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 (33) 구좌읍 상도리 삼춘책방 / 여행길에 품는 책 한 권의 효과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인 고봉선 작가가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글] 

구름마다 제각각 개성을 드러내며 마실 나온 10월 중순, 쌀쌀한 기운이 오히려 청량감을 더해준다. 줄다리기하듯 기다랗게 늘어선 구름이 나랑 함께 달린다. 마을 책방을 핑계 삼아 나선 길이 즐겁다. 평야라고 해도 좋을 듯싶은 초록 물결이 피울음 삭히며 모래땅에서 뿌리를 살찌운다. 이번엔 당근의 고장 구좌읍 상도리 삼춘책방을 찾았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책방지기 권귀현 씨에게선 가을하늘만큼이나 해맑음이 돋보였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또 하나의 길인 듯 제주시에서 구좌읍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랑 같이 달리는 구름.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경상남도 함양이 고향인 50대 중반의 책방지기 권귀현 씨,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에서 학교 다녔고, 졸업 후 줄곧 부산에서 살았다. 직장에 다닐 땐 동료들과 술도 자주 마셨다. 하지만 술자리에서는 진중하다기보다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다가 허공에서 툭 사라지고 마는 그런 대화가 많았다. 삶의 한 부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겠지만 그 자리엔 구라도 허상도 많았다. 슬슬 직장을 그만둬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종종 회의감이 밀려왔다. 어딘가에 터를 잡고 인생 2막을 펼쳐야 했다. 어디로 가서 무얼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제주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의 아내는 기왕이면 좋아하는 곳에서 살자고 했다. 여행도 좋아하겠다, 걸리는 건 없었다. 그는 떠난다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구좌읍 상도리에 땅을 매입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준비했다. 처음엔 아내 혼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본인은 직장을 조금 더 다니다가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는 아내 혼자서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직장을 정리하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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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삼춘책방.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을 더하다”
귀현 씨는 책을 읽는다기보다 구매하는 걸 좋아했다. 그렇다고 읽는 걸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구매한 책을 책장에 꽂아 두었다가 마주할 때마다 꺼내 읽는다. 한마디로 책을 옆에 두고 껴안고 뒹굴며 만지기도 하는 등 가까이하는 걸 즐겼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할 때 손님들께 조식을 드리고 저녁엔 가볍게 맥주도 한 잔 마시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이 공간에 400~500여 권 정도의 책도 진열해 놓았다. 자신은 물론 손님들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해 놓음이다. 

게스트하우스에 책방을 더하게 된 계기는 건강이었다. 신은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했던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가 3년 차가 되던 해, 그는 크게 아팠다. 귀현 씨가 극복해야 할 시련이었다. 수술 후 치료와 병행하는 검사만 해도 1년여, 이제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술을 마신다거나 그런 것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옆에 끼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건 바로 책방이었다. 

귀현 씨는 동네마다 책방이 하나씩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근처에 유명하다는 소심한 책방도 있지만, 그도 낮엔 늘 비어 있는 이 공간에서 책방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책방을 시작했다. 그랬더니 몸도 마음도 행복했다. 시련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외부에서 오는 손님도 있지만, 책방은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손님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여행길에 책 한 권’이라고 책방 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여행지에서 가볍게, 혹은 평소 생각하던 책이 눈에 들어 한 권 정도 품에 안고 갈 수 있는 그런 책방이 되었으면 했다. 그런 만큼 귀현 씨는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손님들께 책을 많이 권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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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입구에서는 게스트하우스 간판과 책방 간판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제주에서 처음 배운 말 삼춘”
그가 제주에 와서 맨 처음으로 배운 말은 삼춘이다. 이삿짐 정리 중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클린하우스에 갔었다. 거기에서 그는 ‘삼춘들…….’ 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삼촌을 잘못 적은 표기한 거겠지.’ 하고 생각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얼마 후, 이웃에 계신 분과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이웃을 이모라고 불렀다. 그런데 된통 혼났다. 

