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여·순 10.19항쟁 73주년] ③ 현장-추념식에도 조용한 분위기, 제주4.3과는 많이 달랐다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동포를 죽일 수 없다며 출동을 거부, 봉기를 일으키며 시작된 여수·순천 10.19항쟁 위령제 및 추념식이 지난 19일 전남 여수 이순신광장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여순 10.19, 진실의 꽃이 피었습니다’를 주제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사이렌을 시작으로 진행됐다. 여수와 순천 일대가 사이렌 소리로 뒤덮이자 현장에서는 적막에 휩싸이며 추모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위령제와 추념식이 진행된 이순신광장 일대를 제외하고는 추모 현수막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으며, 여순특별법이 통과된 이후 첫 추념식이 개최된 무거운 날이라는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제주4.3 추념식 때 도내 곳곳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앞다퉈 내걸리는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지난 6월 통과된 특별법을 환영하는 문구조차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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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10.19사건 합동위령제 및 추념식'에는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참석해 헌화와 분향을 올렸다. 송 대표는 추념사에서 "후속조치에 차질이 없도록 당차원에서 전폭적으로 뒷받침함과 동시에 내년 행사에는 새로 선출된 민주정부 4기 대통령을 모시고 오겠다"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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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합동위령제 및 추념식이 열린 이순신광장을 찾은 행사 참여자가 대통령과 국무총리 화환을 바라보고 있다. ⓒ제주의소리

특별법이 통과된 뒤 처음으로 이뤄진 추념식이자 유족회와 여수시가 진행하던 규모에서 전남도 합동으로 확대됐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의 참여도 부족해 보였다. 

주요 정당 가운데서는 여당인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만 행사장에 참석했으며, 정부 주요 관계자는 청와대 행정관이 끝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화환과 김부겸 국무총리의 영상 추념사가 있어 국가 차원의 행사라는 점을 조금이나마 부각할 수 있었다.

추념식 자리에서 만난 서희종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사무국장은 “최근까지 여순은 유족회와 재향군인회, 경우회 등 보수단체와의 갈등이 심했다”며 “행정시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겨우 조례도 만들고 행사도 진행하지만 70주기까지는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여수 곳곳에서 추모 분위기가 쉬이 형성되지 않는 까닭은 여순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적 분위기가 무겁게 남아있는 데다 단체 간 갈등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 국장은 올해 6월 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에 발의된 지 20년 만에 통과되면서 대외적인 갈등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법 통과가 하나의 계기가 돼 지속됐던 갈등 구도가 그나마 사그라들었다는 것.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특별법)’은 지난 6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특별법에 의거해 여순은 국무총리 소속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와 전남도지사 소속 ‘실무위원회’를 둘 수 있게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희생자 위령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학살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비문을 작성하지 못하게 하는 등 반발이 있었기도 했단다. 그렇게 만성리 학살터에 있는 위령비문은 점 6개(……)만 적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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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만성리 학살터에 세워진 위령비 뒷편에는 개요나 희생자 이름이 쓰여 있는 것과 다르게 아무 것도 적히지 못했다. 단지 점 6개와 기간 만이 모든 것을 말해줄 뿐이다. ⓒ제주의소리
해원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동백연이 여수 하늘 높이 날고 있다. ⓒ제주의소리
해원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동백연이 여수 하늘 높이 날고 있다. ⓒ제주의소리

특별법 제정이 오래 걸린 이유를 묻자 서 국장은 “처음 법안이 국방위 소속으로 진행되다 보니 국방부 반발에 따라 제대로 된 회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며 “10여 년 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19대 국회 말기에 행안위로 방향을 전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20대 국회에서 물꼬가 트여 21대 국회에서 겨우 통과된 것이다. 제주의 경우 추미애 당시 의원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등 적극적으로 하면서 제정됐는데 여순은 그런 의원들도 많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주4.3과 여순은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다. 이를 따라잡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20년 전 제주는 희생자나 2세대 자손의 증언을 듣고 사건을 규명할 수 있었지만 여순은 이제 시작인 데다 유족이 최소 80대분들이라 시급한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서 국장은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증언은 더 갑갑하게 막혀 진상규명이 제대로 안될 수 있다”며 “3세대 자손이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전해들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생존자나 2세대 보단 힘이 약하다”고 말했다.

73년에 걸친 갈등의 골은 여수와 순천, 전남 일대 많은 이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지독한 반공교육 아래 행해진 강요된 침묵은 피해자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이는 험난한 진상규명의 길로 되돌아왔다.

제주4.3 역시 진상규명의 시작 단계에서 많은 고난에 부딪혔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채 가시지 않은 그 날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들과 4.3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 여겨온 이들의 침묵 때문이었다.

4.3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라는 명령에 대해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항거한 사건으로 시작된 여순항쟁. 제주4.3과 쌍둥이 사건이라 불리는 만큼 국가폭력에 희생된 그들의 해원이 하루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제주의 관심과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 여수=김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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