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는 멸망해 가는가 - 한 여성 작가의 흐릿한 목소리를 듣다
류큐는 멸망해 가는가 - 한 여성 작가의 흐릿한 목소리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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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64)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1969년 촬영 장수 축하회에서 여자의 손등에 문신이 보인다.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1969년 촬영 장수 축하회에서 여자의 손등에 문신이 보인다.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망해가는 류큐녀의 수기'라는 소설이 도쿄의 저명한 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에 실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1932년이다. 작가인 쿠시 후사코(久志芙沙子)는 1903년에 일찍이 류큐라고 불렸던 오키나와의 고도 슈리의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원을 거쳐 1930년대에 도쿄로 이주하여 문필로 생계를 이어가려고 투고한 작품이 출판사의 눈에 띄었다. 소설의 원제는 ‘한쪽 구석(片隅, 편우)의 비애’였지만 출판사는 그것을 ‘망해가는 류큐 여자’라는 스캔들에 오를만한 단어를 제목으로 (쿠시에 따르면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개편해서, 언론에서 화려한 선전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부추겨 여러 차례 연재로 발표하기로 했다. 이에 즉석에서 반응한 것이 도쿄의 오키나와현 학생회나 오키나와현인회다.

학생회의 대표자들은, 제1회를 읽은 것만으로 이 작품이 오키나와인을 모욕하는 내용이라며 쿠시나 출판사에 격렬하게 항의해, 연재 중지와 사죄를 요구했다. 출판사는 이에 응해 그 후의 게재를 포기하고 쿠시의 '해명문'을 게재했다. 그 후, 쿠시는 붓을 꺾어, 오키나와 출신의 여성 소설가로 성장하는 길을 닫았다. 쿠시 소설의 무엇이 그들을 격분시켰는가. 확실히 쿠시는 1879년 일본에 병합되어 왕국을 잃은 류큐 지배계층의 몰락한 생활을 그리고, 입신출세를 꿈꾸며 도쿄로 이주하면서도 일본 사회의 식민지주의적 시선 속에서 자기의 정신을 억압하며 사는 '오키나와현인'의 모습을 시니컬한 필치로 그렸다.

소설의 주인공인 여성은 물론 쿠시의 분신이다. 주인공으로는 도쿄에서 회사 경영에 성공한 숙부가 있어 그는 필사적으로 오키나와의 출신을 숨기고 있다. 삼촌은 오키나와의 자기 생가 송금을 그녀에게 부탁하기 때문에 그녀는 매달 삼촌을 만나지만 삼촌은 그녀가 자기 회사에 출입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역 대합실에서 돈을 주고 허둥지둥 떠나기만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남긴 말은 "훌륭한 곳과 거래를 하고 있고, 가게에는 대학출신 같은 것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류큐인이라고 알려지면 만사형편이 좋지 않으니까"라는 고향과의 결별 선언이었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머리에 짐을 이고 전쟁터를 달리는 여성, 1945년 미군 촬영.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머리에 짐을 이고 붐비는 시장을 지나가는 여성, 1968년 촬영.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쿠시에 의하면 학생회장 등은, 오키나와현민이 모두 이러한 (비굴한) 인간이라고 오해받는 것은 민폐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들의 항의는 문서로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쿠시의 '해명문'으로부터 추측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학생회나 현인회의 남자들은 '오키나와'를 자칭하는 정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쿠시의 묘사를 우선 그들에의 모욕이라고 받아 들였을 것이다. 게다가 삼촌 이외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누구나 자존심이 결여된 존재이다.

쿠시는 오키나와에서 몰락한 남자가 제멋대로 살고 어머니와 아내, 첩들도 비참한 운명에 빠뜨리는 모습을 가차없이 묘사했다. 또한 칠칠치 못한 남편을 대신해 열심히 일해서 아들에게 고등교육을 받게 한 어머니를 결국에는 그 손에 새겨진 문신 때문에 멀리하는 사례도 있다. 손에 문신을 새기는 입묵(入墨)은 류큐 여성의 인생 의례로서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문신을 야만적인 풍습으로 규정하고 1899년 금지령을 내렸지만 여자들은 당연히  은밀히 저항했다. 하지만 문명국 일본에서 사회적인 상승을 목표로 하는 남자들 중에는, ‘야만’을 피부에 새긴 어머니를 일본인에게 보이지 않게 구석으로 밀어 넣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를 내면화한 남자들의 ‘야만과 미개’라는 오키나와의 기호를 자신들로부터 단절하고 싶다는 자기 기만을 여자에게 지적받자 남자들이 발끈한 것이 쿠시 필화의 실상이 아니었던가. 덧붙여 남자들의 역린을 언급한 것은, 쿠시가 사용한 ‘민족’이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입묵을 부끄러워하는 남자를 비판한 문맥에서, 쿠시는 이렇게 썼다. 