“내가 왜 네 이모냐? 네가 왜 나한테 이모라고 불러?” 

그가 살던 부산에서는 이웃을 이모라고 부르는 게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런데 ‘왜 이모라고 부르냐?’라며 혼을 내다니 영문을 모르겠다. 

“왜요? 왜 이모라고 부르면 안 돼요?” .

어리둥절해 있는 그에게 이웃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모라고 부르려면 네가 나랑 오랫동안 연을 맺었든지, 아니면 진짜로 내가 너의 이모든지, 그랬을 때만 이모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른들을 부를 때는 남자 여자 구분 없이 삼춘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렇게 그가 제주에서 제일 처음 배운 말은 삼춘이다. 

여기에 와 살면서 동네 친구들도 생겼다. 그 친구들의 자녀들도 귀현 씨를 보면 “삼춘, 삼춘!” 하면서 따랐다. 어느새 삼춘이란 말이 방글거리는 아이처럼 따뜻하게 다가왔다. 자연스레 그의 책방은 ‘삼춘책방’이란 이름을 얻었다. 비록 조그맣지만, 동네 분들이 오면 책을 한 권씩 손에 들고 흐뭇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이 그가 바라는 책방이다. 그러나 사실 동네 분들은 잘 오지 않는다. 그래도 종종 주말마다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책을 한 권씩 사가는 이들도 있어서 삼춘으로서 보람을 느낀다. 여기 와서 친구들이 생기고, 그 친구들의 자녀들이 “삼춘, 삼춘!” 하면서 살가움을 느끼게 한 말 “삼춘”, 그에게 이젠 제주가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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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낀 돌담 밑엔 소라껍데기가 바다를 노래하고, 담장 너머에서는 당근이 초록 노래를 부르며 자라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고향이란”
고향이란 나고 자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단어다. 직장생활이다 뭐다 하면서 거주지가 자주 바뀌는 탓에 그 의미도 많이 퇴색하였다. 나고 자란 곳, 옛 추억, 풍경 등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고향의 필수 조건으로 옛친구를 꼽는다. 그렇다면 이곳을 고향 삼아 사는 권귀현 씨는 어떨까? 

이곳은 귀현 씨에게 어릴 적 친구가 없다. 아직은 그렇다 할 추억도 없다. 그래도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의 자녀를 보며 위안을 얻는다. 어릴 적 친구를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종종 술 한 잔씩을 나누며 추억도 만들고 있다. 이제 제주는 그만의 의미를 지닌 고향이다. 

간혹 그는 육지 친구들에게 “제주는 텃세가 심하지 않으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말한다. 

“식구들끼리 친구들끼리 잘살고 있는 너희 동네에 외지 사람 한 명이 훅 들어와서 산다고 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 제주만이 지닌 문화적인 특징은 육지하고 다르다. 이곳 동네 어르신들은 육지 것들이라고 하시더라. 말 그대로 육지 것들이 당신들 생활 속에 들어와 살면서 파괴되는 것들이 늘어가는데, 누가 그걸 좋다고 하겠느냐? ‘그래, 너 왔으니까 잘 살아.’ 이렇게 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느냐? 이곳 사람들은 지역에 관심이 많다. 외지인이 들어와도 방관하지 않는다. 텃세가 아니라 관심이다. 그 관심을 텃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외지에서 온 그는 제주인의 관심으로 마을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음식도 나눠 먹게 되었다. 그는 고향의 조건으로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정면.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동네에 녹아들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귀현 씨는 이웃 삼춘들과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동네에 녹아들기 위해서다. 길에서 만날 때마다 밝은 얼굴로 인사드리는 건 기본이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삼춘, 오늘은 뭐 하세요?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 등 정성을 다해 다가선다. 그러면 삼춘들께서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처음엔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50%였다. 그래도 분위기로 의미를 파악하면서 “아 그래요? 힘드셨겠네요.” 하는 식으로 소통한다. 

