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15) 자오지엔민, ‘죽림칠현-빼어난 속물들’, 곽복선 역, 푸른역사, 2007

자오지엔민 저, ‘죽림칠현-빼어난 속물들’, 곽복선 역, 푸른역사, 2007. 사진=알라딘.

제목이 도발적이긴 한데, 사실 지식인知識人이란 말은 박래품舶來品인지라 낯설기도 하고, 오해의 여지가 있기도 하다. 오히려 선비나 사인士人, 학자,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문인사대부 정도가 오히려 가깝게 느껴진다. 인텔렉추얼(intellectual)이나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이라는 말이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저 인텔리라는 말로 대응했을 뿐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했다. 유식자有識者나 지식인이란 말은 나중에 나왔다.

언어는 역사나 사회, 또는 시대의 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뿌리가 박힌 토양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신여성을 인텔리 여성이라 불렀는데, 당시 여성운동의 한 축이었던 그들에게 ‘인텔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들이 신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조류에 힘입어 진보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이지 제정러시아 시절 인텔리겐치아처럼 지식노동에 종사하거나 혁명적 사고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드레퓌스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밝힌 「나는 고발한다」의 작가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드레퓌스 구명운동에 참여한 앵텔렉튀엘(intellectuel)과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서구의 인텔렉추얼이나 인텔리겐치아와 실질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뿌리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전통이 되어 문화적 혈맥으로 이어져왔다는 뜻이다. 다만 전통적인 선비와 지금의 지식인이 적절하게 융합되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따름이다. 

빼어난 속물들?

오늘 이야기할 책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죽림칠현은 대략 삼국 위魏나라 정시正始 연간(240~249년)에 혜강嵇康(223~262년)의 고향인 하내군河內郡 산양山陽(지금의 하남성 초작焦作시 북부)의 대숲에서 가끔씩 만나 “淸談(동한 말기 인물이나 시사 비평인 청의淸議에서 시작하여 위진대에 현학을 주제로 행한 담론)을 주고받으며, 속세에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일곱 명의 현자”(5쪽)를 말한다. 핵심 인물은 혜강과 그의 벗인 산도山濤(205~283년)와 완적阮籍(209~263년)이며, 그들의 추천으로 상수向秀(227~272년)와 완적의 조카 완함阮咸(생졸 미상), 유령劉伶(생졸 미상), 왕융王戎(234~305년) 등이 나중에 합류했다. 제일 연장자인 산도와 제일 어린 왕융은 거의 30년이나 차이가 있으니 위진魏晉의 격변기 속에서 시대 배경은 물론이고 이에 따른 삶의 형태 또한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혜강, 완적, 산도, 왕융 등은 역사 자료가 충분하지만 상수의 전기는 단지 아홉 줄에 불과할 정도로 짧고 완함과 유령은 생졸 연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죽림칠현을 전체적으로 연구한 성과가 왜 샛별 보듯이 적었는지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14쪽)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번역본의 제목은 ‘죽림칠현 - 빼어난 속물들’이다. 원저와 달리 ‘빼어난 속물들’이라는 부제를 단 까닭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반영했기 때문인 듯하다. 

“어떤 이들은 죽림칠현을 탈속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속된 구석이 많았으며, 또한 각기 서로 다른 속물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가장 귀중한 유산은 스스로 속됨을 멸시하고, 속됨을 깨뜨리고, 속됨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정말 슬픈 구석은 속됨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낙망해 길을 헤맸지만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로 속됨과 다시 어울리게 되었다는 점이다.”(11~12쪽)

마지막 부분은 진서·완적전에 나오는 한 대목을 생각나게 한다. 

“때로 마음 내키는 대로 홀로 수레를 타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났는데, 길이 막히면 문득 한참을 통곡하다 돌아오곤 했다(時率意獨駕, 不由徑路, 車迹所窮, 輒慟哭而返).”

은자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인가? 

