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09)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2006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2006. 사진=알라딘.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2006. 사진=알라딘.

1. 허공을 걷는 시대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우리의 삶을 더 심한 불확실성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듯하다. 한편에서 많은 자영업자들이 파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출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넘쳐나는데 주가와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뛰어 오른다. 돈이 없어 먹을 것을 구걸한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는 가게 주인에게 ‘돈쭐’을 내 주었다는 인터넷 미담이 이어지는 가운데, SNS에는 플렉스가 유행한다. 이런 정신없는 뉴스들을 접하다 보면 마치 두 다리가 허공에 뜬 채로 걷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팬데믹이라는 상황이 종료가 된다면 공중에 뜬 두 다리가 다시 지면에 닿을 수 있을지 불안하다. 

어떤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박봉에 시달리면서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소위 ‘하차감’이 떨어진 벤츠 대신에 어떤 차를 살지 고민하는 세상이다. OECD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가 가장 많은 나라답게 매일 밤 뉴스에는 노동자의 사망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문제는 노동자의 죽음이 마치 일상처럼 느껴져 사람들이 점점 그 억울한 죽음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일상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 영위된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변의 피비린내에 몸서리를 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능력주의 시대의 전사로 훈련받은 우리는 그의 불행을 단지 그의 탓으로 돌리고, 타자의 고통에 눈을 감고 코를 막은 채 세상에 떠도는 주인 없는 돈을 거머쥐어 ‘경제적 자유’를 얻을 희망을 좇는다. 

지금은 좀 잦아들었지만 가상화폐 열풍은 그런 희망을 실현시켜 줄 좋은 통로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파트를 살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을 깨달은 젊은이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가상화폐에 투자했다. 당연히 돈을 잃은 경우가 더 많겠지만, 그래도 꽤 많은 젊은이들이 비현실적인 액수의 돈을 벌었다. 이런 삶의 방식이 팬데믹으로 넘쳐나는 유동성 장세의 새로운 삶의 규범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경제적 자유’를 획득한 젊은이들은 이제 무엇을 하면서 살게 될까?

노동은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늘 생계의 필연성에 의해서 강요된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진전되어 온 자동화와 분업화는 인간의 노동을 점차 기계적인 과정에 종속시켜 왔다. 인간이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되는 시대에 노동자의 죽음은 기계 설비의 결함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그나마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는 로봇과 AI 기술은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자리를 더 축소시키고 있다. 기업은 사람을 늘려서 안전을 확보하는 대신 기계를 늘려서 인간을 없애는 쪽으로 갈 것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소외를 말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마땅히 받아야할 대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적어도 노동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합당한 지위를 누려야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생산과 인간의 노동이 분리되는 시대에서, 달리 말해 노동하는 인간이 없어지는 시대에 인간에게 주어져야할 마땅한 대가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노동에는 어떤 의미가 남아있게 될까? 허공에 떠 있는 두 다리가 지면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이 막연하게나마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2.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노동과 자본주의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2006)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확연히 바뀌어가는 시기에 도대체 어떤 신념과 가치가 그러한 태도 변화를 이끌었는지 구명하고 있는 책이다. 화폐는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도 존재했고 중요했다. 더 많은 화폐를 획득하고자 하는 탐욕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것이다. 베버는 그러한 탐욕은 자본주의 정신과 무관하며, 오히려 비합리적 충동의 절제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가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언급한다.(9쪽) 특히 근대 서양에서 발전한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는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12쪽)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는 오로지 서양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대 서양의 바깥에는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조직화를 가능하게 한 토대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합리적인 법률 및 행정 조직 등을 거론할 수 있으나 더욱 중요한 정신적 토대를 베버는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리적 윤리에서 찾고 있다. 

우선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이 등장한 ‘자본주의 정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기 위해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돈에 관한 설교를 길게 인용하고 있다. 유명한 그 설교의 첫머리만 재인용해 보자.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는 오락을 위해 6펜스만을 지출했다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신용이 돈임을 잊지 말라. 누군가가 자신의 돈을 지불 기간이 지난 후에도 찾아가지 않고 나에게 맡겨 두었다면 그는 나에게 이자를 준 것이거나 내가 이 기간 동안 그 돈으로 할 수 있을 만큼의 것을 준 것이다. 좋은 신용을 가졌고 그것을 잘 이용한다면 대단한 액수의 돈을 쌓을 수 있다.......” (34-35쪽)

베버는 이 설교에서 단순한 처세술이 아닌 독특한 ‘윤리’를 읽어내고 있다. 이 글은 하나의 에토스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베버가 말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 정신이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것”(38쪽)이다. 칼뱅 교도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아버지가 주입시킨 “그의 직업에 충실한 자를 보았느냐, 그는 왕 앞에 서리라”(잠언 22장, 29절)라는 성경구절에서의 직업상의 유능함은 프랭클린 도덕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것이다. 

베버는 근대의 자본주의 기업은 이런 정신적 태도로부터 가장 적합한 정신적 추진력을 찾았다고 언급한다.(48쪽) 잘 알려진 대로 위에서 언급한 ‘직업’이라는 독일어 단어는 신의 부름(calling)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세속적인 처세술로 보였던 프랭클린의 돈에 관한 설교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는 단어와 만나면서 칼뱅의 금욕주의와 연결된다. 칼뱅 교도들의 사회적 노동은 오직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노동으로서 직업노동 역시 그런 성격을 갖는다고 베버는 지적한다.(84쪽)

부를 축적하는 것은 직업노동의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지 세속적인 향락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징표이며 재산은 안주의 위험을 수반하므로 죄악시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행위만이 분명하게 계시된 신의 뜻에 따라 영광을 더하는 데 봉사한다”고 말한다.(121쪽)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최고의 중죄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절묘하게 결합한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현세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재산낭비적 향락에 반대해 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 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136쪽)

많은 문명에서 화폐에 대한 탐욕이 존재했음에도 유독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유에 대한 베버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사회적, 경제적 변화의 기저에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신념의 변화가 수반된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귀담아 들을 만하다. 베버는 물론 이런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고 지적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145쪽)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칼뱅적 금욕주의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고, 물질적 향락을 위한 무한 질주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전이 된 이 책을 지금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물음이 있다. 베버가 성찰한 대로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에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가 형성되어 있었듯이, 가상화폐와 메타버스의 공상적인 가치가 퍼져나가고, 플렉스가 유행하며, 생산적인 노동의 과정에서 인간의 자리가 위협받는 오늘날의 에토스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노동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전통적인 가치의 저항을 극복할 만한 어떤 새로운 에토스가 등장했다면, 아마도 포스트자본주의의 기업은 재빠르게 그 등에 올라타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둥둥 떠다니는 허영의 환영들밖에 없다.

# 이유선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