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68) 우다퀀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자세를 바로잡아 몸 뒤에 둔 조개껍데기에 살짝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온화하면서도 힘찬 얼굴에 빛이 쏟아지며 향상되는 정신이 활짝 피어 있다. 그것은 당시 약진하는 대만 사회에 대한 작가의 기대와 상상을 구현해 대만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림1. 황투수이 《감로수》 대리석조각 (타이베이교육대학교미술관, 황방좐(黃邦銓)、린튄니(林君昵) 제공)
그림 2. 카노 호가이 (비모관음, 悲母觀音) 1888년 견본채색. 195.8×86.1cm (도쿄예대미술관 소장)

일본에서 미술을 배운 최초의 인물

황투수이(黃土星, 1895-1930)는 일제 강점 첫 해 타이베이시 멩지아 주쉬의 뒷골목(현재의 완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만 미술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했고, 조국 사람들을 위해 섬의 아름다움에 걸맞은 정신문명을 창조하고 싶다는 생각에 불후의 작품 제작에 청춘의 피땀을 밤낮으로 쏟아 부었다. 대만 유학생으로서 처음으로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워 대만 작가로서 처음으로 「제전」에 입선했다. 제전에 4번 입선해 이 세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황은 감로수로 다시 제전에 입선했고 이듬해 도쿄평화기념박람회 대만관에도 초청받았다. 대만 최초의 나체 조각인 이 작품은 고개를 약간 들어 자세를 바로 하고 뒤쪽 조개 껍질에 손을 살짝 얹은 여성상으로 표정은 온화하고 힘차며 얼굴은 자신감 넘치게 빛난다.

그림3. 황투수이 《감로수》 1919년 대리석 80×40×175cm

1922년 황은 일본 동양협회 미쓰이 씨의 초청으로 잡지 『동양』에 『대만에 태어나서』라는 기사를 발표해 창작에 관한 귀중한 독백과 대만에 대한 열망을 담았다. 그의 솔직함과 진지함은 지워버릴 수 없는 대만의 로컬 정체성이 강하게 느껴져 인상 깊다. 황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독자적인 비전을 갖고 시공을 넘어 섬사람들의 각성과 노력을 보고싶어하는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나라에 태어나서 그 나라를 사랑하고,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을 사랑한다. 이것이 인지상정입니다.”

1919년 25세의 황은 《감로수》라는 종교적 주제의 틀 안에서 에로티시즘이나 응시에 관한 것을 회피하면서 소박하고 성실하며 순수함을 갖춘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로 등을 편 대만 여성을 대표하는 본존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커다란 조개껍데기가 똑바로 선 것도 우연이 아니고, 여성의 손의 배치나 자세도 랜덤이 아니다. 관음보살로부터 감로를 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오브젝트를 설정한, 형식과 내용의 교묘한 유용이다. 양원이(羊文漪)의 논문에 따르면, 《감로수》는 대만을 표상하는 여성상으로 여겨져, 고개를 들어 명상에 눈을 감은 자세로 제시된다. 관음보살과 감상자 사이에 있는 여성은 눈을 감고 성수를 인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의무에 있어 더 큰 역할을 담당하며 자신감 있는 태도로 현실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대만의 미래 포부에 대한 작가의 욕망은 이렇다. “대만은 신들의 가호 아래 바다에서 떠오를 것이다.”

1930년의 제전의 전날 밤, 황은 물소의 대형 구절을 제작 중에, 과로를 원인으로 하는 복막염 때문에 도쿄에서 사망했다. 36년이라는 짧은 인생이었다.