책방에 한 번씩 오는 어느 선생님께서 제주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외지 사람들이 왔을 때 왜 텃세를 부린다고 하는지에서부터 귀현 씨가 마을에 녹아들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던 건 이사 와서 한두 달 후였다. 

이웃 삼춘들께서 2~3일 간격으로 계속 제사 음식을 갖다주셨다. 뭐지? 그의 관점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다는 건 굉장히 가깝다는 의미다. 그에게 제주는 아직 낯선 곳이다. 그런데 ‘제사 음식을 한번 먹어 봐라.’ 하면서 여러 집에서 갖다주신다. 그러면서도 여러 집에서 제사 지내는 걸 보니 ‘뭔가 일이 있겠구나.’ 싶었다. 그 이유는 며칠 뒤 이웃 삼춘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웃 삼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그랬다. 그즈음, 4•3사건 때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제사가 몰려 있었다. 당시에도 외지에서 누군가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 삼 년 정도는 별 터치 없이 가만히 지켜보신다고 했다. 그렇게 지켜보다가 ‘아, 이 사람이 우리 마을 사람이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이렇게 음식도 나눠주고, 오 년 정도 되면 완전히 마을 사람으로 인정하여  함께하는 문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을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외지 사람이 마을 사람으로 인정될 때까지 최소 삼 년에서 오 년 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자마자 제사 음식을 받았다. 일찌감치 마을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귀현 씨는 그 사실이 뭉클하면서도 감사했다. 제3의 고향이 됐든 제4의 고향이 됐든 이제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그는 제주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을 찾은 손님이 책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고향 없는 사람들”
고향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박화성의 단편소설 “고향 없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고향이 태어나 자란 곳을 의미한다면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그러나 박화성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고향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스스로 고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삼룡은 홍수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들과 평안남도 강서 농장으로 이주했다. 희망을 지니고 이주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고향에 있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고향에 돌아가기로 했다.

귀향 사흘 전, 삼룡은 고향 친구 판옥에게서 고향의 상황이 악화하여 남아있던 이웃도 모두 떠나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는다. 평생을 함께해 온 이웃이 없는 고향, 반갑게 맞아 줄 사람이 없다. 삼룡과 이웃들은 귀향을 포기했다. 이제 삼룡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려는 삶의 강인함을 보인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는 사람을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판옥에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을 고향으로 만들자.’라는 답장을 보낸다. 

일제의 정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삼룡과 판옥의 이주, 이와 달리 현재는 더 나은 생활 환경을 찾아 국내외 지역으로 떠나는 자발적 인구 이동이 많다. 쾌적한 환경을 찾아 도시 주변이나 농촌으로 이동하는 역도시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진학, 취업, 결혼 등으로 이사도 잦다. 오늘날 고향의 의미는 출생지가 아니라 체험이 담긴 거주지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 연휴 중 고향을 찾지 않는 역귀성과 해외여행이 늘어나고, 부모의 묘를 거주지 주변에 만드는 것도 고향에 대한 애착과 절실함이 줄어듦을 보여준다. 삼룡에게도 지리적인 고향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함께했던 사람들이 떠난 곳은 이미 고향이 아니었다. 

책방지기 귀현 씨에게 함양은 태어난 곳이며 부모님이 계시다. 누가 봐도 그에겐 고향이다. 그러나 부산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그곳엔 친구들이 많다. 그 친구들은 제주에 놀러 오기도 하고 귀현 씨가 올라갈 땐 어울려 놀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에겐 부산에서의 추억이 더 많다. 그리고 제주에 와서 7년 차, 이웃은 그를 마을 사람으로 인정하고 제사 음식을 나눠준다. 처음 몇 년은 힘들고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으로 인정받은 요즘은 다르다. 그의 아내도 이곳에서 살아야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점점 제주는 부부에게 친밀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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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한가운데에는 손 소독제와 방문일지, 그림책 외에도 책방지기가 추천하는 책이 놓여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당근의 고장 구좌읍”
구좌읍이라면 당근을 빼놓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10월 하순으로 치닫던 날 내가 본 구좌읍은 당근 이파리의 가을 합창이 한창이었다. 초록이 무너져가는 가을, 평야인 듯 파릇파릇 연초록 이파리들이 살랑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뛰었다. 책방지기 귀현 씨에게도 당근은 늘 설레는 존재다. 

