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77) 소라게 / 허경심

외돌개에서 바라보는 범섬. ⓒ김연미

그래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나
내 엄지발가락이 검지보다 짧아서
유년의 파도 소리는 안으로만 숨었다

혼자서 노는 하루 수평선이 길었다
썰물 녘 조약돌을 잡았다 놓았다가
엄지와 검지 사이로 어루만지던 시간

갯무꽃 흐드러진 서귀포 범섬 바다
둥글게 등 굴리고 물속을 드나들던
소라게 오늘도 다시 제 껍질을 벗는다

-허경심, <소라게> 전문-

왜 하필 신은 내 발가락 길이에 아버지의 수명을 예언해 놓고 있었던 걸까. 엄지가 길면 아버지가 오래 살고, 검지가 길면 어머니가 오래 산다는 이야기를 하며 발가락 길이 변화에 유독 관심을 기울이던 시기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얘기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발가락 길이를 확인해 보던 아이들의 얼굴은 심각했다. 어느 발가락 길이를 응원해야 하는지 골몰하다 보면 괜한 슬픔이 몰려왔다. 아직은 부모의 품이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들.

‘그래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나’...내 발가락에 선명히 증언하는 엄지보다 긴 검지의 슬픔, 아버지의 부재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어서 아이는 자꾸 ‘안으로만 숨었다.’ ‘혼자서 노는 하루’의 ‘수평선이 길었다.’ 슬픔과 외로움만 남은 세상의 반쪽에서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은 듯, 조약돌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벗하며 오래도록 바닷가에 혼자 앉아 있었다.

슬픔도 시간이라는 물살에 씻기다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시 찾은 유년의 바다는 ‘갯무꽃 흐드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슬픔과 외로움만 남았던 반쪽의 세상에 아버지의 부재로 잃어버렸던 나머지 반쪽 세상을 아이는 드디어 찾아 냈던 것일까. 그 나머지 반쪽을 찾아내 스스로 온전한 하나의 세상으로 돌아온 아이. 그 아이가 오늘은 범섬을 앞에 두고 ‘제 껍질을 벗’고 있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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