《감로수》의 수수께끼

황의 유작들을 돌아보는 것은 그의 인생 격동의 운명을 걷는 일이다. 1945년 일본 통치가 끝나고 1946년 대만성 의회가 대만교육회관을 계승하면서 1954년 대만성 의회는 대만성 임시성 의회로 개편됐다. 1958년 대만성 임시 의회는 타이중시 우펑 향(현재의 타이중시 우펑구)으로 이전했다. 막 완공된 회의동으로 모든 물품이 옮겨졌다. 상상할 수 있겠지만 당시 한편으로 대만의 의식과 문화가 억압되고 무시되며 다른 한편으로 나체상이 풍기를 문란케 하는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당시 백색테러 이후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감로수》의 예술적 성과는 이해되지 않았고, 관청도 그 중요성을 옹호하지 못했다. 섬나라 대만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쳐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가고 계엄령이 해제돼 어렵고 파란에 찬 시절을 보냈다. 대만으로 이전해 온 국민당 정부가 들여온 대중문화 우월의식은 대만인의 창작이 대만 독립의식에 오염돼 있다며 이무기나 맹수처럼 변했다. 국민당 의원들이 좋아하지 않는 감로수는 눈에 거슬리는 것으로 여겨져 운송회사는 성의회에서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도록 명령받았으나, 어디로든 지시받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타이중 역 근처의 공터에 방치해, 비바람을 맞고 있었다. 창조의 자유와 개방사상을 상징하는 이 상은 정면에서 여체를 보이고 있다는 이유로 잡동사니로 우습게 여겨져 헌신짝처럼 버려져 상의 사적인 부분에 먹을 뿌려 더럽히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역 옆에서 외과의원을 열던 장홍뱌오(張鴻標)는 참다 못해 가까이에서 감상하고 보관하려다 운송회사에 부탁해 500kg짜리 대리석 조각을 의원 1층 구석으로 옮겼다. 1958년부터 1974년까지 감로수는 장의원 1층에 있었다. 원내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보통이었고 16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 대만에서는 사상적 숙청 바람이 불어 지식인들을 겁먹게 했다. 1972-1975년 국립대만대 철학과 사건을 비롯해 사회에 수많은 간첩이 존재해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장의 가족들은 감로수를 맡은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1974년 의사인 장은 자신의 건강상태 악화를 깨닫고 작품을 지키지 못할까 봐 감로수를 완전히 봉인해 시국의 영향을 피해 잠을 재우기로 했다. 2년 후 장홍뱌오는 사망했고, <감로수>는 장홍뱌오의 후손들에게 암묵적인 비밀이 됐다. 여섯 아이들은 ‘바른 사람 바른 때를 기다리라’는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감로수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수행했다.

바른 사람과 바른 사람, 상자를 다시 열다

지난 2020년 타이베이교육대학교미술관(MoNTUE北師美術館)의 <불멸의 청춘-대만미술 재발견전>에 전시된 황의 <소녀상>(1920년)은 도쿄미술학교 졸업전에서 발표한 것으로 나중에 황의 모교인 다이나위공학교(태평양국초등학교)에 기증했다. 많은 로비와 노력 끝에 소녀상은 이 학교에서 빌려와 복구하고 클리닝하고 전시했다. 도쿄미술학교 후배인 모리 준이치 씨가 일본에서 대만으로 떠나 100년 전 작품을 전문적으로 처리해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림4. 대만인을 이미지화한 조각 《감로수》(타이베이교육대학교미술관, 황방좐(黃邦銓)、린튄니(林君昵) 제공)

그러나 황의 역사적인 대작(감로수)이 없었던 것은 다이베이교육대학교미술관 린문리 교수와 그 팀의 걱정이었다. <감로수>가 휴면하던 무렵 다행히도 백색테러시대 대만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모면했다. 2021년은 대만문화기금 100주년을 맞아 각지에서 이 세대 사회적 엘리트의 기억을 간직하고 대만인들의 의식계발에 공헌하기 위한 기념활동이 열렸다. 장홍뱌오의 육형제는 '바른 때 바른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부모가 원했던 감로수의 반환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망이 분명해졌다. 마치 하늘의 섭리처럼 어둠 속에서 힘이 움직였다. 신새벽이 밝아오고, 47년간 잠들어 있던 <감로수>가 깨어나 작가 자신과 그 고향, 조국에의 소원을 구현한 이 환상의 걸작은, 2021년 9월 6일, 장홍뱌오의 후손에 의해 정식으로 문화성의 영구 소장품으로 인도되어 일본의 수복가 모리 준이치에 의해 복구되어, 금년 12월에 다시 미술에서 전시되면서 세계의 시야로 돌아온다.

생명은 덧없지만 황의 예술적 지향은 이미 대만에 태어나서라는 한 문장에 명백히 드러났다. '불사를 이루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것은 정신의 불후이다.' 창조를 통해 사상이 다음 세대로 내려온다. 모든 대만인의 진심어린 소원은 황이 말한 ‘포르모사(福爾摩沙)의 시대’, ‘대만 신의 가호 아래 바다에서 떠오르는 대만’이 빨리 실현되는 것이다.