“류큐의 인텔리들은 조선인이나 대만인과 같이 자신들의 풍속 습관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내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대담함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루 빨리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이면서도, 뼈에까지 사무친 쁘띠부르주아 근성 때문에, 좌고우면하면서 체면치레 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들이 망쳐놓은 길을 따라 끌려가는 역사의 전당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1932년 일본에서 쿠시가 이러한 '민족의식'을 표명한 것은 의미가 크다. 그해 조선인 이봉창이 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있었고(후에 사형선고), 만주국이 수립되고,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여 이오우에 총리가 해군 장교에게 살해되었다. 제국주의가 군국주의로 전환되면서 야마토 민족이라는 허구에 사람들이 몰입하기 직전에 쿠시는 자신들의 생활 문화를 지키는 조선인이나 대만인과 비교하면서 '눈뜨지 않는 민족'으로서 류큐인과 자기 자신의 비애를 그려냈다. 학생회는 쿠시에게 "아이누나 조선인과 동일시되면 폐가 된다"고 논란했다고 하지만, 우리 류큐인은 다른 피(被)식민 민족과는 다른 황국신민이라는 사고 자체가 쿠시가 말하는 "타인이 걸어간 길을 끌려가면서 살아간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13년 후, 일본에 끌려간 오키나와가 도착한 지점은, 오키나와전투라는 지옥과 오키나와를 미국에 팔아넘기는 일이었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성역에서 땅의 신들에게 기도하는 여성, 1948년 미군 촬영. 사진=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이 소설에 쿠시 자신이 부여했던 제목은 ‘한쪽 구석의 비애’였다. 바로 그 말대로 제국의 서열에서 소외된 류큐인으로서, 젠더에서 소외된 여성으로서, 자본주의 구조에서 소외된 하층계급으로서, 주류가 될 수 없는 '한켠'의 존재의 시선을 쿠시는 문학으로 승화하고자 하였다.

젠더와 식민주의라는 오늘날의 문제를 선취하고 있던 이 작가가 글쓰기를 계속 했다면, 오키나와 문학의 풍경은 지금과 조금은 달라졌을까.

# 토미야마 카즈미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琉球は滅びゆくのか-ある女性作家のくぐもった声を聴く

豊見山和美

「滅びゆく琉球女の手記」という小説が東京の著名な雑誌『婦人公論』に掲載され、沖縄の人々に衝撃を与えたのは1932年のことだ。作者の久志芙沙子は1903年にかつて琉球と呼ばれた沖縄の古都・首里で士族の家に生まれた。小学校の教員を経て1930年代に東京へ移住し、文筆で身を立てようと投稿した作品が出版社の目に留まった。小説の原題は「片隅の悲哀」というものだったが、出版社はそれを「滅びる」「琉球」「女」というスキャンダラスな言葉をちりばめたタイトルに(久志によれば一言の相談もなく)改変し、メディアでの派手な宣伝で読者の関心を煽り、数回の連載として発表することにした。これに即座に反応したのが東京の沖縄県学生会や沖縄県人会だ。学生会の代表者らは、第一回を読んだだけでこの作品が沖縄人を侮辱する内容であるとして久志や出版社に激しく抗議し、連載中止と謝罪を求めた。出版社はこれに応じてその後の掲載を諦め、久志の「釈明文」を掲載した。その後、久志は筆を折り、沖縄出身の女性小説家として成長する道を閉じた。

