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 (28) 구좌읍 하도리 ‘언제라도 북스’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 고봉선 시인이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시인을 통해 듣습니다. [편집자 글] 

오후 2시의 만남을 향하여 동쪽으로 달린다. 덥다. 그래도 눈은 즐겁다. 어느 장인이 틀어 놓은 목화솜처럼 뽀송뽀송한 구름이 하늘 가득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책방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시골의 정서가 가득 담긴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마당에 들어서자 칠변화 향기가 콧구멍을 톡 때렸다.

우리 앞엔 다양한 길이 있다. 그 많고 많은 길 중에는 원해도 갈 수 없는 길이 있고, 원하지 않아도 가야 하는 길이 있다. 처음엔 안전하고 편한 길이라 여겼는데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다. 앞이 탁 막힌 것 같았는데 오히려 탄탄대로의 길일 수도 있다. 길에도 얼굴이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길이 어떤 얼굴로 내게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미지의 길을 걷는 두 여자가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 연출자이면서 책방에서는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하명미 씨와 라디오 진행을 하다가 그림책을 그리면서 인쇄 및 디자인 관련을 담당하는 양영희 씨 두 사람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입구에 서면 북스테이 간판과 책방 간판이 소꿉장난하듯 담벼락에 기대선 채로 반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여행에서 고향을 찾다”
하명미 씨 전공은 연출이다. 그런데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데뷔하면서 오랫동안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써왔다. 그리고 이미 20대 중반이던 2001년에 제주에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첫 단편영화를 찍었다. 기획 영화의 시나리오를 계속 쓰다 보니 지쳤다. 남이 기획한 시나리오만 쓰다가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닐까. 주객이 전도되는 것만 같았다. 연출로 데뷔할 기회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글을 쓰고 싶었다. 묶여 있는 글이 싫었다. 회의감과 함께 내적 갈등은 깊어만 갔다. 

답답하고 지칠 땐 여행을 떠나는 게 최고다. 그렇다. 2011년,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두 작가는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때 여행지가 바로 제주도 올레길이다. 태양이 정수리를 쏘아대는 한여름인데도 제주는 애초의 고향이었던 것처럼 편안했다. 자연도 자연이지만 이미 정착한 이주민들의 모습이 한없이 좋았다. 두 작가는 보름 정도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에서 살기로 의기투합했다. 떠나면서 당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집이 나오면 알려달라고 했다. 

어느 날, 하도리에 8개월 머물 수 있는 집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두 작가에겐 여행할 때조차 와 본 적이 없는 전혀 낯선 곳이다. 그래도 제주에서 글을 좀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덥석 계약했다. 2013년이었다. 인연이었을까, 그렇게 8개월로 시작한 게 어느새 9년째가 되었다. 두 작가는 서로 의지하면서 지금 책방과 북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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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으로 가는 골목에 칠변화가 한창이다. “잠시라도” 북스테이 간판이 보인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애칭”
“언제라도 책방”은 영화 일과 함께 너무 좋아서 하는 일이다. 독립출판물 중 스몰진(작은 잡지)이라는 장르가 있다. 2014년, 언제라도 북스에서 열여섯 명이 스몰진을 수업하고 16권의 스몰진을 만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청소년들과 함께 만든 것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30권 넘게 출판했다.

두 작가는 서로 애칭을 부른다. 이들이 제주에 왔을 때, 이주민들끼리는 대부분 애칭을 부르고 있었다. 하도리에도 라봉, 무지개, 물고기 등으로 불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언니나 오빠라는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보다 조금은 느슨한 거리에서 서로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하명미 씨와 양영희 씨도 애칭을 만들게 되었다.

양영희 씨는 어린 작가님으로 불린다. 양영희 씨가 육지에서 활동하던 NGO에서는 애칭 문화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애칭이 낯설지 않다는 뜻이다. 양영희 씨는 ‘어린이’처럼 항상 맑고 순수하고 싶다고 해서 어린이란 애칭을 쓰게 되었다. 

하명미 씨는 루트 작가로 불린다. 오가와 요코의 장편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등장하는 루트 기호를 딴 이름이다. 노수학자 ‘박사’와 ‘나’, 그리고 ‘나’의 아들 ‘루트’는 찬란한 순간들을 숫자로 소통한다. ‘나’의 아들을 ‘루트’라 한 이유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학 기호 루트는 지붕 아래 모든 수를 품고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하명미 씨를 확 끌어당겼다. 특별히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어도 루트라는 애칭을 쓰게 된 이유다. 하명미 씨는 책방도 수학 기호 루트처럼 운영하고 있다.