우다퀀(吳達坤, WU Darkeun)

타이페이국립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타이페이예술대학 '관두미술관' 큐레이터, 대안공간 'VT ARTSALON' 디렉터, '타이페이국제예술촌' 디렉터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타이페이 소재 복합문화공간 'C-LAB(Taiwan Contemporary Culture Lab)' 수석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100年来の国宝、《甘露水》再発見 
ウー・ダークゥン

彼女はわずかに頭を上げて姿勢を正し、体の後ろに置いた貝殻にそっと手を置いている。彼女の穏やかでありながら力強さをたたえた顔に光が降り注ぎ、向上する精神が花開いている。それは当時の躍進する台湾社会に対する作家の期待と想像を体現し、台湾美術史に新たな章を開いた。
  
日本で美術を学んだ最初の人物 

黄土星(ホアン・トシュイ1895-1930)は、日本による台湾植民地支配の初年、台北市艋舺の祖師廟の裏通り(現在の萬華)で生まれた。彼は台湾美術の先駆者なだけでなく、台湾人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誇りに思い、祖国の人々のために、島の美しさに見合う精神文明を創造したいという思いで、不朽の作品制作に青春の血と汗を日夜全力で注ぎ込んだ。台湾留学生として初めて東京美術学校(現・東京藝術大学)で彫刻を学び、台湾作家として初めて「帝展」に入選した。帝展に4回入選し、この世代のアイコン的存在となった。

黄は《甘露水》で再び帝展に入選し、翌年の東京平和記念博覧会の台湾館にも招待された。台湾で初めての裸体彫刻であるこの作品は、頭を少し上げて姿勢を正し、後ろの貝殻に手をそっと置いている女性像で、表情は穏やかで力強く、顔は自信に満ちて輝いている。
             
1922年、黄は日本の東洋協会の三井氏の招きで、雑誌『東洋』に「台湾に生まれて」という記事を発表し、創作に関する貴重な独白と台湾への熱い思いを記した。彼の率直さ、真摯さは、消しさることのできない台湾のローカルなアイデンティティが強く感じられ、印象深い。黄は見えない未来に対して独自のビジョンを持ち、時空を超えて、島の人々の覚醒と努力を見たいと願っているかのようだ。彼は「ある国に生まれてその国を愛し、この土地に生まれてこの土地を愛する。これが人間の常です」とも語っている。

1919年、25歳の黄は、《甘露水》という宗教的な主題の枠組みにおいて、エロティシズムや凝視に関するものを回避しつつ、素朴で、誠実で、純粋さを備えた、自信に満ちた雰囲気で背筋を伸ばした台湾女性を代表する本尊を建立しようと考えた。大きな貝殻が直立して向き合っているのも偶然ではないし、女性の手の配置や姿勢もランダムではない。観音様から甘露を授かるために意図的にオブジェクトを設定した、形式と内容の巧みな流用である。羊文漪の論文によれば、《甘露水》は台湾を表象する女性像とされ、頭を上げて瞑想に目を閉じた姿勢で提示される。* 観音様と鑑賞者の間にいる女性は、目を閉じて聖水を導くことで、自分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義務においてさらに大きな役割を担い、自信に満ちた態度で現実を反転させることに成功している。作家の台湾の未来への抱負は「台湾は、神々の加護のもと、海から浮上する」という言葉として語られる。

