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화로 방치될뻔한 관사와 사무실, 친환경 복합문화공간 ‘카페물결’로 재탄생
누군가 그랬다. 그 유명한 독일 로렐라이 언덕도 제주 사라봉 언덕의 절경에는 비할바 못된다고.
그 사라봉 언덕에서 100여년을 우직하게 지켜왔던 산지등대가 확 탈바꿈 됐다. 제주를 오가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해왔던 산지등대가 100년만에 시민들의 문화휴식공간으로 다시 불을 밝힌다.
1916년 처음 불을 밝히고 이듬해 관리인이 상주하기 시작한 지 100여년 만인 2019년 10월, 제주 사라봉 산지등대를 지키던 등대지기가 사라졌다.
해양수산부는 전국 유인등대의 무인화 작업을 이어왔고, 산지등대도 이 흐름을 피하지 못했다. 관사와 사무실을 비롯한 공간들은 텅 빈 채 남길 운명이었다.
새로운 전환을 맞은 것은 이 공간을 문화예술로 되살려한다는 시도가 본격화되면서부터. 2019년 11월 산지등대에서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산지예술등대 프로젝트 전시가 진행됐다. 등대와 그 주변 지역이 지닌 역사를 재조명한 아카이브전은 이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조명했다.
2020년 건입동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는 부산지방해양수산청 제주해양수산관리단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유휴건물을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철거 대신 공공적 문화거점이라는 새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올해 초부터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를 시작했고 이번 여름 1986년 지어진 총 228㎡의 건물 두 동 책과 그림, 커피가 함께하는 새로운 공간 ‘카페물결’이 탄생했다. 친환경 카페이면서 독립출판물을 만날 수 있는 서점, 그림과 사진이 함께하는 갤러리이자 공연 공간이다.
이 곳의 지향점은 바다와 휴식, 그리고 생태.
카페물결은 티슈를 제외하고는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며 개인 컵을 가져와야 테이크아웃이 가능하다. 카페 안에는 환경과 제주를 주제로 한 책들과 독립출판물이 자리했다.
갤러리 한 가운데 놓인 원목테이블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데, 오는 6일까지 1950~1980년대 제주 아이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고영일 작가의 사진전이 진행 중이다. 야외에서는 등대 곁에서 사라봉 기암과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최근 건입동을 비롯한 제주지역 청년들을 채용했고, 제주의 다양한 문화단체들과 협업도 계획 중이다.
이 공간을 기획한 김교현 디렉터는 “공간의 특성상 이 곳이 공적인 영역, 모두에게 함께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오래된 건물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사람들이 쉽게 여러가지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계획했다”고 밝혔다.
김 디렉터는 “차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제주와 생태에 대한 책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친환경 제품도 같이 소개할 예정”이라며 “쉽게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테마를 바꿔가면서 전시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공간이 ‘앞으로의 세대가 무엇이 더 필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은 답이 되길 바라고 있다. “휴식이나 생태와 같은 테마들이 앞으로 더 필요한 만큼, 이런 점들을 주민이나, 도민, 관광객들이 와서 쉽고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됐으면 한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매일 밤 15초에 한 번씩 48km 떨어진 바다에 불빛을 비춰온 산지등대에 또 하나의 역사가 쌓이고 있다. 1916년 벽돌로 세워진 뒤, 1917년 등대지기가 머물기 시작했고, 1999년 새로운 콘크리트 등대가 세워졌고, 2006년 등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곳은 2021년이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