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쉰 두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우리나라 3대 박사 마을로 유명한 곳은 전북 임실의 삼계면과 강원도 춘천의 서면, 그리고 경북 예천의 호명면이다. 이 중에서 전북 임실군 삼계면은 2014년까지 배출된 박사 숫자만 157명이다. 전국 면 단위에서 최다 박사 배출 마을이다. 

삼계면 박사골 마을의 유례를 살펴보자. 오수에서 순창 방면으로 국도 13호선을 약 7km 달리면 면소재지가 나온다. 삼천(三川)인 뇌(磊)천, 유(柳)천, 후(後)천의 유역, 또는 삼계(오수천, 율천, 사매천)의 하류라 하여 삼계(三溪), 즉 세 개의 시내가 흐르는 곳이라고 삼계면이라고 했다. 삼계면 마을에 박사 출신이 많은 이유는 조선시대 때 무오사화(1498년) 등을 피해 낙향한 유학자와 경주 김씨, 청주 한씨, 풍천 노씨, 양천 허씨 등 선비 가문이 많은 데다 향학열이 남달리 높았기 때문. 

삼계면 주위 산세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적으로 붓 모양의 산봉우리인 문필봉(文筆峰)이 마을을 둘러쌓고 있어 인재가 많이 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붓과 같은 필봉(筆鋒)이 많아 학자·박사 배출 양택(陽宅)의 명당(明堂)이라는 게 양동주 대구한의대 대학원 겸임교수의 말이다. 

임실 박사골 마을의 본래 이름은 세심(洗心)마을로 씻을 세(洗)와 마음 심(心) 자를 쓰는데, 이를 풀이하면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 된다. 이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으로 세심천이 유유히 흐르는 박사골 세심마을이 그 누구든 쉬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씻는 깨끗한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박사골 마을 세심천 앞에는 조선시대의 학자 양돈을 기념하는 광제정(전북도 지정 문화재자료 130호)이 있는데 이는 박사골 마을이 얼마나 유서 깊은 선비들의 마을 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박사골 마을은 유서 깊고 깨끗하며 전국적인 축제가 열리는 작지만 알찬, 선비정신이 흐르고 있는 마을이다. 

삼계면 정각골에 전해지는 유래가 있다. 이곳을 지나가던 한 나그네는 땅을 치며 “이 자리가 바로 내가 찾는 명당 중에 명당이로다”하며 기뻐하다가 어디론지 가버렸다. 정 씨는 그 자리를 유심히 보아 두었다가 이 곳에 몰래 자기 아버지 장사를 지내버렸다. 장사를 지낸 바로 그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노라” 하였다. 이후 정씨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10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가슴 밑에 날개가 달린 아들이었다. 부부는 걱정이 되면서도 열심히 정성 들여 기르기를 10년. 어느 날 한 도승이 나타나 “나에게 아들을 3년만 맡기라. 콩 한말과 팥 한말을 같이 주되 잊지 말고 3년을 꼭 기다리라. 그러면 대장군이 되리라”하며 아들을 데리고 가기에 정씨는 살며시 뒤쫓아가보니 이 도사는 왕지골 바로 밑으로 내려가 임금 왕(王)자가 새겨진 돌을 손으로 치니 바위가 갈라지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에 정씨의 부인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 앞 벽 옆에 소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매일매일 물을 주며 3년의 날짜를 꼽기 시작하였다. 날이 가고 해가 가 어언 3년이 지났다고 생각한 정씨 부인은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안타깝고 초조한 나머지 석수장이를 데려다 아들을 구해야 된다고 바위를 깨기 시작한지 며칠, 마침내 바위가 갈라지면서 핏물이 쏟아져 나오더니 내(川)를 이뤘다. 안을 들여다보니 콩은 사람이 되고, 팥은 말이 되어 무술(武術)을 익히는 중이었다. 아들은 울부짖으면서 "7일, 왜 7일만 더 참지 못하였습니까?"하는 말을 남기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 버렸다. 정씨 부부는 아들을 기다리는 조급한 마음에서 날짜를 잘못 헤아려 아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전북 임실군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복 받은 땅이다. 면적 597.03㎢, 인구 3만명의 작은 군이지만 어디를 가나 산천이 아름답다. 섬진강 상류로 관광 입지가 좋고 특색 있는 먹거리도 풍성하다. 임실을 에워싼 성수산(876m)과 회문산(775m), 백련산(754m) 자락은 빽빽한 삼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경지가 적어 낙농업과 고랭지 농업이 발달했다. 비옥한 토질, 일조량이 많은 지형, 큰 일교차는 '열매가 튼실하게 영그는 동네'라는 임실(任實)의 지명에 걸맞게 어떤 작물을 재배해도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고추와 복숭아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특산물이다. 명당도 많다. 고려 왕건과 조선 이성계가 성수산 상이암에서 기도하고 건국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다. 양동주 박사의 말을 더 들어보자.