1930年の帝展の前夜、黄は水牛の大型レリーフの制作中に、過労を原因とする腹膜炎のため東京で死去した。36年という短い人生だった。

《甘露水》の謎

黄の遺作の数々を振り返ることは、彼の人生の激動の運命を辿ることだ。1945年に日本統治が終わり、1946年に台湾省議会が台湾教育会館を引き継ぎ、1954年に台湾省議会は台湾省臨時省議会に改組された。1958年、台湾省臨時議会は台中市霧峰郷(現在の台中市霧峰区)に移転した。完成したばかりの会議棟にすべての物品が移された。想像できるだろうが、当時、一方で台湾の意識や文化が抑圧され無視され、他方で裸体像が風紀を乱すものと疑われていた。当時の白色テロ後の社会的雰囲気と相まって、《甘露水》の芸術的成果は理解されず、官庁もその重要性を擁護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島国台湾が日本の植民地支配を経て、国民党政府が台湾に移り、戒厳令が解除され、困難で波乱に満ちた時代を送った。台湾に移転してきた国民党政府が持ち込んだ大中国文化の優越意識は、台湾人の創作が台湾独立意識に汚染されているとし、大蛇か猛獣のようになった。国民党議員が好まない《甘露水》は目障りなものとされ、運送会社は省議会から離れた場所に移動するよう命じられたが、どこへかは指示されなかったため、結局は台中駅近くの空き地に放置して、風雨にさらしていた。創造の自由と開放思想を象徴するこの像は、正面から女体を見せているというだけの理由でがらくたとして軽んじられ、弊履のごとく捨てられ、像のプライベートな部分に墨をぶちまけて汚す恥知らずな者たちもいた。
  
駅の隣で外科医院を開いていた張鴻標(チャン・フンビャオ)はそれに耐えきれず、近くで鑑賞し保管しようと、ついに運送会社に頼んで500kgの大理石の彫刻を医院の1階の隅に移動した。1958年から1974年まで、《甘露水》は張医院の1階にあった。院内に作品を展示するのは普通のことで、16年間なにも問題はなかった。しかし、1970年代の台湾では、思想的粛清の嵐が吹いており、知識人たちを怯えさせていた。1972年から1975年にかけての国立台湾大学の哲学科事件をはじめ、社会に多くのスパイが存在して、殺伐とした雰囲気がったちこめていた。張の家族は《甘露水》を引き受けたことにプレッシャーを感じていた。1974年、医師である張は、自分の健康状態の悪化に気付き、作品を守れなくなることを恐れて、《甘露水》を完全に封印し、時局の影響を避けて眠らせることにした。2年後に張は亡くなり、《甘露水》は張家の子孫にとっての暗黙の秘密となった。6人の子供たちが「正しい人、正しい時を待て」という父の遺訓を奉じて、《甘露水》を守るという遺言を遂行した。
     

正しい人と正しい時。箱を再び開く。
   
2020年、台北師美術館の「不滅の青春-台湾美術再発見」展で展示された黄の「少女像」(1920年)は、東京美術学校の卒業展で発表したもので、のちに黄の母校である大稲埕公学校(太平國小学校)に寄贈した。多くのロビー活動と努力の末、「少女像」は同校から借り出され、修復しクリーニングされ、そして展示された。東京美術学校の後輩である森純一氏が日本から台湾に赴いて、100年前の作品を専門的に処理し、満足いく成果に至った。 
   
しかし、黄の歴史的な大作《甘露水》がなかったことは、北師美術館の林漫麗教授とそのチームの気がかりだった。《甘露水》が休眠していた頃、幸いにも白色テロ時代の台湾の政治的・社会的混乱を免れた。2021年は台湾文化基金の100周年にあたり、各地で、この世代の社会的エリートの記憶を大切にし、台湾人の意識啓発に貢献するための記念活動が行われた。張家の六兄弟は「正しい時、正しい人」が現れたと知り、両親が願った《甘露水》の返還を叶えるにはどうすればいいか見通しが明らかになった。まるで天の摂理のように闇の中を力が動いた。かすかな曙が訪れ、47年間眠っていた《甘露水》が目覚め、作家自身やその故郷、祖国への願いを具現化したこの幻の傑作は、2021年9月6日、張家の子孫によって正式に文化省の永久収蔵品として引き渡され、日本の修復家・森淳一が修復し、今年12月に北師美術館で再展示され、世界の視野に戻ってくる。 
 
生命ははかないものだが、黄の芸術的志向は早くも、「台湾に生まれて」という一文に明白となっていた。「不死を叶える方法はただ一つ、それは精神の不朽である。」創造を通じて思想が次の世代に受け継がれていく。すべての台湾人の心からの願いは、黄が言った「フォルモサの時代」、「台湾、神の加護の下、海から浮上する台湾」が早く実現することだ。

