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강정효, 눈 쌓인 제주 풍경 사진집 ‘세한제주’ 발간

점으로 찍은 듯 하얀 구름 사이로 탁 트인 하늘, 눈부신 햇빛으로 더욱 영롱한 푸른 바다, 초록으로 물든 산간. 많은 사람들이 ‘제주’ 하면 떠올리는 풍경과 색은 이처럼 밝음이 가득하다. 그런 밝은 제주를 만끽하기 위해 역병과 무더위를 무릅쓰고 한 달에 100만명 넘게 섬을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그런 환하고 선명한 명도와 채도가 제주의 전부는 아니다. 겨우 작은 틈 사이로 빛줄기가 들어오는 빽빽한 녹갈색 수풀과 검정 현무암, 짙은 구름을 밀어낼 만큼 세찬 바람. 겨울 제주의 풍경은 화창한 여름과 정 반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제주 사진작가 강정효가 새 책 ‘세한제주’(한그루)를 통해 소개하는 눈 쌓인 풍경은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그것이 아니다. 눈, 돌담, 수목, 바람이라는 조건과 작가 정신이 결합해 조화를 이룬 극히 제한된 장면이다.

그래서일까. 흑백 사진 속 풍경은 ‘제주의 한 겨울 추위(歲寒濟州)’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얼얼한 제주도 냉기를 기억하는 이들만 알 수 있는 감각을 이끌어낼 만큼 생동감 있는 에너지를 간직한다.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세한제주’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흑룡만리’ 찬사를 받는 제주 돌담의 빼어난 조형미를 흑백과 눈(雪)으로 극대화시켰고, 나아가 조선시대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세한도를 연상케 한다.

특히 사진 89점 대부분은 제주돌담 비중이 높은데, 돌담에 박힌 눈 모양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달라지면서 독특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그런 돌담들이 흑백의 조화를 입고 좌우상하 쌓이면서, 꿈틀대는 흑룡의 비늘(83쪽)·발톱(41쪽) 같은 형상부터 거칠고 때로는 고요하게 겨울 한복판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93쪽에 실린 사진은 흡사 추사의 ‘세한도’가 되살아났다고 느낄 만큼 묘한 매력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한제주’의 다른 작품(43쪽, 147쪽)도 세한도를 감안한 구도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93쪽 작품이 가장 인상이 깊은 이유는 제주돌담과의 조화가 가장 잘 이뤄졌기 때문이다. 추사 작품에서는 제주돌담이 등장하지 않지만, 강정효 작가만의 감각으로 자신만의 세한도를 렌즈에 담아냈다고 볼 수 있겠다.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세한제주’의 또 다른 매력은 제주돌담이 구현하는 선(線)과 흑백의 아름다움이다. 직선과 곡선, 그런 선들이 수평과 수직을 넘나들며 만들어내는 미(美)의 구조를 직사각형 틀 안에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제주돌담이 지닌 선의 아름다움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은 161쪽 사진이다. 161쪽에 실린 작품은 도로 개설용 석축 구조물과 나무를 주목했다. 좌우 곡선으로 뻗어가는 석축과 그 위에 꼿꼿이 서있는 나무 한 그루의 교차는 나름의 매력을 가진다. 그럼에도 자연 환경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위적인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밭, 수풀, 나무, 멀게 보이는 오름과도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어우러지는 제주돌담의 매력은 오히려 161쪽 작품으로 인해 더욱 빛난다. 

색을 지우고 흑과 백으로만 대상을 바라보게 하는 선택은 오히려 피사체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 흑의 돌 위에 백의 눈이 어느 비율·각도로 덮여있느냐에 따라 같은 돌담도 천차만별 달라진다. 그 중에서 흑의 농도를 높인 작품(65쪽)은 깊은 에너지를 품고 있는 듯 하다.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강정효 작가가 책 서두에서 밝힌 대로 “하얀 눈과 검은 돌담, 그 너머의 푸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 폭의 수묵화”로 부를 만 하다.

‘세한제주’는 돌담 비중이 크지만 나무, 오름 같은 대상들도 못지않게 쓰인다. 눈 쌓인 들판 위에서 고독하게 서있는 모습(23쪽), 겨울바람의 위력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나무들(177쪽),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돌담과 관광을 위해 심어진 야자수의 대비(81쪽) 등은 돌담과는 다른 존재감을 뽐낸다. 오름은 말없이 진중하게 뒤를 지키는 역할이다.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강정효의 작품 '세한제주'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촬영 장소나 시기 같은 보다 자세한 작품 정보를 책 속에서 알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정보 자체가 작가의 노력이자 자산이며, 무엇보다 너무 공개되지 않아야 오히려 지킬 수 있다는 판단도 이내 스쳐 지나간다.

강정효 작가는 ‘제주 아름다움 너머’, ‘폭낭, 제주의 마을 지킴이’와 ‘세한제주’까지 지난해부터 의욕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현역임을 보여주고 있어 반가운 일이다. 사진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과 고집은 단순 사진 일변도가 아닌 기자, 산악인, 연구자로서 영역을 갖추고 “제주의 가치를 찾는 작업을 계속” 해왔기에 자연스럽게 생성된 특질과도 같다. 

이제는 날다람쥐 뛰듯 한라산을 누빌 수는 없겠지만, 사진작가로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길 바란다. 동시에 역사 인식 위에 제주 가치를 쫓아온 흔치 않은 사진작가들 가운데 하나인 만큼 후배 양성에도 계속 힘써주길 바란다는 사족을 덧붙여본다.

한그루, 190쪽, 2만5000원.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사진=한그루. ⓒ제주의소리

 강정효

1965년 제주 출생. 기자·사진가·산악인·제주대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사)제주민예총 이사장, (사)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이사장)를 역임했다.

17회의 사진 개인전을 열었고, 저서로 《제주는 지금》(1991), 《섬땅의 연가》(1996), 《화산섬 돌 이야기》(2000), 《한라산》(2003), 《제주 거욱대》(2008), 《대지예술 제주》(2011), 《바람이 쌓은 제주돌담》(2015), 《할로영산 보롬웃도》(2015), 《한라산 이야기》(2016), 《제주 아름다움 너머)(2020), 《폭낭, 제주의 마을 지킴이》(2020) 등을 펴냈다.

공동 작업으로 《한라산 등반개발사》(2006), 《일본군진지동굴사진집》(2006), 《정상의 사나이 고상돈》(2008), 《뼈와 굿》(2008), 《제주신당조사보고서Ⅰ·Ⅱ》(2008, 2009), 《제주의 돌담》(2009), 《제주세계자연유산의 가치를 빛낸 선각자들》(2009), 《제주도서연감》(2010), 《제주4·3문학지도Ⅰ·Ⅱ》(2011, 2012), 《제주큰굿》(2011, 2012, 2017), 《4·3으로 떠난 땅 4·3으로 되밟다》(2013),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관광 도입방안Ⅰ·Ⅱ》(2013, 2014) 등 제주의 가치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