전북 임실군 삼계면은 노령의 지맥이 서편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고 섬진강 상류가 동남간 연계를 흐르고 있어 옛 선인들이 지형적으로 생거남원, 사거임실을 주장해 온 것도 명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인구는 감소하여 겨우 1700여명에 불과한 조그마한 산골의 면으로 전락했지만 한창 잘 나가던 때는 무려 1만6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자연 자원으로 후곡천, 세심천, 정각골, 귀목나무, 세심휴양림, 죽계댐, 임실치즈체험스쿨 등이 자리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역사적 문화자료는 광제정, 노동환가옥, 학정리석불이 자리하고, 박사관을 건립하고 만취정을 복원하여 문화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삼계면 세심리와 학정·죽계·후천·봉현·덕계·두월리 등은 예전부터 박사(博士)를 많이 배출해 지난 2005년부터 아예 마을 이름을 박사골 마을로 바꿔 부른다. 배출한 박사 중에서 제1호는 누구일까? 그는 일제 때 일본 동경에 유학, 약학(藥學)을 전공하다가 광복 후 귀국,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학장까지 역임한 심길순 박사로 알려져 있다. 박사골에서도 박사로 이름 난 집안은 삼계면 후천리에 있는 6박사집. 삼대에 걸쳐 모두 6명의 박사가 나와 붙여진 이름이다. 전북대 명예교수인 노상순 박사를 비롯 4명의 아들(노덕환 군산대 경영학과교수, 노도환 전북대 공대교수, 노승환 한국원자력연구소, 노방환 전북대 공대교수)과 장조카(카이스트) 등 6명이 박사학위자다. 때문에 외지 체험객들이 박사의 기를 받는다며 6박사집에서 민박요구가 쇄도함에 따라 옛 주택을 리모델링해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40년 전 노상순 전북대 학장을 처음 뵀을 때, 고향이 제주라니 ‘이 교수는 전주 이씨 왕손 후손이라, 건지산 이한(李翰) 선대를 매일 참배하게, 350년 전에 선대가 제주로 귀양을 간 것 아닌가’라고 필자에게 조언했다. 2000년 일본 니가다 대학에 연구 교수로 갔을 때 일인데 지리산 함양  출신 양성채 전기공학박사를 만났다. 사람 품성이 진국이라, 귀국해서 전기과 노도환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했더니, 이 교수님 같은 분이면 특채를 하겠다고 해 바로 양 박사가 전북대 전기과에 특채됐다. 마음 씀씀이가 넉넉한 게 임실 사람 인심이다. 

한 마을 부부 박사도 화제 거리다. 삼계면 봉현리 출신인 정병헌 숙명여대 인문학부 교수와 박미리 이화여대 교수는 같은 동네 출신으로 나란히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학계 등에서 유명한 박사로는 사회학자 한상진(서울대 교수), 중문학자이면서 시인 수필가로도 널리 알려진 허세욱 고대 명예교수(덕계마을)와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 비리 특별검사를 맡은 김진흥 변호사(흥곡마을) 등이 있다. 삼계면에 사는 사람들이 특별히 잘살거나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심병양씨(삼계면 뇌천리)에 따르면 "머슴살이해서 자식들 박사 만든 집도 많다"고 한다. "논 2마지기만 있으면 자식들 가르쳐서 박사 만들었다"고도 한다.