久志の小説の何が彼らを激怒させたのか。確かに久志は、1879年に日本に併合されて王国を失った琉球の支配階層の没落した生活を描き、立身出世を夢見て東京へ移住しながらも、日本社会の植民地主義的なまなざしの中で自己の精神を抑圧しながら生きる「沖縄県人」の姿を、シニカルな筆致で描いた。小説の主人公である女性はもちろん久志の分身である。主人公には東京で会社経営に成功した叔父がおり、彼は必死に沖縄の出自を隠している。叔父は沖縄の自分の生家への送金を彼女に依頼するので、彼女は毎月叔父に会うのだが、叔父は彼女が自分の会社に出入りすることさえ許さず、駅の待合室で金を手渡してそそくさと立ち去るだけだ。彼が最後に故郷で残した言葉は「立派なところと取引きをしているし、店には大学出なんかも沢山つかっているので琉球人だなんて知られると万事、都合が悪いのでね」という、故郷との決別宣言だった。

久志によれば学生会長らは、沖縄県民がみんなこのような(卑屈な)人間だと誤解されては迷惑だと述べたという(彼らの抗議は文書として残っていないので久志の「釈明文」から推量するしかない)。確かに学生会や県人会の男たちは「沖縄」を名乗るまっとうな人々なのだから、彼らは久志の描写をまず彼らへの侮辱だと受けとめたのだろう。さらに言えば、叔父以外に登場する男たちは誰もが自尊心を欠く存在である。久志は、沖縄で没落した男が自堕落に生きて母や妻、妾たちをも悲惨な運命に陥れるさまを容赦なく描いた。

また、だらしない夫に代わり必死に働いて息子に高等教育を受けさせた母が、結局はその手に施された入墨のために遠ざけられるという例も挙げる。手への入墨は、琉球女性の人生儀礼であり文化的・社会的アイデンティティにおいて重要な意味があった。日本政府は入墨を野蛮な風習と断じて1899年に禁止令を発したが、女たちは当然、密かに抵抗した。だが文明国日本で社会的な上昇を目指す男たちの中には、<野蛮>を肌に刻んだ母を日本人に見せないよう隅におしやる者もいたのだ。帝国主義を内面化した男たちの、<野蛮と未開>という沖縄の記号を自分たちから切断したいという自己欺瞞を、こともあろうに「女」に指摘されて男たちが逆上したというのが、久志の筆禍の実情ではなかったか。

加えて男たちの逆鱗に触れたのは、久志が用いた「民族」という言葉だったという。入墨を恥じる男を批判した文脈で、久志は「朝鮮人や台湾人のように、自分達の風俗習慣を丸出しにして内地で生活出来る豪胆さは琉球のインテリに出来る芸当ではない」「妾達はいち早く目覚めねばならぬ民族であり乍ら、骨に迄しみついたプチブル根性が災いして、右顧左眄しつつ体裁を繕い繕いその日暮らしを続けているのだ。かくて永久に歴史の殿を承って他人の歩み荒した路を曳きずられながら生きて行くのである」と書いた。

1932年の日本で久志がこのような「民族意識」を表明したことの意味は大きい。この年、朝鮮人李奉昌が天皇の馬車に爆弾を投げる事件があり(後に死刑宣告)、満州国が樹立され、上海事変が勃発し、犬養毅首相が海軍将校に殺害された。帝国主義が軍国主義へ転換し、大和民族という虚構に人々が没入しようという直前に、久志は自分たちの生活文化を守る朝鮮人や台湾人と対比しながら、「目覚めぬ民族」としての琉球人と自分自身の悲哀を描出した。学生会は久志に「アイヌや朝鮮人と同一視されては迷惑する」と論難したというが、われわれ琉球人は他の被植民民族とは違う皇国臣民なのだという思考そのものが、久志のいう「他人の歩み荒した路を曳きずられながら生きて行く」ことに等しかったと言えよう。そしてその13年後、日本に曳きずられた沖縄が行きついた地点は、沖縄戦の地獄とアメリカへの売渡しだったのである。

この小説に久志自身が与えていた題名は「片隅の悲哀」だった。まさにその通り、帝国の序列において周縁化される琉球人として、ジェンダーにおいて周縁化される女性として、資本主義構造において周縁化される下層階級として、主流化することのない「片隅」の存在のまなざしを久志は文学に昇華しようとした。ジェンダーとコロニアリズムという今日的な問題を先取していたこの作家が書き続けていたら、沖縄文学の風景は今と少しは異なるものになっていただろうか。

