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타인 의견 존중, 설득과 타협, 협력하는 것이 민주주의 기본 / 김효철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1980년대는 민주주의 암흑기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이은 전두환 정권은 텔레비전에 나와 험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를 위협하는 사회 분란 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쿠데타로 탄생한 정권인 만큼 국가 운영방식은 폭력과 억압이었고 군부독재에 항거하던 학생과 시민들을 사회 분란 세력으로 낙인찍었다.

이제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독재정권을 이겨내고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자부할 만큼 성숙했다. 그 사이 지방자치 제도도 탄생하고 지방의회를 중심으로 중앙 권력 집중에서 벗어나 지역주민 뜻과 자기 결정권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가 꽃을 활짝 피운 듯한데 제주에서 때아닌 철 지난 사회 분란 세력 논란이 일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 26명이 발의한 ‘비자림로 확·포장사업 조기 개설 촉구 결의안’이 발단이다.

이 결의안은 제주뿐 아니라 전국에서 큰 관심과 논란을 부른 비자림로 확·포장공사 재개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비자림로 건설공사는 총사업비 242억원을 들여 제주시 구좌읍 대천교차로에서 금백조로 입구까지 2.9km 구간을 기존 왕복 2차로에서 4차로로 확·포장하는 사업이다.

지난 2018년 8월2일 첫 삽을 떴지만, 삼나무 벌채와 멸종위기종 서식지 파괴 등 환경 훼손이 알려지면서 닷새 만에 공사가 중단됐다. 비자림로가 건설교통부로부터 전국에서 아름다운 길로 선정돼 유명세를 탄 길인 데다 잘려나간 삼나무숲 모습이 전국 뉴스로 알려지면서 비판이 쏟아졌다. 이후 찬반 논란과 갈등을 겪으며 3년 넘게 공사 재개와 중지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공사 재개를 놓고 갈등과 이견이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들이 갈등을 겪고 있는 현안에 대해 도의회가 일방적으로 공사 재개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낸데다 결의안 내용도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결의안은 세 가지 주문사항을 담고 있다. 

첫째, 전국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의 공공사업에 대해 분란과 갈등을 유발하는 반대단체의 조직적 활동에 대한 공동의 대책 마련을 제안한다.

둘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주민숙원사업과 공공을 위한 공익사업에 대한 반대단체의 조직적 활동에 강력히 대응하여 주민의 권리와 이익을 최우선 해야 한다.

셋째, 환경부에서는 눈치 보지 말고 지속가능한 제주의 미래를 위한 거시적인 환경적 가치에 더 큰 고민을 해줄 것을 촉구한다.

물론 결의안에서 볼 수 있듯이 사업비가 절반가량 이미 들어간 데다 3년 넘게 공사가 중단되며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 상태다. 공사 재개를 바라는 사람들로서는 공사 강행을 주장할 만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민의의 전당이라는 제주특별자치도의회가 상정한 결의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공공사업에 대해 반대하는 지역주민 의견과 활동을 ‘분란과 갈등을 유발하는 반대단체의 조직적 활동’으로 표현한 것은 지나치다. 독재 정부에 항거한 시민과 학생들을 사회갈등과 분란 세력이라던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이 연상된다.

결의안에서 지방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것은 분란과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며 이들에 대해서 전국 지방자치단체나 지방의회에 공동대응을 주문한 것은 시대 퇴행적이며 반민주적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다양한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지방의회 기능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나아가 발의한 의원들이 원했든 무지했든 결의안으로 비자림로 확·포장을 둘러싼 갈등은 더 커지고 있으며 지방의회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주의소리
비자림로 확·포장 공사 재개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제주도의회 고용호(사진, 성산) 의원 주도로 여야 의원 25명이 서명해 공동 발의됐다. 민주주의는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공공 가치를 위해 설득과 타협, 협력하는 일이 기본 이념이어야 한다. 공공과 공익사업이라는 이유로 반대활동을 사회 분란 행위로 보는 인식 아래서는 민주주의와 헌법 가치를 지킬 수 없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의소리

결의안이 알려지며 관련 단체뿐 아니라 정치권까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제주제2공항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는 지난 19일 성명서를 내고 "도의회 결의안이 환경파괴를 부추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지방자치를 훼손하는 단어들로 가득 차 있다"며 "비자림로 확장공사 재개를 핑계삼아 제주도를 개발독재시대로 회귀시키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들’도 성명을 내고 "결의안은 제주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 시간을 쪼갠 시민들의 활동을 ‘지역의 공공사업에 대한 분란과 갈등을 유발하는 조직적 활동’이라며 강력히 대응하자고 촉구하고 있다"며 "이해득실에 따른 짬짜미 정치가 아닌 제주의 가치와 비전에 대한 고민과 책임을 담은 정치를 원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결의안 추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폐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정의당 제주도당은 30일 성명서를 내고 "삼나무 훼손과 법정보호종 서식지 파괴 등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 것을 일부 시민단체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이번 결의안 추진을 비판했다. 제주녹색당도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공개 토론회를 요청했지만, 제주도와 도의원은 응하지 않았다. 지역 정치와 행정이 갈등조정의 역할을 포기하면서 갈등은 더 커지기만 했다"고 질타했다.

사람마다 다양한 이해와 의견이 존재하기에 우리가 하는 일마다 생각이 다르고 갈등도 따른다. 설령 주민생활에 꼭 필요한 공공사업이라 해도 찬반은 있을 수 있다. 하수처리시설이나 쓰레기처리시설 같은 공공시설 설치 사례에서 숱하게 봐왔다. 비자림로 확장처럼 환경파괴를 동반하는 사업은 더욱 그럴 수 있다.

처음부터 갈등이 없는 사업을 꿈꾼다면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게 맞다.

민주주의는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공공 가치를 위해 설득과 타협, 협력하는 일이 기본 이념이어야 한다. 

지방자치에 있어 지역주민이 찬성과 반대에서 시작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는 매우 중요하다. 그 실행자로서 지방정부나 지방의회는 모든 사업에 관련한 필요성, 타당성, 사회적·환경적 수용성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밝히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합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공과 공익사업이라는 이유로 반대 활동을 사회 분란 행위로 보는 인식 아래서는 민주주의와 헌법 가치를 지킬 수 없다.

이번 결의안에서 1980년대 독재시대 유물과 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유다. 

김효철 (사)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 ⓒ제주의소리<br>
김효철 (사)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 ⓒ제주의소리

결의안은 오는 7일 열리는 제2차 본회의에서 결정 날 듯하다. 이미 좌남수 의장은 “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며 “상정해서 전체 의원들의 뜻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의원들이 제출한 결의안인 만큼 가.부를 묻는 본회의 의결 절차는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의결 결과에 따른 후폭풍도 예상된다. 

결국 결의안 가결이든 부결이든 절대다수 의석을 갖는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다. / 김효철 논설위원, (사)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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