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81) 술꾼으로 살다가 술꾼으로 죽으련다

나는 술 없는 장수(長壽) 보다 술 있는 단명(短命)을 택하겠다. 말하자면 곧 죽어도 술이다. 사진=픽사베이.
나는 술 없는 장수(長壽) 보다 술 있는 단명(短命)을 택하겠다. 말하자면 곧 죽어도 술이다. 사진=픽사베이.

적당히 마시면 술은 백약의 으뜸(百藥之長)이다.

누군가에게 술은 삶의 활력소, 윤활유가 되고 성욕을 북돋아주는 최음제, 불면을 치유하는 수면제, 불안·슬픔·아픔을 잊게 하는 마취제가 된다.

반면에 서양 속담은 “악마는 인간을 방문하는 일이 너무 바쁠 때 자기 대신 술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 풍진 세상 술 없이 무슨 낙으로 살 건가? 나는 술 없는 장수(長壽) 보다 술 있는 단명(短命)을 택하겠다. 말하자면 곧 죽어도 술이다.

<1> 술꾼의 분류

나는 술꾼을 이렇게 분류한다.

애주가(愛酒家)는 거의 매일 마시는 사람. (필자의 청년기)
호주가(好酒家)는 일주일에 1회 정도 마시는 자. (필자의 중년기)
낙주가(樂酒家)는 가끔 생각나면 마시는 분. (필자의 노년기)

<2> 술꾼의 등급

술꾼에게도 엄연히 등급이 있다.

마시면 마실수록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이 거룩해지는 주성(酒聖), 허허실실 웃으며 다 받아주는 주선(酒仙), 안 취했다고 우기며 했던 말을 반복하는 주졸(酒卒), 쌍욕하고 물건 부수고 폭행(특히 가정폭력)을 일삼는 주폭(酒暴), 음주 운전으로 살인자가 되려고 환장한 주사파(酒死派)… 등이 있다. 

주폭과 주사파가 자신의 악행을 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험난한 인상(죄수, 노숙자)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하렷다!!

<3> 술꾼의 5대(大) 불문(不問)

술꾼에게는 ‘5대 불문’이라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

① 주류 불문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그동안 국내외 여행을 하면서 각 지방, 각 나라의 술을 섭렵했다. 여행의 참맛은 그 지역의 음식을 먹는 것인데, 소주·김치·고추장을 바리바리 싸서 해외로 나가는 한국인들, 참 한심하다. 최근에 막걸리에 쉰다리를 섞는 ‘막다리’를 개발했다.

② 안주 불문 (책상 다리 말고는 다 먹는다)

궁핍했던 시절의 안주는 김치·마늘·우동 국물이 고작이어서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요새는 육고기로 오리·말·개를, 바닷고기로는 황태·홍어·복어·아나고·꼼장어 등을 선호하지만 산해진미를 먹어도 시큰둥하다.

③ 상대 불문 (작부건 성직자건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카톨릭 신부님 중에는 술꾼이 꽤 있고, 스님은 ‘물은 물이요, 술은 술이로다’라고 읊으며 진한(?) 곡차를 마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했다. 중병과 동고동락하는 수행자를 누가 탓할 것인가?

④ 시간 불문 (젊었을 적엔 시도 때도 없이 마셨다.)

특히 낮술을 즐겼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낮술에 취하면 지 애비도 몰라본다는 것이다.

⑤ 장소 불문 

돌아가신 문정보 형은 소주 됫병을 들고 무덤을 자주 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은 그때 이미 그곳에서 배태된 게 아닌가 여겨진다.

<4> 술에 관한 에피소드 - 명정(酩酊)

명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취함’을 뜻한다. 장독을 열고 오줌을 갈길 수주 변영로의 수필 ‘명정 40주년’ 이 유명하다. 필자가 쓴다면 ‘명정 50년’이 될 것이다.

(A) 에피소드 하나, 30여 년 전, 문무병·고충석과 서울 신촌 시장에서 마셨을 때, 술값내기 가위 바위 보에서 진 내가 술집에 인질로 잡혔다. 도망치다가 시장통 우물에 빠져 익사할 뻔 했던 희대의(?) 사건이 있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건 순전의 나의 수영 실력 덕분이었다.

(B) 재작년, 하귀 사는 묘령의 여인이 나의 구애를 거절하자, 홧김에 막걸리 5병을 깠다. 하귀에서 걸어서 오는데 10미터 마다 꼬꾸라졌다. 설상가상으로 귀가한 후, 넘어지는 바람에 TV가 깨졌다.

온몸이 멍든 데다가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여 “또 다시 술 먹으면 난 개 아들이다”라고 선언했지만 개가 똥을 참지, 나는 술을 참지 못한다. 이런 비루한 날 보고 하느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괜찮아, 다 내 탓이야. 널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나잖아….”

나는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느님! 앞으로도 짱짱하게 죽을 때까지 마실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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