図1. 黄土水 《甘露水》 大理石彫刻 (北師美術館,黃邦銓、林君昵提供)
図2. 狩野芳崖《悲母観音》1888年 絹本彩色。195.8×86.1cm(東京藝大美術館藏)
図3. 黄土水 《甘露水》1919年 大理石 80×40×175cm
図4. 台湾人をイメージした彫刻《甘露水》(北師美術館,黃邦銓、林君昵提供)


百年國寶:《甘露水》再發現 
文/吳達坤

她的頭微微仰起,姿態挺直,雙手輕輕放在身後的蚌殼上。光落在她舒緩而堅強的面容,綻放昂然向上的精神,也寄寓了藝術家對彼時正大步向前的臺灣社會的期盼與想像,更開創臺灣藝術史上的新篇章。 
 
留日學習美術第一人 
 
黃土水(1895-1930)出生於日本殖民治台初年(1895),在台北艋舺祖師廟的後街(今日的萬華)出生,他不僅是臺灣美術的先鋒,更以臺灣人的認同自豪,他日日夜夜地敲擊,將青春血汗全力灌注於不朽的作品中,意圖為故鄉的人們打造與美麗之島相襯的精神文明。他成為首位到東京藝術學校學習雕塑的台灣留學生,也是第一位入選日本帝展的台籍藝術家。他曾多達4回入選帝展,成為同儕偶像。 

黃土水以《甘露水》再度入選帝展,隔年受邀於東京和平紀念博覽會台灣館展出。《甘露水》是台灣首座裸體雕像,刻劃一名女子頭微微仰起、姿態挺直,雙手輕輕放在身後的蚌殼上,神情舒緩而堅強,臉上綻放自信光采。                     
 
1922年黃土水接受日本「東洋協會」三井先生的邀稿, 在《東洋》雜誌發表〈出生於臺灣〉一文,留下一篇珍貴個人創作獨白與熱愛台灣的炙熱心情。 坦率、真誠,流露出濃郁化不開的臺灣在地認同感,讓人留下無比深刻的印象。黃土水對於不可見的未來,有著他自己最為擅長的視域力,穿越時空,憧憬期盼也似乎已然看到島上人們的覺醒與努力。 如同他所言:「出生在這個國家便愛這個國家,生於此土地便愛此土地,此乃人之常情。」
 
1919年,25歲的黃土水要豎立代表台灣女子的本尊,帶著樸拙、真實與清純,同時避開情色或凝視的相關連接,她昂首入定於自信氛圍當中,守住《甘露水》本身宗教性題材的框架裡。那只大貝殼豎立正中對開的處理或並非偶然,》女子雙手的置放位置與姿態,也非隨機信手捻來,從形式上並包含內容的巧妙挪用,他刻意設定收受觀音甘露水的客體。根據羊文漪 Yang Wen-I 的研究論點。《甘露水》成為代表台灣的女性主體,以昂首閉目入定方式來做處理,等於強制性的令神明福祉讓渡,結為正果。介於觀音與觀者之間,那位閉目入定引領觀音聖水的少女,她在身份角色的扮演,職責任務更為重大,以自信的姿態,成功的扭轉了現實。訴說藝術家對台灣未來的渴望:「臺灣,在神明庇佑下,自海洋崛起」。 
 
1930年帝展前夕,黃土水因趕製大型浮雕《水牛群像》時過度操勞,併發腹膜炎於東京辭世。 結束短暫 36歲的生命。
 
《甘露水》的塵封之謎
 
回望黃土水眾多遺作,如他一生的多舛命運。1945年日治結束,1946年台灣省參議會接管台灣教育會館,1954年台灣省議會改制為台灣省臨時省議會,1958年台灣臨時省議會遷往台中霧峰鄉(今臺中市霧峰區)新落成的議事大樓,所有物品隨之搬遷。可想而知,彼時一方面台灣意識文化被壓抑忽視,二方面雕像是正面裸體,有妨害風化之嫌,再加上當時白色恐怖之後的社會氛圍,《甘露水》的藝術成就不曾被理解,同時官方也無法珍視其重要性。如同台灣島國走過日治殖民統治、國民黨政府遷台,戒嚴解嚴,多事之秋,坎坷難行。隨國民政府遷台帶來的大中國文化優越感,更加歧視台籍人士的創作,指涉沾染台獨意識,如洪蛇猛獸。不討國民黨議員喜歡的《甘露水》,被認為礙眼,貨運公司領命搬離省議會,但要搬到那裡,卻沒有指令,棄置在台中火車站附近的空地上,任其風吹雨淋,獨自生滅。甚至,這尊代表自由創作、開放思想的《甘露水》,只是因為以正面女體示人,引來衞道人士撻伐,被棄之如敝屣,更被不肖之徒,於雕像私處,潑墨污毀,情何以堪? 
 