写真1 1969年撮影、長寿を祝う会にて。女性の手の甲に入墨が見える。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2 1969年撮影、長寿を祝う会にて。女性の手の甲に入墨が見える。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3 1945年米軍撮影、頭に荷を載せて戦場を走る女性。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4 1968年撮影、頭に荷を載せて市場の雑踏をいく女性。沖縄県公文書館所蔵。
写真5 1948年米軍撮影、聖域で土地の神々に祈る女性。沖縄県公文書館所蔵。


琉球將要滅亡了?聆聽女作家的低語 
豊見山和美

  
1932年,小說《滅絕的琉球女手記》在東京著名雜誌《婦人公論》上發表,震驚了沖繩人民。作者久志芙沙子於1903年出生於沖繩古城首里(原名琉球)的一個武士世家。在擔任小學教師後,於 1930 年代搬到東京,並且試圖以寫作為業,她用毛筆發表的作品引起了出版商的關注。小說的原名是《角落裡的悲傷》,但出版商將其更改為一個充斥著“滅亡”、“琉球”和“女人”的誹謗詞(據久志說,未經過商量)。 並決定對標題進行修改,以在媒體上浮華的宣傳引起讀者的興趣,並將其作為系列出版數次。沖繩縣學生會和東京的沖繩縣人民協會立即對此作出回應。學生會代表強烈抗議Kushi和出版商,稱這部作品僅閱讀第一集就侮辱了沖繩人,並要求取消連載並道歉。對此,出版商放棄了後續出版,並貼出了久志的《說明》。之後,尚志放下了毛筆,關閉了她作為沖繩女性小說家的道路。
 
是什麼讓久志的小說激怒了他們?久志確實描繪了1879 年被日本吞併後失去王國的琉球統治階級的垮台,呈現出一個“沖繩縣”的故事,他為了夢想事業和事業而搬到東京,但生活在在日本社會殖民主義的注視下壓抑著自己的心思。這個人物是用憤世嫉俗的筆觸壓抑自己心神而投射成「沖繩人」的形象。作為小說主角的女性,是久志的另一個化身。另一個角色是在東京成功經營公司的叔叔,他拼命隱瞞沖繩的來歷。她每個月都會見到她,因為她的叔叔要她對沖繩的老家匯錢,但他甚至不允許她進公司來,只在車站候車室給了匯款就匆匆離去。他在家鄉留下的最後一句告別家鄉的宣言,他說:「我在很棒的地方做生意,而且我在店裡用了很多大學畢業生,不方便讓別人知道我是琉球人。」
 
 根據久志的說法,學生會主席表示,如果所有沖繩人都被誤解為這樣的(屈從的)人類,那將是一件麻煩事(Kushi 的說明是因為他們的說法沒有記錄。所以我們別無選擇,只能從久志的說明中推斷)。的確,學生會和研人會的人都是自稱“沖繩”的正派人,所以大概是把久志的形象當成了對他們的侮辱吧。而且,除了叔叔以外,所有出現的男人都缺乏自尊。久志無情地描繪了一個在沖繩墮落的男人,過著自我放逐的生活,譴責他的母親、妻子和小三的悲慘命運。
 
她還舉了另一個例子,一位為了給兒子接受高等教育而為邋遢的丈夫努力工作的母親,最終因為手上的紋身而被拒於門外。手背的刺青是琉球女性的傳統習俗,是她們的文化和社會身份的重要意義。 1899年,日本政府頒布禁令,認定紋身為野蠻習俗,女性自然暗中抵抗。然而,在以文明日本社會崛起為目標的男性中,也有不少將他們的母親推到角落裡,這樣日本人就不會看到他們皮膚上象徵「野蠻」刺青。據說,將帝國主義內化的男人被「女人」指出是自欺欺人,他們想從自己身上切斷「野蠻」和「不文明」的沖繩象徵。然而,這不正是久志的實際情況嗎?
 