하지만 필자는 부제에 대해 반쯤은 동의하고 나머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빼어남’에 대해 동의한다. 그들은 당대의 주목 받은 명사들이었다. 그 까닭은 학문(현학과 시문)에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풍도風度(풍채와 태도)가 군계일학群鷄一鶴인지라 숱한 파격破格과 일탈逸脫조차 미명美名의 자양분이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물俗物이란 말은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완적이 왕융을 속물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기는 하다. 완적은 왕융이 비록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현학에 밝고 행동거지가 남다른데다 무엇보다 함께 술을 마시기에 좋은 친구라 여겼기 때문에 그를 죽림에 초대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의 속내가 출세에 있음을 알아채고 기탄없이 속물이라 내뱉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산도와 마찬가지로 고위관리가 되었다. 진대晉代(265~420년)에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삼공三公의 반열에 오른 이가 전체 27명이었는데, 산도가 한 번, 왕융은 두 번씩이나 그 자리를 차지했다. 죽림칠현 사후 100여 년이 흐른 뒤 남조 송나라(유송劉宋) 시인 안연지顔延之는 죽림칠현 가운데 다섯 명만 쏙 빼내 「오군영五君詠」이란 시를 지었다. 빠진 이들은 산도와 왕융인데, 그 까닭은 높은 관직에 올라 귀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쎄? 고관이 되었다고 모두가 속물인가? 한 걸음 물러나 왕융은 그렇다 치고 혜강이나 완적까지 싸잡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속물이라면 눈을 까뒤집을 정도로 진저리쳤던 백안시白眼視의 주인공 완적을 어찌 속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은자隱者란 세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위도식하는 자가 아니다. 

사仕와 은隱

공자가 논어·태백泰伯에서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갈 것이고, 도가 없으면 숨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나, 「위령공衛靈公」에서 거백옥蘧伯玉을 군자君子라고 칭하면서 “군자로다.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입사入仕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곧 물러나 자신을 감춘다.”라고 한 것을 보면 사士, 즉 지식인의 거취가 한 나라에 도가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는 무조건 입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은일隱逸을 지향할 수도 있게 된다. 은隱은 유사儒士에게 적극적인 의사 표시라는 말이니, 유사에게 있어 사仕와 은隱은 자신들의 지향으로 볼 때 결코 다른 것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맹자 역시 「진심상盡心上」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선비는 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영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 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사는 자신의 지조를 지키는 것이고, 영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나니,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선하게 하는 것이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물론 위진魏晉 시대에 노장사상이 승하고, 현학이 시대의 조류가 되었다고 하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사인이었다. 특히 대표적인 인물인 완적과 혜강 등이 처음부터 노장老莊의 허무주의와 현학玄學에 심취하여 속세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위궐魏闕에 몸담았다. 혜강은 조조의 증손녀인 장락정주長樂亭主를 처로 맞이했고 비록 실권은 없다고 하나 중산대부中散大夫에 배수되기도 했다. 완적은 하마터면 사마소司馬昭의 아들인 사마염司馬炎을 자신의 사위로 삼을 뻔 한 적이 있다. 이렇듯 “본디 세상을 구하겠다는 뜻이 있었으나 위진 시대에 천하에 변고가 많아 명사들 중에 온전한 이들이 적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세속의 일에 관여치 않았고 마침내 음주를 일상으로 삼았을 따름이다.”(진서·완적전) 

문제는 세상에 도가 없어 마땅히 은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세태, 권력, 그리고 시대이다. 사인의 노릇하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과연 지금의 지식인은 어떠한가? 

죽림과 칠현 

죽림칠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나무 숲에서 노자나 장자 책을 끼고 청아하고 고상한 이야기(청담)이나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며 한 평생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았던 이들일 것이다. 사실 남조南朝 시대 무덤의 벽돌의 그림을 모아 만든 「죽림칠현과 영계기榮啓期」나 당대 손위孫位의 「고일도高逸圖」, 명대 구영仇英의 「죽림칠현도」, 청대 냉매冷枚의 「죽림칠현」 등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시대는 유유자적이 불가능한 시절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유유자적할 여유가 없었다.