두 작가 모두 고향은 서울이다. 그런데 이미지나 억양은 충분히 제주에 젖어 있었다. 제주에 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말한다. 그래도 벗어날 수 없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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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텃밭을 낀 책방 마당은 한낮의 고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출판사로 시작하다”
처음엔 책방이 아니라 출판사로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하면서 본인들이 만드는 책을 위주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차츰 작은 독립출판물들도 자유롭게 만들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오면 책도 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한두 권씩 책을 갖다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기 책을 소개해달라며 작은 독립출판물 작가들이 찾아왔다.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책방이 되었다. 2017년이었다.

이제 책방 하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도 쌓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울, 부산, 순천, 제주 등 책 축제도 많이 다녔다. 탑동에서 도서 대전이 열릴 땐 독립서점들만 모아놓는 섹션으로 나갔다. 해외 출판 대만 아트북페어에도 ‘제주에서 온 독립책방’으로 2회 정도 참여했다. 그렇게 대만에 있는 작가들과도 네트워크를 쌓고, 이쪽에서도 대만 작가들의 책을 소개했다.

대부분의 책방에서 취급하는 책들과 달리 두 작가가 소개하는 독립출판물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좀 더 자유롭게 직접 출판한 셀프 퍼블리싱 즉 독립출판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희소성도 있지만, 때로는 기존 출판사에서 내놓지 않는 판형으로 만드는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 두 작가는 새로운 판형의 책들과 아트북, 또 누군가의 생각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해서 자유롭게 나오는 책들, 자기 목소리를 날것의 느낌으로 내는 그런 글들을 좋아한다. 

두 작가는 독립출판물 작가가 찾아왔을 때 초판본은 다섯 권 받는다. 그렇다고 받을지 말지 선정한다는 건 아니다. 별 무리가 없는 한, 그리고 자리가 허락하는 한 다 받아준다. 그 다섯 권이 끝나면 다시 새로운 작가들의 책을 소개한다. 출판사에서 독립출판물을 개정 증보판 즉 재판하는 경우엔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소개하기도 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언제라도 북스는 예약제로 운영하며 당일 예약은 오후 3시 이전, 3시 이후 4~6시 사이에 예약이 없으면 조기 마감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영화가 좋아”
루트 작가는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글쓰기도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극본을 쓰고 자신의 글을 연극으로 만들기도 했다. 고등학교 땐 연극을 연출했으며 대학교 때도 계속 영화 현장에 있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지금도 연출을 준비하면서 영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루트 작가가 만드는 영화의 주제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존 터브를 과감히 깨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는 이런 영화를 제작하고 대본을 쓰며 연출하는 데 관심이 많다. “빛나는 순간”처럼 잔잔한 멜로드라마로 만들 때도 있고, 판타지, 호로, 코미디로 만들 때도 있다. “위험한 상견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등은 주로 코미디를 다룬 시나리오다. 

김수미, 송새벽, 이시영이 나오는 “위험한 상견례”는 루트 작가가 쓴 시나리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2011년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작품으로 지금도 추석 때면 티브이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지역 간의 화합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남녀가 결혼하려고 한다. 그러나 양측의 아버지는 극구 반대한다. “위험한 상견례”는 이를 시작으로 상견례를 통해 코미디가 벌어진다. 웃기다. 진짜 웃기다. 이 외에도 미국에 있는 호러 영화 사이트 채널 ALTER에서 계속 상영 중인 호러 코미디 영화 <도르래>도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독립서점 언제라도 북스는 사전예약제로 운영된다. 오직 1팀만 예약하여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는 책방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의 모습을 갖추다”
원래 그림책을 그리는 게 꿈이었던 어린 작가 양영희 씨는 루트 작가와 서울에서 라디오 작업을 오랫동안 같이하고 있었다. 함께 서울 마포FM에서 인디음악 방송을 진행했고, 이곳에서는 제주 CBS에서 2년 동안 이주민들의 삶을 소개하는 코너를 담당했다.

책방의 규모는 작았다. 크게 할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작을까? 의아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원래 작업실이었다.

책방 바로 이웃에는 현재 공사 중인 집이 있다. 두 작가는 지난 3년 동안(2018~2020년) 이 집에서 책방을 운영했고, 지금 책방은 당시 전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두 작가는 로컬 이주민 작가들의 귀여운 일러스트 작품들 위주로 11개 기획 전시를 했고, 첫 개인전을 여는 사람들의 전시도 했다. 지금은 전시 공간과 합쳐서 책방을 열었다. 예전엔 책방이 좀 컸었다는 말이다. 

하고 싶은 일, 다시 말해 즐거워서 하는 일을 하자며 두 작가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내려왔다. 그리고 이곳에 작업실을 꾸민 다음 어린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루트 작가는 시나리오를 썼다.

