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대통령의 약속, 국가의 존재이유 새겨야

70여년 전 4.3 군사재판의 불법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살인적 취조와 고문을 가한 뒤 이름만 호명하는 식의 재판은 졸속 그 자체였다. 2019년 이후 4.3 관련 재심에서 예외없이 공소기각 또는 무죄 판결이 난 것도 당시 재판의 불법성을 뒷받침한다. 이 점에서 4.3특별법 개정 과정에서 유족들이 줄기차게 군사재판의 무효화를 주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군사재판의 무효화는 4.3수형인들이 단 한명도 배제되지 않고 누명을 벗을 가장 확실하고도 근본적인 처방이었다. 연고자가 없거나, 개별적으로 재심을 청구할 여력이 없는 경우까지 감안한 최선의 명예회복 방안이었다.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인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이 국회의원 시절 국가기록원에서 발굴한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이 올라 있었다. 

“진실의 바탕 위에서 4.3피해자와 유족의 아픔을 보듬고
삶과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국가의 책무입니다”

“부당하게 희생당한 국민에 대한 구제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본질적 문제입니다”

작년 4.3때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는 유족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국가의 존재 이유까지 소환해가며 명예회복이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군사재판의 무효화는 사법부 권한 침해라는 논리에 부닥쳤다. 당시 행정안전부는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개개인이 형사소송법에 따른 재심 제도를 활용하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일각이 여삼추인 고령의 당사자들로선 땅을 칠 노릇이었다. 4.3수형인들이 천신만고 끝에 재심을 거쳐 하나둘 낙인을 지워가던 시기였다. 

대안으로 특별재심이 등장했다. 올 2월 국회를 통과해 6월24일부터 시행된 4.3특별법 개정안에 특별재심 조항이 담겼다. 서로 한발씩 물러선 타협의 결과였다. 유족들 입장에서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일괄재심이 이뤄지리란 기대 속에 군사재판 무효화 요구를 거둬들였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4.3특별법 개정으로 4.3수형인들에 대한 특별재심의 길이 열렸으나 법무부가 일괄 재심에 난색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유족들이 반발하고 있다. 유족들은 법무부가 특별법 제14조에 명시된 ‘희생자’를 신고주의에 입각해 해석할게 아니라 수형인 명부에 등재된 수형인들을 일괄적으로 재심에 부쳐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그렇게 정리된 듯 했으나,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번에는 법무부가 일괄재심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는 정부에 의해 ‘희생자’로 결정된 수형인만 재심 청구가 가능하다는 ‘선별 재심’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럴 경우 수형인 명부에 올라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가족이 몰살돼 희생자 신고 자체를 하지 못한 수형인은 재심 대상에서 빠진다. 그 인원이 6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로부터 희생자로 인정받으려면 누군가의 신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익히 봐왔듯이 설사 피붙이가 있다고 해도 후환이 두려워 신고를 꺼리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4.3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크고도 깊었다. 실제로 올해 4.3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추가신고를 받은 결과 총 3만2615명이 접수했다. 7번째 추가신고인데도 이 정도였다. 이중 수형인은 43명이다.  

접수된 신고는 면담조사와 사실조사, 4.3실무위원회를 거쳐 4.3중앙위원회 심의에 부쳐진다. 언제 희생자로 인정될지 ‘희망 고문’의 기간을 가늠할 수 없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여동안 4.3중앙위는 단 한차례 밖에 열리지 않았다. 4.3특별법에 특별재심 조항을 넣은 것은 바로 이같은 ‘시간과의 싸움’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이번 특별법 개정으로 1948년과 1949년 당시 군법회의로 수형인이 되었던 이천오백서른 분이 일괄 재심으로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렸습니다”

“가족을 잃고, 명예와 존엄, 고향과 꿈을 빼앗긴 이천백예순두 분의 특별재심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4.3추념식장을 찾은 문 대통령은 분명히 ‘일괄 재심’이라고 했다. 추념식 전날 제주지검을 방문한 박범계 법무부장관도 “일괄재심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법무부가 이제와서 선별 재심을 운운하는 것은 대통령의 약속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일반재판 수형인도 재심을 통해 다들 무죄판결을 받는 마당에 더 이상 ‘선별’이란 말은 무의미해졌다. 

70여년을 한을 품고 살아온 수형인들이 마지막 염원을 풀 순간에 “신고부터 하고오라”는 건 예의가 아니다. 다소 심하게 말하자면, 국가공권력의 잘못으로 형을 살고 나온 사람에게 말년이 되어서 ‘억울함을 풀려거든 스스로 증명해 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디 법무부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하는 비정상의 상황을 자초하지 않길 바란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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