마을별 배출 박사 수의 차이가 뚜렷하다. 삼계면의 모든 마을에서 골고루 박사를 배출한 것도 아니다. 마을별로 삼계면 '덕계리'라는 행정구역 안에 중촌마을이 있는데, 중촌은 20가구에서 9명의 박사를 배출하여 가구당 0.45명인 반면 이웃마을에서는 35가구에서 2명의 박사만 나왔다. 또 삼계면 '뇌천리'라는 행정구역 안에 뇌천마을은 23가구에서 9명의 박사가 나와 가구당 0.39명인 반면, 이웃마을은 21세대에서 박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이러한 결과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풍수 지리적 환경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으며 지세(地勢) 기운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 본다. 박사를 많이 배출한 마을의 경우 풍수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하고 있다. 이곳을 탐방하면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듣는다. "박사가 많아도 가난하다. 이웃면인 동계면(순창군)에는 돈 많은 사업가가 많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러한 연유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바로 지세 탓이다."삼계면의 지세를 살펴보면 백두대간 상에 있는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뻗어 조약봉에서 끝나는 산줄기가 금남호남정맥이며, 조약봉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분기된다. 호남정맥은 3정맥 분기점인 조약봉에서 시작하여 호남 내륙을 관통하여 백운산과 망덕산을 거쳐 광양만 외망포구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430㎞의 산줄기를 말하며 9정맥중에서 가장 긴 정맥이다. 호남정맥상에 있는 주요산은 내장산, 추월산, 강천산, 무등산, 제암산, 조계산, 백운산 등 명산도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약 70여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이러한 호남정맥의 흐름은 마치 청룡이 용트림을 하듯 크게 좌우로 변화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신화역사공원을 품은 남송이 오름, 그 오름 발 오설록 녹차 밭에서 차 한잔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솔개 한 마리’의 기(氣)를 마신다. 사진은 오설록 녹차 밭 전경. 사진=제주관광공사 누리집.
신화역사공원을 품은 남송이 오름, 그 오름 발 오설록 녹차 밭에서 차 한잔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솔개 한 마리’의 기(氣)를 마신다. 사진은 오설록 녹차 밭 전경. 사진=제주관광공사 누리집.

정맥에서 분맥한 용맥은 삼봉산(538.6m)→고덕산(625.1m)로 이어진 용맥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힘차게 달려와 '순천완주고소도로' 임실IC를 가로 질러 낮게 내룡한다. 이어 봉화산(해발 473m)를 성봉하고 잠시 쉬는 듯, 남으로 중봉을 연이어 만들며 매봉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지맥을 내어주고 본룡맥은 남으로 뻗어 노산(539.7m)으로 서서히 상기하였다가, 다시 남서쪽으로 바쁘게 달려 나간 용맥은 삼계면의 주산이 되는 깃대봉이 되었다. 깃대봉은 서북과 남서 그리고 동남으로 뻗어 여러 맥으로 나누어지는데, 마음 넓은 선비를 보는 듯 단하하고 뚜렷한 봉우리로 주산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동남쪽으로 낮게 내룡하는 맥은 삼계면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는데, 끊어진 듯 이어져 다시 작은 산을 만들어 두툼하고 든든한 좌청룡을 만들어 마을을 잘 감싸고 있다. 우백호는 깃대봉에서 바로 내려와 삼계리를 감싸고 있다. 청룡 백호가 주산에서 바로 내룡하여 환포하고 있는 곳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춘 명당이 있다. 삼계면의 안산은 청룡이 역할을 충분히 하고 남은 지기가 낮게 떨어지다가 다시 이어져 만들어졌다. 이러한 안산을 청룡맥 안산이라 하며 양기의 기운이 더욱 실하다 하겠다. 삼계면을 싸고 있는 산봉우리는 낮으면서도 목성체의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풍수지리에서는 산의 형태와 모습에 따라 오성체(火星體·木星體·金星體·土星體·水星體)로 구분한다. 삼계면은 나무가 자라는 모습과도 같고 붓과도 같은 필봉이 많아, 학자, 박사가 배출하는 양택의 명당으로 볼 수 있으며, 뇌천 유천 후천의 삼천이 감싸고 있어서 보온과 보습이 잘 되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에서는 경찰 공무원 등이 많이 배출된 애월읍 납읍리가 있다. 조선 1763년 납읍리 출신 김형중, 변성우, 변성운 등 세 명이 동반 과거급제를 했다. 이들은 납읍리 출신 변시중의 제자 들이었다. 변시중은 1727년(영조3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전라도 현감과 성균관 박사를 거쳐 호조참판까지 지낸 인물이다. 말년에 관직에 물러나 제주에 와서 귤림서원장으로 후생교육에 힘 썼다. 그때부터 과거를 거두는 마을이라고 해서 과납(科納)이라 불렀다. 1675년 제주목사 소두산(蘇斗山)이 제주를 순력하던 중 이 마을이 지형지세가 고을을 형성할 만한 곳이라 ‘납읍’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납읍은 금산 공원과 곽오름 등이 주위를 감싼 닭텅애(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 형태의 중산간 마을이다. 최근 납읍 인물로는 육군인사사령부 사령관 소장 고태남, 서울고등법원 법원장 김창보, 행정안전부 복구정책안전관 진명기, 경북대 중문과 이우철 교수, 제주대 물리학과 김용주 교수 등이 있다.