작업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았다. 찾아온 사람들은 두 작가가 만든 책을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다가 가곤 했다. 책을 만들면서 두 작가는 제주어 배우기, 캘리그라피, 한국화 그리기 등 배우고 싶은 건 모두 워크숍으로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책 있나요? 저런 책 있나요?”라며 필요한 책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두 작가는 작가를 선정하고 책을 단 몇 권이라도 소개하기로 했다. 그렇게 작가를 컨택하고 책을 갖다 놓았다. 서서히 책방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비록 작지만, 책방이라는 이름도 내걸게 되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언제라도 북스에서는 도서, 굿즈 미발생 시 인원당 책방 굿즈 최소 1개 이상 사주는 조건이 있다. (예, 책방 연필 1개 1,000원 - 1인 1,000원)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1인 출판과 독립출판물의 차이”
루트 작가는 일일출판과 독립출판을 같은 맥락으로 본다. 다만 셀프 퍼블리싱하는 사람들은 원고 집필부터 편집, 인쇄, 홍보 마케팅, 유통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맡아 하면서 자신의 책을 출판한다. 

일인 대표가 작가를 섭외하고 자신의 기획력으로 만드는 책들은 또 다르다. 소규모 독립출판사에서 대표가 지닌 기획력 같은 것으로 책들이 출간되는 것이다. 컨셉에 맞게 편집이나 피드백 과정들이 오가면서 완성도 있는 책들이 나온다. 출판 후 유통과정에선 대형 유통사를 끼기도 한다. 언제라도 북스 역시 그런 책들이 조금씩 섞여 있다. 하지만 중점적으로 활용하거나 소개하는 책들은 다른 책방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책들이다. 그야말로 이제 막 나온 인큐베이팅 된 그런 책들이다. 

혼자 냈다고 해서 완성도가 없는 건 아니다. 혼자 냈어도 어떤 책들은 독창적이며 개성 있는 데다가 완성도 높은 책도 많다. 그러나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다. 책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이에 맞춰 두 작가는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언제라도 북스는 독립출판물 초판서점으로 코로나 시대에 단독으로 책방을 이용할 수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고향은 제주였다”
책방 대부분이 그렇지만 언제라도 북스 역시 돈벌이 수단은 전혀 아니다. 루트 작가는 오히려 책방에 돈을 쏟아부을 때가 더 많다. 영화 일을 해야 할 때는 책방지기 알바를 고용하고, 또 그에게 인건비를 줘야 한다. 그래서 요즘은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 예약되면 어린 작가님이 책방을 열어 주면서 북스테이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언제라도 북스와 함께 운영하는 북스테이는 “잠시라도”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잠시라도 평온하자, 웃자, 쉬자, 하늘을 보자’ 등 긍정의 의미가 담긴 이 말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했다. 그래서 루트 작가가 지은 이름이다.

2015년 한 해 동안 루트 작가는 영화 연출로 수도 없이 서울을 드나들었다. 서울을 드나들다 보니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제주였다. 불현듯 ‘언제라도 머물 수 있는 곳’이 제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 언제라도 쉴 수 있는 곳,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등등 뒤에 따르는 내용이 루트 작가를 편안하게 했다. 그렇게 책방은 ‘언제라도’라고 이름하였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영화 “빛나는 순간”의 한 장면.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빛나는 순간”
루트 작가는 서울에 “웬어버스튜디오”란 영화사도 두고 있다. 주 업무가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울과 제주를 오갈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제주살이 9년 차에 루트 작가 하명미 씨는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고두심과 지현우가 출연하는 로맨스 영화 “빛나는 순간”이 루트 작가 하명미 씨가 직접 프로듀싱한 작품이다. 책으로도 출판된 “빛나는 순간”은 극장 개봉을 마친 상태이며 지금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 한림 작은 영화관에서는 장기 상영 중이다. 

영화 “빛나는 순간”의 주제는 상사화다. 상사화 앞에 앉은 두 사람, 진옥(고두심)이 상사화의 전설을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해녀 진옥을 이길 사람은 없다. 숨 오래 참기는 물론 물질도 성질도 단연 1등이다. 그런 진옥을 상대로 PD 경훈(지현우)이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왔다. 그러나 진옥은 냉담하다. 오히려 멍텅구리라고 쏘아붙인다. 그래도 진옥의 마음을 열기 위한 경훈의 꾸준한 노력 앞에서 결국 마음을 열게 된다. 

고무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해녀이면서도 바다가 아닌 숲을 촬영 장소로 택한 진옥이 잔인했던 그 날의 그 봄을 떠올리며 쏟아내는 사투리 연기는 숨이 콱 막혀왔다.