그가 이사 오던 해 7월은 모래바람이 불었다. 과연 이곳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런데 한 달이 채 안 돼서 밭마다 파란 새싹들이 올라왔다. 뭐지? 이파리의 존재를 몰랐던 그에게 야릇한 감동이 밀려들었다. 이웃 삼춘께 여쭤보았더니 당근이라고 하셨다. 

그가 제주로 오던 7월은 당근 씨앗을 파종하던 때였다. 7월 말에 파종해서 12월부터 3월까지 수확하는데 그때까지 세 번 정도 솎아내기를 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싹들은 그에게 제주에 잘 왔다고 속삭이듯 조잘대면서 쫙쫙 잘도 올라왔다. 1차 솎아내기를 끝낸 당근은 정돈된 느낌으로 다가오며 또 쑥쑥 자랐다. 두 번째 솎아내기를 할 땐 아주 작은 당근도 달려 있었다. 이웃 삼춘들은 손님들에게 보여주라면서 그 앙증맞은 당근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 꽂힌 귀현 씨는 당근 수확 풍경을 사진에 담으면서 신비스러운 제주에 푹 빠졌다. 지금 육지는 벼 베기 철이다. 벼 베기가 끝나면 그야말로 황량한 들판이다. 그런데 구좌읍에선 초록 물결이 살랑거리며 그에게 희망가를 불러준다. 

우리나라의 당근 60~70%가 구좌읍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2월 전후로 수확하는데, 그때 당근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가 육지에 있을 땐 당근을  항상 된장에 찍어 먹었다. 그런데 삼춘들은 갓 수확한 당근을 씻어 바로 먹으라고 했다. 달짝지근하고 싱싱한 당근, 당근의 맛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입가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착즙을 내려서 먹는 당근 역시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당근밭 앞에서 씨앗을 파종하고 꼼틀꼼틀 발아하는 모습, 우르르 일어서며 물결치는 당근 싹과 수확, 매끈한 몸매를 지닌 당근과 하얗게 핀 꽃까지 당근의 일생을 동영상으로 보는 것처럼 눈앞에 스치는 상상이 즐거웠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가운데 테이블 너머 창가에 놓인 엉또그림엽서.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 장식의 효과”
읽는 재미보다 사는 재미로 책을 구매한다는 귀현 씨에게 책은 인테리어다. 그는 책을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을 바라보다가 어느 한 권에 손길이 가면 쓰윽 뽑아낸다. 그리고 펼치면 그 속으로 빠져든다. 행복의 세계에 안착한다. 종이책만의 매력이다. 오디오북이 나오자 편하고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는 무료체험을 시도했다. 그런데 한쪽 귀로 들어와서는 다른 쪽 귀로 나가버렸다. 하루 체험하고 포기했다. 종이책은 펼쳤을 때 오롯이 새겨지는 느낌도 좋다. 또 언제든지 꺼내서 읽을 수 있다. 책장 앞에서 눈길 가는 대로 오늘은 이 책, 내일은 또 다른 책에 꽂혀 읽는다. 물론 눈길이 닿지 않는 책도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계단을 한꺼번에 오를 순 없다. 책도 마찬가지다. 손길이 닿는 책을 읽다 보면 관심 분야가 넓어진다. 차츰 독서의 범위를 넓히게 되고 다른 책에도 손은 가게 되어 있다. 

