‘세계 간호사의 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시상식 참석자 모두에게 감동을 선사한 시상식 현장을 취재한 글을 소개한다. 남정미 기자리포트다.

1990년 9월, 김포국제공항 출국장. 당시 28세이던 백영심 간호사가 아프리카 케냐로 의료 선교를 떠나던 날이었다. 돌아올 날은 정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항 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백 간호사는 2남 4녀 중 셋째 딸. 제주 조천읍 함덕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제주에서 마쳤다. 자식을 육지로 내놓는 일만 해도 조마조마했는데, 그 귀한 셋째 딸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프리카로 간다니···. 백 간호사를 아프리카로 파송했던 한국 교회조차도 그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처음엔 정식 선교사 월급 대신, 교회 청년들이 모아준 300달러(약 36만원)와 병원 퇴직금을 가지고 떠났다. 하지만 백 간호사는 아프리카에서 30년을 ‘시스터 백’으로 살았다. 시스터 백은 현지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그는 케냐에서 4년, 나머지 세월은 아프리카 중에서도 최빈국이라는 말라위에서 보냈다. 자기 월급을 쪼개고 아껴 말라위에 유치원·초등학교·진료소를 지었고, 200병상 규모의 최신식 종합병원인 대양누가병원과 간호대학, 정보통신대학 설립도 주도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백 간호사는 2012년 이태석상, 2013년 나이팅게일 기장, 2015년 호암상, 지난 8월 성천상을 받았다. 국내외에서 굵직한 사회봉사·의료인상을 두루 받았지만, 언론 인터뷰는 손에 꼽을 정도. 지난달 17일, 성천상 수상을 위해 서울에 온 백 간호사를 만났을 때도, 첫 인사는 ‘저는 인터뷰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였다. 지난 달 18일 성천상을 받은 백영심 간호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이날 입은 원피스는 후배가 시상식 날 입으라고 선물해 준 것이다. 하루 전 인터뷰에서 백 간호사는 국제 구호품 시장에서 1달러 주고 샀다는 남방과 면바지를 입고 왔다. 그는 “옷과 가방이 크게 필요 없다”며 “나에게 필요한 건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다”고 했다. 벽에 걸린 장식용 천은 말라위 특산품으로, 백 간호사가 현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각자 주어진 길을 가는 것처럼 저도 제 길을 가는 것뿐이지, 언론에 나올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어쩌다 보니 제 일이 조금 알려져서 (인터뷰를) 하지만(웃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을 ‘내가 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선교사로 조용히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주변에 개인 정보도 잘 드러내지 않았어요.”–이태석상도 1회 때 수상을 권유받았지만, 사양해서 2회때 받으셨다고요? “2회 때는 저희 간호대학이 막 문을 열었어요. 구급차도 필요하고 간호대학 버스도 필요한데, 가만 보니 상금이랑 필요한 금액이 맞아 떨어져서 받겠다고 했어요(웃음).”

백 간호사는 호암상 상금 3억원은 현지에 도서관을 짓는 데 썼다. 성천상 상금 1억은 “현지 중·고등학교를 짓는 데 쓸 예정”이라고 했다.–어릴 때부터 꿈이 간호사였나요? “큰언니 권유로 간호대학에 입학했지만, 방황을 많이 했어요. ‘나는 왜 사는가’ ‘뭐 때문에 간호 공부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여수에 있는 애양원(한국 최초의 나병원)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제가 많이 깨졌어요.”–깨졌다니, 무슨 뜻인가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손과 발이 문드러지고 얼굴이 일그러졌는데도, 감사하고 기쁘고 평안해요.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요.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사는 이유는 사랑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간호라는 걸 알았습니다. 간호를 공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내가 쓰임받았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어요.”–그래서 아프리카로 간 건가요? “졸업 후 대학 병원에서 6년 간 일했는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나더군요. 급여나 생활 안정성 면에서 안주해버릴 것 같아서요. 그 무렵 서울의 한 교회를 통해, 아프리카 케냐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제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어요.”–가족들 반대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가족들은 가지 않기를 바랐죠. 그때 선도 많이 들어왔거든요(웃음). 결혼해서 평범하게 아기 낳고 살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할 것 같았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도 대학 때부터 워낙 제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걸 아셨기에, 결국엔 지지해주셨어요.”–대학 병원 간호사로, 혹은 한국에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요. “아프리카에 가야만 봉사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를 더 요구하는 곳에서, 더 열악하고 힘든 곳에서 도움이 됐으면 했어요. 그게 아프리카였고요. 한국 대학 병원은 제가 없어도 일할 사람이 많잖아요.”

하늘이 내린 백의천사, 큰 뜻 이룬 백영심, 어승생 아흔 아홉골의 ‘더하기 하나’는 바로 ‘나(我)’라는 것을. 명주실 백통이 필요한 설문대 할망의 속옷, 한통이 모자라 아흔 아홉 통, 육지로 다리를 못놓았다는 전설과 어승생 아흔아홉 골의 비밀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인 내가 큰 뜻을 품고 100% 하느님이 감동할 때 까지 최선을 다할 때’ 새 역사를 쓴다. 

백영심 간호사의 Positive 진취력으로 ‘노벨상을 거머쥘 날’을 기대한다. 백영심은 “어떻게 이런 큰 생각을 한 것인가?”

본 글을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신 전 제주여고 문후경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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