[산속에 숨엉 이서신디 나가 울엇잰. 젖먹이 어린애가 당연헌 거 아니라? 우는 거 당연헌 거주. 경헌디 우리 어머니 아부지… 나가 우는 바람에… 총에 맞아 부런. 이레 팡! 저레 팡! 막 총소리는 막… 왓다 갓다 허곡 사람들은 막… 총에 맞앙 뒈싸졋닥 갈라졋닥 막 허는디 이 노릇을 어떵허민 조코… 우리 어머니 가심에 총을 맞안… 막 뜨거운 피가 막 괄락괄락 나와 가난 안았던 애기는 밑으로 땅으로 떨어지멍 얼굴에 막… 그 뜨거운 피가 막 괄락괄락 쏟아지난… 그 동네 삼촌들이 날 안앙에 날 어떵 살려 보코 허멍 막 이레 착 저레 착 막 허는디… ]

영화 '빛나는 순간' 中 

뭍에서 오래 살다 보면 대부분 그 지역의 억양에 젖어 든다. 그런데 고두심은 아니었다. 한시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아픈 감정을 애절하게 담아서 괄락괄락 쏟아내는 연기는 가히 일품이었다. 괄락괄락, 이 흉내 내는 표현을 어느 낱말이 따를 수 있을까. ‘제주 사투리가 이렇게 멋있는 말이었구나.’를 제대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눈물조차 괄락괄락 쏟아지는 장면이었다.

영화는 아름다웠다. 그만큼 또 아팠다. 영화가 아닌 실재였어도 그랬을까. 언젠가 진짜사랑 리턴즈3에서 30살 연상 남편과 결혼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에선 여자가 어렸지만, 빛나는 순간에선 남자가 어리다. 아직도 유교 사상이 진득하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 더군다나 제주도에서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쨌든 하명미씨는 이처럼 과감하게 고정관념을 깨는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어린 작가 양영희 씨의 첫 작품 “텃밭이 좋아”는 손바닥만 한 크기에 표지 포함 12쪽 분량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어린 작가”
사회복지과를 나온 어린 작가는 언제나 문화예술 쪽에 관심이 많았다. 당연히 사회복지랑 문화예술을 접목하는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 시각장애 아이들의 미술품 전시나 기획 활동을 하기도 했고,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할 때도 문화를 기획하여 공연하는 등 사회적인 이슈를 알리는 활동도 했다. 그러던 그가 제주에 와서 지내며 달라졌다. 창작 공간을 만들고 수업도 하다 보니 작가라는 어릴 적 꿈이 피라미드에서 부활하는 미라처럼 스르륵 일어섰다. 

미치도록 책을 좋아하는 어린 작가에게 글감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길고양이들도 찾아오고, 텃밭의 생명들도 날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와 어린 작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일상의 기록이 쌓이면서 어린 작가는 고양이나 텃밭 이야기로 그림책과 사진, 글을 모으는 작은 독립출판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린 작가에겐 말 그대로 그냥, 그냥 좋아하는 것들 안에서 삶의 질을 더 높이고 마음도 따뜻해지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날마다 자란다. 도시에서는 늘 사회문제를 쫓아다녔고 또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러다 지친 마음을 달랠 겸 온 제주란 환경 속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 좋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배운다. 제주의 환경이 크나큰 위안을 안겨 주었다. 어린 작가가 제주에서 바뀐 모습이다. 

어린 작가가 만든 첫 번째 책은 “텃밭이 좋아”라는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책이다. 어린 작가는 제주에 와 처음 텃밭을 가꾸면서 생명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이웃 할머니나 부모님들, 농사짓는 친구들 이야기를 통해서 또 배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땅과 삶에 대해서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텃밭이 좋아”라는 독립출판물을 계기로 어린 작가는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로 책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다 보니 어느새 열 권 정도의 책이 만들어졌다. 제주에서의 삶이 행복할 수밖에 없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옛날 장독대로 사용하던 책방의 작은 옥상에 핀 누리장나무가 8월 하늘과 교신을 나누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언제라도 북스는”
삶이 힘들고 지치시나요? 코로나 시대에 염려되시는가요? 독립출판물을 만들어보고 싶진 않으신가요? 구좌읍 하도리 “언제라도 북스”로 가 보세요. 7월이면 가까이 문주란이 하얗게 피는 토끼섬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해안가엔 수국도 한 풍경 하는 하도리입니다. 일상에 지친 당신의 삶에 안식을 주는 곳, 코로나 시대로 염려하는 당신을 위해 오직 하루 한 팀만을 받습니다. 함께하신다면 독립출판물도 만들 수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 제주시 구좌읍 문주란로5길 34-2 (버스 편: 201번 하도리 정류장 하차, 도보 10분)
영업시간: 목~일요일 오전 11시~오후 6시
블로그: unjerado.tumblr.com
인스타: @unjeradobooks
문의: unjeradobook@gmail.com

# 고봉선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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