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삶의 근원을 생각한다”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가을걷이가 시작되어 모든 것이 풍성해지는 시기이다. 이 때쯤이면 멀리 떨어져 살던 친척과 친구들도 추석 명절을 쇠러 고향을 찾게 되어 모두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도 생겨났고, 장사하는 이들에게는 한가위가 목돈을 쥘 수 있는 대목 중에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의 한가위는 그렇지 못했다. 코로나19 추석특별방역대책으로 가족모임도 최대 8명까지만 모일 수 있어서, 가족끼리만 명절을 쇠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17일 새벽에 불어 닥친 제14호 태풍 찬투가 물폭탄을 퍼부으면서 가을농사를 준비했던 농부와 대목을 기대했던 상인들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부차원의 월동채소 대책이 마련되고 재난지원금이 시장에 풀려 농부와 상인들의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기를 기대한다.

한가위를 맞아 고향에 대해서 음미해보았다. 정지용의 시는 고향이 어떠한 곳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그렇다. 고향은 단순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장소가 아니라 당시의 추억이 깃든 곳이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부병사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를 다듬어 만들었다는 흑인영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본향이로다. 내 상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그 누런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더 정다운 곳 없도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이 몸이 다 늙어 떠나기까지 그 호수가에 놀게 하여주. 거기서 내 몸을 마치리로다. 미사와 마사는 어디로 갔나. 찬란한 동산에 먼저 가셨나.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곳에. 나 어서 가서 쉬 만나리로다.”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잘 그려낸 이 노래는 흑인들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 되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자란 곳이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시골에서 태어난 많은 이들이 타향살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태어난 2세들은 부모의 고향을 자신의 본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들 역시 고향이라 찾아갔건만 길도 건물도 산천도 많이 변해서 예전 같지 않고, 어릴 적 친구나 친지들도 제 살기에 바빠서 예전처럼 살가울 수가 없다. 추억이 서린 곳이 사라지고, 같이 놀던 옛 친구와 이웃들이 없는 곳은 더 이상 고향이 될 수 없다. 현대인들에게 태어난 곳은 있지만 고향은 없다. 옛 추억을 공유할 장소와 사람이 없기에 현대인들은 늘 그리워하면서 간절하게 돌아가고픈 곳도 없다.

명절이라고 어렵사리 고향을 찾았건만, 어릴 적에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즐겨 놀던 곳도 찾지 못한 채 차례가 끝나자마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서둘러 고향을 등지게 된다. 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은 그나마 명절이나 벌초를 계기로 고향을 찾아 잠시나마 회포를 풀고 향수를 달랜다. 하지만 타지에서 태어난 이세들에겐 그런 계기도 없기 때문에 굳이 그곳을 찾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들이 그곳에 조부모나 외조부모가 계시거나 부모형제끼리 화목해서 혈연의 정을 느낀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곳을 자신의 본향이라 여기지 않는다. 이세들에겐 부모의 고향은 단지 낯익은 낯선 곳이 될 따름이다.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에서 바라본 범섬. ⓒ제주의소리.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에서 바라본 범섬. ⓒ제주의소리.

인간은 자신의 뿌리와 근원이 있는 고향에 거주해야 한다. 하지만 고향에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행운을 타고나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난 이들은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찾으려 하며,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한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 의미에서 고향에 머물고자 하는 충동, 즉 향수병이 있다. 하이데거는 고향은 ‘존재 자체의 근저’ 또는 ‘근원에 가까운 곳’이고, 귀향이란 ‘근원의 가까이로 돌아가는 것’이며, 철학이란 ‘존재의 진리’가 훤히 드러나는 곳으로 귀향하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그의 존재론을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뿌리와 근원을 찾고 머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삶의 근원을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거주하고 싶어 하고, 언젠가는 그 곳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곳이 어디든 정겹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다면 사람들은 마음의 고향으로 삼을 것이다. 자연은 모든 인간의 본향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생명은 바다에서 출현했고, 인간은 숲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푸름과 초록은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색이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는 가장 친숙한 소리이다. 우리가 푸른 바다와 초록 숲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고 자유와 평화와 안온을 느끼는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다.

세계 어디를 가든 야생의 자연이 잘 보전된 곳은 품격 있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도시 속에서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시간만 나면 푸른 바다와 울창한 숲을 찾아 나선다. 그런 곳 중 하나가 남미의 코스타리카이다. 이 나라는 군대가 없고, 국토의 25퍼센트가 자연 저 그대로 잘 보전된 국립공원이다. 온 국토가 살아있는 평화공원이요 야생동식물원인 셈이다. 세계인들은 그곳에서 평화를 배우고 생태를 체험한다. 현존하는 천국 있다면 그곳이 아닐까 싶다. 관광과 농업이 주산업인 코스타리카는 삶의 만족도도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중남미에서 1인당 소득이 가장 높고, 문맹률도 가장 낮다. 우리와 문화 환경이 달라서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평화를 사랑하고 생태와 환경을 잘 보전하면서 지속가능한 관광으로 삶의 질을 높여가는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제주도가 감당할 수 있는 환경수용량을 넘어설 정도로 이미 상당한 개발을 하였다. 개발도 성장도 지속가능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제주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야 한다. 제주도의 생태, 경관, 지질이 빼어나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 이로써 세계인의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갖춘 셈이다. 제주도가 우리 후세들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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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상실한 현대인들의 고향이 되려면 우선 생태와 환경이 잘 보전되어야 한다. 오늘날 선진국의 기준은 국민총생산(GDP)이 아니라 그 나라의 생태환경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정부에서 생태보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하는가를 보고 가늠한다.

생태와 환경을 잘 지키자는 것은 원시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생태와 환경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제주도를 살리는 길이다. 제주도가 생태와 환경을 잘 보전한다면 도민과 국민뿐만 아니라 품격 있는 세계시민들이 즐겨 찾는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제주경제도 살고 우리 도민들의 삶의 질도 함께 높아질 것이다. / 윤용택 논설위원·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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