於車站旁開設外科診所的張鴻標十分不忍,於是再央請貨運公司,把500公斤重的大理石雕作品,搬到診所一樓隅角擺置,就近欣賞與保管。《甘露水》從1958年到1974年,在張鴻標診所一樓,長達16年。診所擺放藝術品,是很正常之舉,16年來也相安無事。但是1970年代的台灣,吹起思想整肅風,令知識份子膽寒。包含台大哲學系事件從1972年鬧到1975年,社會上諜影幢幢,肅殺氛圍升高。張鴻標一家人,因為收容《甘露水》,備感壓力。1974年,學醫的張鴻標,察覺自己健康走下坡,恐怕無力再保護作品,於是他決定把《甘露水》徹底封藏,讓作品沈睡,以躲避時局的詭譎。2年後張鴻標過世,《甘露水》也成為張家後代,心照不宣的秘密,6名子女扛下保護《甘露水》未竟的遺願,謹記父親遺訓:「等待對的人、對的時局」。 
 
對的人,對的時局。再開箱 
  
去(2020)年當北師美術館舉辦「不朽的青春—台灣美術再發現」大展,黃土水創作於1920年的《少女像》,是他從東京美術學校畢業時,畢業展出的作品,後來,黃土水飲水思源,捐贈給母校大稻埕公學校(太平國小)。在一番遊說、努力後,一百年未淨身的《少女胸像》,從學校被借出、修復、清洗,到展出,把黃土水在東京美術學校學弟森純一,從日本敦聘來台,專業嚴謹處理百年老作品,結果很圓滿。 
 
不過,北師美術館林曼麗(LIN Mun-Lee)教授與團隊,念茲在茲還是黃土水史詩級巨作《甘露水》的缺席,《甘露水》沈睡期間,幸而躲過台灣政治詭譎不安的白色恐佈時期,與社會動盪的氛圍。2021年適逢台灣文化基金會一百週年,各界舉辦紀念活動,緬懷那一代社會精英,為台灣意識啓蒙的貢獻。張家六兄妹因而察覺「對的時局,對的人」隱然浮現,彼此之間也為圓父母歸還作品遺願,有了更淸楚輪廓。彷佛是天意,冥冥之中,有股力量在串流。微妙的曙光出現,長眠47年的《甘露水》,彷彿甦醒過來,讓這尊凝練了黃土水對自我、故鄉與民族期望的幻之逸作,直至2021年9月6日張家後代正式交付文化部永久典藏,由日本修復師森純一主持修復,將於今年12月在北師美術館重新展出,回到世人視野。 
 
生命易逝,然而黃土水的藝術志向早在〈出生於臺灣〉一文中寫明:「要能永劫不死的方法只有一個,就是精神上的不朽。」透過創作將意念傳世。所有台灣人的衷心期待,黃土水所言的「福爾摩沙時代」,「臺灣,在神明庇佑下,自海洋崛起」早日實現。 

圖1. 台灣雕塑家黃土水大理石雕塑作品《甘露水》(北師美術館,黃邦銓、林君昵提供)
圖2. 狩野芳崖《悲母觀音》1888,絹本設色,195.8×86.1cm,東京藝大美術館藏。
圖3. 《甘露水》1919,大理石,80x40x175cm
圖4.為台灣人的形象雕刻的《甘露水》(北師美術館,黃邦銓、林君昵提供)
 


Rediscovered in "Nectar Water"
 
WU Dar-Kuen
 
She raised her head slightly, her posture was straight, and her hands were gently placed on the clam shell behind her. The light falls on her soothing and strong face, blooming with an upright spirit, and also embodies the artist's expectation and imagination of the Taiwanese society that was moving forward at that time, and opens a new chapter in the history of Taiwanese art.
 
