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43) 일하는 사람은 앉아서 노는 사람의 종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기는 놈 :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활동하는 사람
* 앚인 놈 : 앉은 사람.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

일하는 사람과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눈이 시뻘겋게 일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은 하지 않고 또 일에 관심을 갖지도 않고 실실 떠돌아다니며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있다.

놀고 지내는 사람은 따지고 보면, 일하는 사람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일밖에 모르고 사는 사람은 일 안 하는 사람의 종으로 내어나 그들의 종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일하면서도 그 일의 대가로 잘살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말로 들린다. 뼈가 빠지게 일하는 데도 결국 남 좋을 일을 하고 있으니, 오직 한심하고 억울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참 고르지 못한 게 세상이다.

뼈가 빠지게 일하는 데도 결국 남 좋을 일을 하고 있으니, 오직 한심하고 억울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참 고르지 못한 게 세상이다. 사진=픽사베이.
뼈가 빠지게 일하는 데도 결국 남 좋을 일을 하고 있으니, 오직 한심하고 억울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참 고르지 못한 게 세상이다. 사진=픽사베이.

‘기는 놈’이란 표현에는 눈만 뜨면 정신없이 일을 한다는 부지런함의 뜻이 들어있으면서. 마치 ‘맨땅바닥을 박박 기듯이’라는 비유가 담겨 있다. 죽자 살자 일을 해도 남을 위해 하는 노역(勞役)에 지나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가슴 아픈 생각, 곧 자괴감(自愧感)에서 한숨 속에 새어 나오는 자조(自嘲) 섞인 목소리다.

노동의 고충과 공정하지 못한 인생살이를 하염없이 실토하고 있다.

이래서 팔자타령도 나오는 것일 테다. 누구는 양복에 백구두 신고 이곳저곳 떠돌며 좋은 음식에 아리따운 여자를 끼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소일하며 지내는데, 자신은 농촌에 박혀 어려운 농사로 뼈가 부서지게 일을 하는데도 늘 살림 형편 궁색함을 면할 길이 없으니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말이다. 수원수구(誰怨誰咎)라,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것인가.

궁리하던 끝에 점을 쳐 보기도 하고 심방(무당)을 불러다 축원을 하거나, 하다못해 사주 관상에 앞선다는 이름 덕에나 살아볼까 해 작명가를 찾아가 개명(改名)까지 하는 건 아닌지 모른다. 거기서 무슨 방도가 나오겠는가. 다 헛수고요 허망한 일이다.

사람이 한 번 그런 신세가 되고 보면 빼도 박도 못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것도 유분수가 아닌가.

‘기는 놈은 앚인 놈의 종인다’ 신세가 서러웠으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요즘 세상이라고 다른가. 평생 극한 직업에 시달려도 집 한 칸 제대로 장만하지 못하고 살면서 그나마 가슴 한 번 펴지 못한 채 고개 숙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좀 많은가. 특히 도시 서민들. 그러니 그들의 삶을 온전한 자신의 삶이라 할 수 없을 게 아닌가.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