고태남(왼쪽) 중장, 이기용 교수.
고태남(왼쪽) 소장, 이기용 교수.

필자의 고향인 녹차밭, 서광서리인 경우, 전북대에 봉직하다가 고려대 영문학과 및 언어학과로 옮긴 이기용 명예교수(미국Univ. of Texas at Austin, 언어학 전공의 철학박사)와 연세대 건축공학과의 이강(Georgia Institute of Tech.박사) 교수가 있다. 두 사람은 부자 관계다. 이기용 교수는 세계적인 언어 학자(Computational Semantics)로 2002년 ‘홍조근정훈장 및 대한민국학술원 상(賞)’과 2016년 한글 연구로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경향신문 논설주간 이 중근과 제주도 안전총괄기획단장 이중환은 형제지간이다. 서광 마을은 솔개(연, 鳶, Black Kite) 형태의 남송이(339m) 오름의 열린 하늘(Open Space)의 기(氣)를 받는다고 알려졌다. 신화역사공원을 품은 남송이 오름, 그 오름 발 오설록 녹차 밭에서 차 한잔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솔개 한 마리’의 기(氣)를 마신다. 구억 영어교육도시와 저지문화 마을이 인접해 있다.

러시아의 자작나무숲, 독일의 푸르고 검은 슈바르츠발트 숲의 나무들의 촌락은 나무의 키가 하늘처럼 크다. 햇빛을 더 많이 받을려면 주어진 하늘의 공간을 서로 차지 할려고 키가 클 수 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 임실이나 납읍 마을의 주거민의 공동체도 이웃이 잘되면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닮으려는(?) 본능 때문인가. 두 마을이 공통점은 시내와 교통이 불편하지 않아 새로운 세상의 정보를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1960년대 광쳉이(廣靑里)는 중산간 마을 가운데 상(上) 웃드르 마을로 물이 귀해 봉천수(奉天水)를 마시는 곳이다. 버스도 안다니는 곳으로 차를 타려면 두 시간 걸어서 대정 인성리로 가야 탔다. 그러나 오늘날 서광(西廣)은 1분에 4대 정도의 차량들이 동네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ps. 납읍마을 자료를 제공해주신 납읍리 김경보 이장님, 서광리 이공숙, 강영주 교장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 이문호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 전기통신 기술사(1980)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울릉공- RMIT대학, 독일 뮌헨,하노버-아흔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최초 Jacket 행렬을 발견했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과학기술훈장 도약장,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선정, 2018년 한국공학교육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주문화의 원형(原型)과 정낭(錠木) 관련 이동통신 DNA코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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