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14)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이종인 역, 흐름출판, 2018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이종인 역, 흐름출판, 2018. 사진=알라딘.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이종인 역, 흐름출판, 2018. 사진=알라딘.

1. 삶을 바꾸는 도구: 언어

어김없이 추석이 돌아왔다. 그리고 단톡방마다 보름달이 그려진 그림과 더불어 즐거운 추석을 보내라는 인사가 도배되기 시작한다. 나 역시 그 그림 중 하나를 복사해서 다른 단톡방에 붙여 넣지 않을 수 없다. 명절이니 당연히 덕담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체로 하는 덕담은 하고 나서도 내가 상대방의 안녕을 진심으로 기원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명절이라는 관습은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음식을 나누며, 서로 좋은 말을 해야 하는 의례적 절차로 이루어진다. 왜 이런 관습이 끈질기게 전승되고 있는 것일까?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누군지도 모르는 죽은 자들과도 대면해야 하며, 부당하게 배분된 강요된 노동과 교통체증에 시달려야 하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집안 어르신의 덕담을 가장한 취조(취직은 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낳았는지, 아파트는 장만했는지 등등)에 응해야 한다. 이 모든 행사가 무사히 끝나고 파김치가 된 심신을 추스를 수 있다면 매우 화목한 가정이라 할만하다. 통계적으로 명절이후 가정폭력과 이혼율이 증가한다는 뉴스를 보건대 적지 않은 가정에서 강요된 노동은 폭력으로, 선의의 덕담은 고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절을 전후해서 인터넷 게시판에는 고통을 호소하는 글들이 으레 등장하고, 차례를 지내는 대신 외식을 하고 여행을 가는 풍속이 생기기도 했지만, 명절의 관행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각종 부작용을 능가하는 강력한 밈(meme)이 존재하는 듯하다. 불편과 노고, 때로는 굴욕을 감내하면서, 죽은 사람을 포함해서 가족이라고 일컬어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명절은 아마도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연히 멋대로 추정해 보건대 명절의 관행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며, 한 해에 몇 번만이라도 그 관계가 여전히 유효하며 의미 있는 것임을 상기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이어지는 것 같다. 문제는 그 관계가 서투른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 오히려 위협받는데 있다.  명절의 관행에서 오는 부작용은 부차적인 것이다. 

말로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고 전달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필자의 경우, 가족과의 대화는 오해와 심한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튀어나오는 어이없는 단어들은 그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마저도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적절한 말을 통해 내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삶의 고통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다면 명절의 관행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사소하게 여겨질 것이다. 

추석의 덕담은 취직이나 결혼 따위를 했는지 묻기보다 추억을 공유하고, 그 사람이 나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내가 그 사람의 삶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말하기의 방법을 익히지 못한 필자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워 보이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제로 여겨진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로티는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뉘앙스를 철저히 박탈하고 하이데거의 그 말을 ‘언어가 세상과 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도구’라고 해석했다. 언어는 타자의 고통을 새로운 은유로 서술함으로써 사회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에 나서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재서술함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드는 도구이기도 하다. 나의 삶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재서술될 수 있다. 추석의 언어는 그 관계를 더 좋게도 나쁘게도 만들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2.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이종인 역, 흐름출판, 2018)는 내용만 보면 진부한 베스트셀러이다. 필자가 구입한 책이 2018년 판인데 2년 만에 국내에서 70쇄를 찍었다. 이 정도면 새삼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읽을 사람은 알아서 읽었다는 이야기다. 책의 내용은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촉망받는 젊은 의사가 자신이 죽기까지의 과정을 글로 쓴 것이다. 시한부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영화, 소설, 자기계발서는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부분 감동적이며 동시에 진부하다. 이 책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자아내고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책의 뒤표지에 실린 유명 인사들의 추천사를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감동적이며 진부한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다소 엉뚱한 데 있다. 이 책의 저자가 필자가 전공한 리처드 로티의 지도로 스탠포드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로티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에 적용했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지만 막상 저자가 로티에 대해 직접 언급한 대목은 길지 않았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운이 좋게도 스탠퍼드 대학원의 리처드 로티 교수에게서 배웠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는 그의 지도를 받으며, 모든 학문 분야란 인간의 삶을 특정 방향으로 이해하는 일련의 도구, 즉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위대한 문학 작품은 나름의 고유한 도구들을 독자에게 쥐어주며 그 어휘를 사용하도록 이끈다.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나는 월트 휘트먼의 작품을 연구했다. 한 세기 전의 시인인 그는 나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고, 그가 ‘생리적, 영적 인간’이라고 부른 존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62쪽)

필자는 그가 로티를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는’이라고 쓴 대목이 마음에 들었다. 로티는 미국의 분석철학자들로부터는 철학을 배신했다는 욕을 듣기도 했고, 국내에서는 상대주의자라는 무의미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철학적 관점이나 방법론의 적절성 유무를 떠나서 로티를 읽다보면 그가 무미건조한 분석철학의 논증으로부터 잊혀진 중요한 삶의 문제를 상기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여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물음으로서,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95쪽)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자가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105쪽) 

그는 로티가 던지는 물음의 중심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문제의 한 가운데로 던져졌다. 그가 바랐던 것은 아마도 환자의 죽음을 관찰하는 의사의 위치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면서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전력을 다해 묻고 촉박하게 답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로티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인간의 삶을 특정 방향으로 이해하는 일련의 도구, 즉 어휘를 만들어내는” 일에 매진한 것이다. 그는 체력이 닿는 한 의사의 직분을 수행하는 한편, 글쓰기에 매달렸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서술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불어넣고자 했다. 그는 두부손상으로 언어 능력을 잃은 환자를 대할 때 그 환자를 살리겠다는 의욕이 크게 저하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면서 “언어 없는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136쪽)라고 쓰고 있다. 

언어는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연결시킨다. 덧없는 삶의 의미는 또 다른 덧없는 삶과의 연관 속에서 만들어진다. 저자가 어떤 의미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애썼다는 사실에 감동과 위안을 얻었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와 의사직을 약속받은 촉망받는 젊은이의 죽음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우리도 언젠가는 ‘누군지도 모를 죽은 자’가 되어 다른 누군가를 대면하게 될 것이다. 명절의 ‘덕담’이라는 밈은 그런 덧없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서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는 한 해의 이벤트일지도 모른다.

# 이유선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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