The first artist to study art in Japan
 
Huang Tushui ( N̂g Thóo-Suí ) (1895-1930) was born in the first year of the Japanese colonization of Taiwan (1895), and was born in the back street of Taipei's Mengjia Zushi Temple (today's Wanhua). He is not only a pioneer of Taiwanese art, but also recognized by Taiwanese identity. Proud, he beats day and night, infusing his youthful blood and sweat into his immortal works with all his strength, with the intention of creating a spiritual civilization for the people of his hometown that is in line with the beautiful island. He became the first Taiwanese student to study sculpture at the Tokyo Art School( Now Tokyo University of the Arts ) and the first Taiwanese artist to be selected for the Japanese Imperial Exhibition. He has been selected for the Imperial Exhibition up to 4 times and became a peer idol.

Huang Tushui was once again selected for the Emperor Exhibition with "Nectar Water", and was invited to exhibit at the Taiwan Pavilion of the Tokyo Peace Memorial Expo the following year. "Nectar Water" is the first nude statue in Taiwan. It depicts a woman with her head slightly tilted up, her posture upright, her hands gently placed on the mussel shell behind her, her expression is soothing and strong, and her face glowing with confidence.

In 1922, Huang Tushui accepted an invitation from Mr. Mitsui of Japan's " Toyo Association" and published an article "Born in Taiwan" in "Toyo Magazine " (東洋雜誌), leaving behind a precious personal monologue and a passion for Taiwan. Candid and sincere, showing a strong sense of local identity with Taiwan, which left a very deep impression on people. For the invisible future, Huang Tushui has his own best vision power. Traveling through time and space, looking forward to it seems to have seen the awakening and efforts of the people on the island. As he said: "I love this country when I was born in this country, and I love this land when I was born in this land. This is human nature."

 
In 1919, the 25-year-old Huang Tushui wanted to erect a deity representing a Taiwanese woman, with simplicity, truthfulness and purity, while avoiding the connection of eroticism or gaze. She held her head high in an atmosphere of confidence and held onto the religion of "Nectar Water" itself. Within the framework of sexual themes. The treatment of the big shell erected in the center is not accidental. The placement and posture of the woman's hands are not random. From the form and the clever use of content, he deliberately sets the object to receive the nectar of Guanyin. According to Yang Wenyi's research argument. "Nectar Water" has become a female subject representing Taiwan, presented in a posture with heads up and eyes closed, which is tantamount to forcibly transferring the welfare of the gods to a positive result. Between the Avalokitesvara and the viewer, the girl who closed her eyes into concentration and led the Avalokitesvara holy water, her role in the role of identity, her responsibilities and tasks are more important, and she succeeded in turning the reality around with a confident attitude. Tells the artist's desire for the future of Taiwan: "Taiwan, under the blessing of the gods, rises from the ocean."
 
On the eve of the Emperor's Exhibition in 1930, Huang Tushui died in Tokyo due to overwork and peritonitis in rushing to produce the large-scale relief "Portrait of Buffalo". End the short 36-year-old life.
 
The mystery of "Nectar Water"
  
Looking back at the many posthumous works of Loess and Water, like the turbulent fate of his life. After the end of Japanese rule in 1945, the Taiwan Provincial Council took over the Taiwan Education Hall in 1946. In 1954, the Taiwan Provincial Assembly was reorganized into the Provisional Provincial Assembly of Taiwan Province. In 1958, the Provisional Provincial Assembly of Taiwan moved to Wufeng Township, Taichung (now Wufeng District, Taichung City). In the newly completed conference building, all items will be relocated. It is conceivable that on the one hand, Taiwanese consciousness and culture were suppressed and ignored, and on the other hand, the statue was nude on the front, which was suspected of hindering weathering. Coupled with the social atmosphere after the white terror at that time, the artistic achievement of "Nectar Water" was never understood. At the same time, the official cannot cherish its importance. Just as the island country of Taiwan has gone through Japanese colonial rule, the Kuomintang government has moved to Taiwan, martial law has been lifted, and the troubled days have been difficult and difficult. The sense of superiority in the great Chinese culture brought about by the Nationalist government's move to Taiwan has further discriminated against the creation of Taiwanese people, referring to contaminating the consciousness of Taiwan independence, such as a huge snake and a beast. "Nectar Water", which was not liked by KMT members, was considered an eye-catcher. The freight company took orders to move away from the provincial assembly, but there was no instruction to move there. Birth and die alone. Even, this "Nectar Water", which represents free creation and open-mindedness, is just because it is shown in a positive female body, which attracts defenders to trash, and is abandoned like a scorpion. It is even more corrupted by shameless people in the private parts of the statue. Why is the love?
 