此外,據說是久志使用的「民族」一詞觸及了男性的叛亂。在批評一個羞於墨的人的語境下,久志說: 「琉球知識分子不能像韓國人和台灣人那樣,敢於生活在內城,同時暴露他們的風俗習慣。」
「隨然我們是一個必須盡快覺醒的民族。但由於小資產階級的頑強已經滲透到骨子裡,我們正在盡最大努力讓自己努力。所以他們將永遠活在歷史的殿堂裡,我們正被別人拖著在崎嶇道路上。」
 
1932年,久志在日本表達了這種“民族主義”,意義重大。同年,韓國李奉昌向天皇馬車投擲炸彈(後被判處死刑),滿洲國成立,上海事變爆發,犬養毅首相被海軍軍官殺害。就在帝國主義轉變為軍國主義,人們即將沉浸在大和人的幻覺中之前,尚志將保護自己生存文化的韓國人和台灣人,以及琉球人作為「覺醒民族」作為比較,描繪了自己的困境。學生會向尚志爭辯說「與阿伊努人和韓國人爭辯認同是一種浪費」,但我們琉球人是帝國的臣民,與其他殖民地的人民不同,這正是久志所說的:「我們在生活中存活,確被別人走過的路拖著走。」而13年後,被日本拖走的沖繩到達的地步,就是沖繩戰把沖繩賣給美國的地獄。
  
久志本人為這部小說取的名字是《角落裡的悲傷》。沒錯,作為被帝國等級邊緣化的琉球人,作為被性別邊緣化的女性,作為資本主義結構中被邊緣化的下層階級,將非主流的「角落」存在視角昇華成文學。如果這位預見到當今性別和殖民主義問題的作家繼續寫作,沖繩文學的風景是否將與今天有所不同?

 

照片1 攝於 1969 年,在慶生壽宴儀式上拍攝,可以在女人的手背上看到刺青。(沖繩縣立檔案館藏)
照片2 1969年,在慶生壽宴儀式上拍攝,可以在女人的手背上看到刺青。(沖繩縣立檔案館藏)
照片3 1945年,美軍拍攝,一名婦女頭上扛著重擔在戰場上奔跑。(沖繩縣立檔案館藏)

照片4 攝於1968年,一名婦女頭上扛著重擔,在人潮中穿行。(沖繩縣立檔案館藏)

圖5 1948年美軍拍攝,一位婦女在聖所裡向土地神靈祈禱。(沖繩縣立檔案館藏)


Is the Okinawan perishing? - Listening to the muffled voice of a woman writer

TOMIYAMA Kazumi 

It was in 1932 that a novel entitled "A Memoirs of a perishing Ryukyuan Woman" was published in the famous Tokyo magazine “Fujin Koron”(婦人公論), shocking the Okinawan people. The author, KUSHI Fusako(久志芙沙子), was born in 1903 into a samurai family in Shuri, the ancient capital of Okinawa, formerly known as Ryukyu. After working as a primary school teacher, she moved to Tokyo in the 1930s, and in an attempt to make a career out of writing. She submitted a novel which caught the attention of the publisher. The original title of the novel was "Sadness in a Corner", but the publisher changed it (without a word of consultation, according to Kushi) to a title studded with scandalous words such as "perish", "Ryukyu" and "woman". The immediate reaction was from the Okinawa Prefectural Students' Association and Okinawa Prefectural People's Association in Tokyo. After reading the first article, representatives of the students' association protested vehemently against Kushi and the publisher, claiming that the novel was insulting to Okinawans, and demanded that the series be cancelled and an apology issued. The publisher responded by giving up on further publication and published Kushi's "explanatory note". Kushi then turned down her pen and closed the door on her development as a female novelist from Okinawa.

What was it about Kushi's novel that made them so enraged? Kushi certainly depicted the decadent life of the ruling class of Ryukyu, which lost its kingdom by Japan’s annexation in 1879, and with her cynical brush she portrayed the Okinawans who moved to Tokyo with dreams of success, but who lived under the colonialist gaze of Japanese society, suppressing their own spirit. The protagonist of the novel is of course Kushi's alter ego. The protagonist has an uncle who runs a successful company in Tokyo and who desperately tries to hide his Okinawan origins. He asks her to send money to his fallen family in Okinawa every month, but he doesn't even allow her to visit his office, just handing her money in the waiting room of the train station and slinking away. The last thing he said in his hometown was to say goodbye to Okinawa: "I'm doing business with a great company, and we have a lot of university graduates working there, so it would be bad for everything if they knew I was Ryukyuan.

