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포인 제주도민을 죽일 수 없다”
“우리는 동포인 제주도민을 죽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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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여·순 10.19항쟁 73주년] ⑥ 이념이란 명분 아래 자행된 국가폭력 ‘제주4.3과 여순’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호소문 中).”

1948년 4월 3일, 대한민국 현대사 최대 비극이라는 제주4.3이 발생한 이후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국가는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출동을 명령한다. 

하지만 남쪽 바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동포의 울부짖음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들은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을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14연대가 점령했던 여수와 순천, 벌교, 고흥, 광양 등 전남 지역 일대는 정부가 설치한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의 진압 아래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여순사건이 끝내 진압되고 남은 군인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며 교전을 이어가는 가운데 해당 지역주민들은 14연대가 점령했던 곳의 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운동장으로 끌려 나왔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운동장에 끌려 나온 주민들은 진압군의 ‘손가락 총’ 한 번에 해명할 기회를 얻지도 못한 채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차별적인 총탄에 맞아 죽어갔다. 손가락으로 지목당하면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한 채 학살터로 끌려간 것.

일명 '손가락 총'을 나타낸 동상. 여순 당시 진압군은 손가락 총으로 부역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일명 '손가락 총'을 나타낸 동상. 여순 당시 진압군은 손가락 총으로 부역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여수 오동도 여순사건 기념관에는 당시 부역혐의자 심사방법이 소개된다.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었다거나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이 학살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여수 오동도 여순사건 기념관에는 당시 부역혐의자 심사방법이 소개된다.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었다거나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이 학살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이처럼 객관적인 재판을 통해 혐의를 소명하는 것은 사치였다. 군용 속옷을 입었다거나 머리가 짧다는 이유 등 말도 안되는 이유로 끌려온 그들은 총살당했고 주검은 아무렇게 버려졌다.

이는 마치 제주4.3 당시 북촌리에서 벌어진 잔인한 민간인 학살과 닮아있다. 북촌리뿐만 아니라 제주 곳곳에서 벌어진 잔인한 기억과 이어진다.

1949년 1월 17일 당시 2연대 군인들은 무고한 북촌리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가 마을 동쪽 당팟, 서쪽 너븐숭이 일대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기도 한 북촌리는 4.3 당시 무장군인에 의해 무려 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순 당시 타임·라이프지 도쿄국장이었던 칼 마이던스는 리포터 자격으로 순천에 들어가 순천농림학교에서 벌어진 협력자 색출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편역한 도서 ‘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담겼다.

“반란을 진압했던 정부군이 반란자의 잔학 행위와 똑같은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보복을 하고 있었다. (중략) 이름도 죄명도, 누가 심문하고 누가 사형을 집행했는가도 기록되지 않고 그렇게 소멸되었다.”

마이던스는 순천농림학교와 여수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그 과정에서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괴로운 체험이었다. 한 마디의 항변조차 없었고, 동정을 바라는 울부짖음도 없었고, 신의 구원을 바라는 어떤 중얼거림도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여수 제14연대 소속 군인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여수 갤러리노마드에서 진행되는 '여순항쟁의 기록' 전시에는 여순의 시작이 된 제주4.3의 소개글이 일부 마련됐다. ⓒ제주의소리

국가는 민간인 희생을 좌익 봉기군에 의한 학살로 포장하기 일쑤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소위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억울함을 풀 겨를도 없이 억척같은 삶을 살아왔다. 여수·순천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상을 의심받는 야만의 시대를 버텨온 것.

당시 이승만은 여순사건 진압이 어느 정도 끝난 1948년 11월 4일 담화문을 통해 ‘남녀 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를 다 제거하라. 조직을 엄밀히 해 반동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해 앞으로 어떤 법령이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로 복종하도록 하라’고 발표했다.

담화문에서 나타난 대로 아동까지 무차별적으로 제거하라는 것은 당시 이승만의 인식이 어디 닿아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뒤 살아남은 자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억울함을 속으로만 삼켜야 했고 최근에야 조금씩 꺼내놓고 있다. 연좌제의 멍에를 지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오지 못했던 한평생의 억울함이다. 

제주도에서도 그랬고, 여수와 순천에서도 그랬다. 누군가 당시를 물을 때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보상은 아직도 더딘 상태다.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명예회복과 배·보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4.3과 다르게 여순사건은 이제야 시작 단계다. 

올해 6월 29일에는 여순사건이 발생한 지 73년 만이자 여순사건특별법이 국회에 발의된 지 20년 만에 겨우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특별법)’이 국

회 본회의를 겨우 통과한 것. 특별법에 의거해 여순사건은 국무총리 소속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와 전남도지사 소속 ‘실무위원회’를 둘 수 있게 됐다. 

어떤 누군가의 일이 아닌 바로 우리의 목숨, 동포의 생을 앗아갈 수 없다는 이유로 시작된 여순사건에 대한 제주도민의 관심은 필연이다. / 여수=김찬우 기자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 전경. 여순사건 당시 여수 14연대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는 125명이 진압군에 총탄에 맞아 한 자리에서 학살당한 뒤 불태워졌다. ⓒ제주의소리
여수시 만흥동 '만성리 형제묘' 전경. 여순사건 당시 여수 14연대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는 125명이 진압군에 총탄에 맞아 한 자리에서 학살당한 뒤 불태워졌다. ⓒ제주의소리
만성리 형제묘 설명에는 '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를 연상케 한다'고 적혀있다. 이 곳에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유족의 아픔이 서려있다. ⓒ제주의소리
만성리 형제묘 설명에는 '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를 연상케 한다'고 적혀있다. 이 곳에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뒤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유족의 아픔이 서려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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