게스트하우스에 들면 책 한 권쯤 구매하고 방에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숙박 손님 열 명 중 한 명 정도만이 책을 구매한다. 근데 참 이상하다. 책방이 좋고 책방이 있어서 왔다고 하는 손님들은 책을 사지 않는다. 책이란 책은 죄다 꺼내서 사진만 찍고 그냥 간다. 가장 가슴 아픈 건 그렇게 책을 꺼내 일일이 사진 찍고서는 저들끼리 “야, 인터넷으로 사면 10% 싸.”라고 속삭이는 사람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넷으로 사면 10% 싸다. 그러나 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손으로 만져보고 펼쳐서 몇 문장이라도 읽어보는 등 책의 물성을 느끼는 건 가치상 10%보다 훨씬 크다. 그런 즐거움을 모르는 손님에겐 미련도 없다. 되레 생각지도 않았던 손님이 책을 더 많이 구매한다. 그들은 책을 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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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부부가 사 모은 찻잔과 주전자 등이다. 유럽풍이 물씬 풍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여행을 즐기는 부부”
책방 한쪽 구석엔 부부가 여행지에서 사 온 기념품이 가득하다. 대부분 유럽풍의 찻잔과 주전자로 아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부부는 동반 여행을 즐긴다. 스페인, 포르투갈, 브라질, 남아공, 캐나다, 미국 등 다녀온 곳은 많다. 포르투갈을 여행할 땐 계절이 꼭 이맘때였다.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에 머무르는 동안 부부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도시는 부부의 마음을 잡아당겼다. 에어비엔비에서 숙소를 예약하고, 일반 가정집에서 4박을 묵는 동안 동네 골목을 산책하다가 서점도 만났다. 책방이라는 이름을 걸고 사는 그에게 이곳에서 만난 책방은 특별했다. 

부부가 만난 렐루 서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서점’에 선정될 만큼 실내가 아름다운 서점이다. 사교계 모임 장소로 사용되다가 1906년 렐루 가에서 오픈한 이 서점은 〈해리 포터〉의 기숙사와 도서관 모티프가 된 곳이다. 작가 조앤 K. 롤링이 포르투에서 영어 강사를 할 때, 이곳에서 영감을 얻고 〈해리 포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스럽게 돌로 된 길을 걸으며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평화로웠다. 해 질 녘, 중간에서 만난 다리 건너편 언덕에 앉아 있으니 신선의 세계가 따로 없었다. 도시 중간에 있는 기차역에 앉아서 세계 여러 나라 여행객들이 오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멀리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풍경의 정체가 궁금하여 찾아간 곳에선 군밤을 팔고 있었다. 늘 봐오던 풍경이지만 타국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사람 사는 모습은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구나.’ 하면서도 뭉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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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종일토록 내 눈을 즐겁게 하던 구름은 한 마리 공작인 양 깃을 활짝 펼쳤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권귀현 씨는 법정 스님을 좋아한다. 스님의 철학이나 생각이 좋아서 찾아뵙기도 하고 강연에도 몇 번 갔었다. 비록 스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는 아직도 서울에 가면 길상사에 꼭 들른다.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스님의 산문집 ‘무소유’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아니어도 소유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삼춘책방의 권귀현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그랬다. 그만큼 그의 표정은 아이처럼 해맑았다.

“삼춘책방은”
하늘이 유난히도 고운 요즘, 구좌읍으로 가 보면 어떨까요? 파릇파릇 펼쳐진 당근밭의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잃었던 사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삼춘책방에 들러 책도 보고, 해맑은 표정의 책방지기 삼춘과 이야기를 나누며 탁 트인 주변의 풍경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삼춘책방에는 소설과 시, 에세이 외에도 그림책과 독립출판물들이 있습니다. 여행길에서 품은 한 권의 책으로 더 없는 추억을 만들 수 있으실 겁니다. 

찾아가는 길: 제주시 구좌읍 상하도길 46-12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samchunbooks/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쉬는 날은 인스타에서 따로 공지합니다.)

# 고봉선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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