Zhang Hongbiao, who opened a surgical clinic next to the station, was very unbearable, so he asked the freight company to move the 500-kilogram marble sculpture to the corner of the first floor of the clinic for nearby appreciation and storage. From 1958 to 1974, "Nectar Water" was on the first floor of Zhang Hongbiao Clinic for 16 years. It is normal to display artworks in the clinic, and it has been fine for 16 years. However, in Taiwan in the 1970s, ideological purges were blowing , which made intellectuals frightened. Including the philosophical incidents of National Taiwan University from 1972 to 1975, there were many spies in the society, and the atmosphere of killings increased. Zhang Hongbiao's family feels pressure because of taking "Nectar Water". In 1974, Zhang Hongbiao, a medical doctor, realized that his health was going downhill, and he was afraid that he could no longer protect the work, so he decided to completely seal "Nectar Water" and let the work fall asleep to avoid the of the current political situation . Two years later, Zhang Hongbiao passed away, and "Nectar Water" became a tacit secret for the descendants of the Zhang family. The 6 children carried on the unfulfilled last wish of protecting "Nectar Water" .
 
Right people, right situation. Out of the box
 
Last year (2020), when the Museum of National Taipei University of Education( MoNTUE北師美術館). held the "Immortal Youth—Taiwan Fine Arts Rediscovery" exhibition, Huang Tushui's "Portrait of a Girl" created in 1920 was the work he exhibited when he graduated from the Tokyo Art School. Later, the source of drinking water from the loess was donated to his alma mater Dadaocheng Gong School (Taiping Elementary School). After a lot of lobbying and hard work, the "Girl Bust", which has not been cleansed for a hundred years, was loaned out, restored, cleaned, and exhibited at the school. The loess water was recruited from Junichi Mori, a student of Tokyo Fine Arts School, Japan.professionally and rigorously handling century-old works, the result is very satisfactory for all.
   
However, Professor LIN Mun-Lee and her team at the Museum of National Taipei University of Education( MoNTUE北師美術館), Nian Zi is still absent from the epic masterpiece "Nectar Water". While "Nectar Water" was sleeping, her escaped the white terror  of Taiwan's politics. A period of fear and social turmoil. 2021 coincides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Taiwan Cultural Foundation. All walks of life will hold commemorative activities to cherish the memory of that generation of social elites and contribute to the enlightenment of Taiwanese consciousness. As a result, the Zhang Family Six brothers and sisters noticed that "the right situation, the right people" were looming, and they also returned their works from their parents, giving them an even more cumbersome outline. As if it was the will of heaven, there was a force flowing in the dark. A subtle dawn appeared, and the 47-year-old "Nectar Water" seemed to have awakened, allowing this illusionary work that condensed the expectations of the loess water for self, hometown and nation until September 6, 2021. The descendants of the Zhang family were officially delivered. The permanent collection of the Ministry of Culture, presided over by Japanese restorer Junichi Mori, will be re-exhibited at the National Taipei University of Education( MoNTUE北師美術館) in December this year, returning to the world's vision.

Life is perishable, but Huang Tushui's artistic ambitions were written in the article "Born in Taiwan" as early as: "There is only one way to be immortal, and that is spiritual immortality." Passing down his ideas through creation. The sincere hope of all Taiwanese people is that the "Formosa era" that Huang Tushui said, "Taiwan, under the blessing of the gods, rises from the ocean" will be realized soon.

Photo 1. Taiwanese sculptor Huang Tushui‘s marble work  "Nectar Water" (Photo credit , MoNTUE,Huang Bangquan and Lin Junni)
Photo 2. Kano Hogai "Sorrowful Mother Guanyin" 1888, ink and color on silk, 195.8×86.1cm, Collection of Tokyo Art Museum
Photo 3. "Nectar Water"1919, Marble, 80x40x175cm
Photo4. "Nectar Water" carved from the image of Taiwanese (Photo credit , MoNTUE,Huang Bangquan and Lin Ju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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