According to Kushi, they said they were annoyed at being misunderstood as thinking that all Okinawans were like this (their claim was not documented, so we can only guess from Kushi's "explanatory note".) Certainly they were decent people who call themselves "Okinawans", and they must have taken Kushi's description as an insult to them first. Moreover, not only the uncle, none of the other men in the novel have any self-respect. Kushi relentlessly depicts a fallen man in Okinawa, living a life of self-indulgence and condemning his mother, wife and concubines to a miserable fate. 

She also cites the example of a mother who worked hard on behalf of her slothful husband to ensure that her son receives a higher education, only to be kept away because of the tattoo on her hands. Tattoo on the back of the hands were a rite of life for Ryukyuan women and an important part of their cultural and social identity. In 1899, the Japanese government issued a ban on the practice, which the women naturally resisted in secret. But some men, seeking to rise socially in civilised Japan, pushed their mothers into corners so that the Japanese would not see the 'barbaric' inscriptions on their skin. The men who had internalized imperialism were self-deceived and wanted to cut off the Okinawan symbols of 'barbarism and savagery' from themselves. The reason for Kushi’s trouble came from her pointing this out and the men were more upset knowing that it was done by a 'woman'.

Another thing that stimulated the men was Kushi's use of the word "nation". In the context of her criticism of the men who were ashamed of women’s tattoos, Kushi wrote.

"Ryukyuan intellectuals cannot be bold enough to live in Japan with their customs and habits exposed like the Koreans and the Taiwanese do.“ 

”We are a nation that needs to wake up as soon as possible, but because of our petit-bourgeois nature that is ingrained in our bones, we continue to live a day-to-day life, looking right and left and trying to make up appearances. Thus, we will live forever in the halls of history, being dragged along the path that others have ruined.”

It is significant that Kushi expressed such a "national consciousness" in Japan in 1932. In that year, the Korean LEE Bong Chang (李奉昌)threw a bomb at the Emperor's carriage (later sentenced to death), Manchukuo was established, the Shanghai Incident broke out, and Prime Minister INOUE was murdered by naval officers. Just before imperialism turned to militarism and people were about to be immersed in the fiction of the Yamato nation, Kushi portrayed the Ryukyus as a "nation that never woke up" and her own sorrow, in contrast to the Koreans and Taiwanese who defended their own lifestyle and culture. It is said that the students' association argued with Kushi, saying that they would be annoyed when she equated the Okinawan with the Ainu and the Koreans. But the idea that we Okinawan were different from other colonised peoples and were true subjects of the Imperial State was, as Kushi put it, " being dragged along the path that others have ruined.” Thirteen years later, Okinawa, dragged by Japan, ended up in the hell of the Battle of Okinawa and its sale to the United States.

The original title for this novel was "Sadness in a Corner". Exactly so, as an Okinawan marginalized in the imperial pecking order, as a woman marginalized in gender, as a poor class marginalized in the capitalist structure, Kushi tried to sublimate into literature the gaze of the existence of the "corner" that is never mainstreamed. Would the landscape of Okinawan literature have been any different if this writer, who anticipated the contemporary issues of gender and colonialism, had continued to write?

Photo 1: At a ceremony celebrating longevity, 1969. Tattoos are visible on the back of the woman's hand. Courtesy of the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2: At a ceremony celebrating longevity,1969. longevity. Tattoos are visible on the back of the woman's hand. Courtesy of the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3: A woman running on the battlefield with a load on her head, taken by the US Navy in 1945. Courtesy of the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4: A woman carries a load on her head through a crowded market place, taken in 1968. Courtesy of the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Photo 5: A woman prays to the gods of the land in a sanctuary, taken by the US Airforce in 1948. Courtesy of the Okinawa Prefectural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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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람 2021-09-07 11:40:20
왜이제라도독립하지.일본은로사는걸감사해라.중국에먹혔으면개똥됐다
14.***.***.38

제주뾱 2021-09-07 10:42:46
오키나와를, 류큐를 참 많이 좋아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시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와는 정말 다르구나 싶다.
비록 친일파 척결을 못해서 지금도 친일파들이 기세 등등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내 조국을 잃지 않기 위해, 고관백작들이 나라 팔아먹는 동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민초들이 나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이름없는 백성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피로 지켜내어 물려주신 내 나라다.
류큐는 왜 이리 무기력 했나.
안타깝다.
오늘도 내가 누리는 이 한글과 대한민국 국적, 500년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나라에 감사드린다.
5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