잠깐 샛길로 빠진다면, 때로 중국이 가까운 이웃이고 오랜 문화적 유대관계가 있기는 했으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삼국지는 천만 베스트셀러로 수많은 이가 읽었으니, 제갈량이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렸다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자꾸만 출사표를 던진다고 말한다. 특히 국회의원이나 기자 양반들께서 이런 말을 자주하는데, 표를 던졌다가는 즉살卽殺당할 수도 있을 게다. 표表란 신하가 군주에게 올리는 글, 즉 문체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처음부터 그들을 일러 죽림칠현이라고 한 것은 아니고, 동진東晉 손성孫盛이 쓴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처음 나온 후 진서·혜강전, 세설신어世說新語·임탄任誕에서 그리 불렀을 따름이다. 

하여 과연 혜강의 집 근처에 죽림이 있었는지 의심스럽고, 혜강의 집에 들고난 이들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 왜 굳이 일곱이라 했는지도 궁금하다. 진인각陳寅恪 선생은 일곱은 논어·헌문憲問에서 “세상을 떠나 숨어 산 사람으로 일곱 명이 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또한 하내군 일대에는 대나무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불교의 죽림정사竹林精舍라는 말에서 죽림을 따와 붙인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되 전설은 본래 이렇게 만들어지는 법이다.

대나무 숲의 대장장이

분명한 것은 결코 아무나 죽림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유가와 도가의 학설을 버무려 위진 현학을 창시한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도덕론, 무위론 등을 저술하고 논어집해의 공동저자이기도 한 하안何晏(?~249년)과 현묘하고 난해한 三玄(노자, 장자, 주역)의 주석서를 쓰고 현학을 창도하다 24세에 요절한 천재 왕필王弼(226~249년)(이들을 정시명사正始名士라고 한다)이 세상을 떠난 후 현학의 중심은 죽림칠현으로 옮겨갔다. 고조부 종호鍾皓는 한말 정치가, 부친 종요鍾繇는 위나라 건국을 도운 정치가이자 왕희지와 함께 거론되는 서예가. 종회種會는 이렇듯 누대로 고관대작의 집안에서 태어난 금수저인데다 현학은 물론이고 유학에도 통달하고 탁월한 통찰력에 다재다능하여 풍류까지 즐길 줄 아는 당대의 명사였다.

그런 그가 혜강의 대숲을 찾아왔다. “좋은 옷을 입고 살찐 말에 높이 앉은 종회는 수많은 종자와 손님을 대동하고 호기롭게 왔다.” “하지만 혜강은 그들이 온 것을 모르는 체 자기 일에만 몰두해 쇠를 계속 두드려댔다. 잠시 그 앞에 서 있던 종회는 주인의 무례함에 화가 치밀어 발걸음을 돌리려했다. 종회가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혜강이 동작을 멈추고 툭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무엇을 들었기에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보았기에 돌아가는가?”
“들은 것을 들었기에 이곳에 왔으며, 본 것을 보았기에 돌아간다.”(57쪽)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이로 인해 혜강에게 깊은 원한을 가졌으며, 결국 혜강이 사마소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지식인이 어찌 군자만 있겠는가? 소인은 그보다 천 배는 많다. “시대에 영웅이 없으니 어린아이(잔챙이)가 이름을 날리는구나(時無英雄, 使豎子成名).”(190쪽) 완적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와 ‘정치적’의 차이

고대 지식인을 우리는 사士라고 부른다. 선비라고 풀이하면 문사文士에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원래 사는 병사兵士나 방사方士, 장사將士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나라 시절 귀족이긴 하되 식읍이 없는지라 오로지 자신의 재능을 길러 이를 팔아먹고 사는 이가 바로 사이다. 지금의 지식인 역시 지식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니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공자가 ‘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후 유가에 의해 정립된 사관士觀은 남다른 데가 있다. 설왕설래하면 장황해질 수 있으니 한 마디만 한다면, 송대 범중엄이 「악양루기」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싶다.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 이것이야말로 박래품인 지식인이 토종 선비와 만나는 접점이 아닐까? 예전처럼 사인, 즉 지식인이 모두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인에게 사람과 사회, 그리고 나라에 대한 근심은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식 소매상이나 전도사와 다른 점이다.  

참고로 죽림칠현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 책 외에  루쉰魯迅의 이이집而已集·위진풍도와 문장, 약과 술의 관계(魏晉風度及文章與藥及酒之關係)(루쉰전집5권, 그린비출판사),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살림출판사) 등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다. 역서는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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