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8) 제주 삼도동 ‘목화수예점’ 송경열 장인

창간 17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2021년 시작합니다. 오래된 점포(老鋪)와 그 속에 숨은 장인(匠人)들이 소개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제주시 삼도1동 골목에 위치한 목화수예점. 간판을 보면 앞자리에 7이 없는 옛날 전화번호가 눈에 띈다. ⓒ제주의소리
제주시 삼도1동 골목에 위치한 목화수예점. 간판을 보면 앞자리 국번에 7이 없는 예전 두자리의 전화번호가 눈에 띈다. ⓒ제주의소리

장인의 뜨개질 솜씨는 친정어머니로부터 왔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어머니가 손끝으로 옷과 모자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유년기에 가장 선명한 기억이다. 8남매 중 둘째였던 그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동생들의 옷을 만들곤 했다.

중학교 졸업 후 낮에는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녀의 인생의 모토가 된 꾸준과 성실은 이 때 새겨진 삶의 태도다.

스물 일곱, 결혼과 함께 좋아하면서도 자신 있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했다. 결론은 수예점이었다. 일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점포가 딸린 집을 찾았다. 제주시 시민회관과 KAL호텔 사이의 맞은편 중앙여자중학교로 향하는 삼도동 골목의 초입, 자그마한 1층짜리 집을 얻었다.

상호를 고민할 때 부모님이 목화솜을 재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수예점 이름을 ‘목화’로 지었다. 솜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가게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돌이켜보니 손바닥만한 이 공간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아들 둘을 모두 낳고 길렀다. 제사 명절도 다 지낼수 있었던 마술같은 공간이다. 

1981년, 송경열(67) 뜨개질 장인의 목화수예점이 역사를 시작한 순간이다.

이 좁은 작업실 겸 사랑방에서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고요하고 아늑한 이 곳은 사랑방이자 작업실이면서 수련장이다. ⓒ제주의소리
이 좁은 작업실 겸 사랑방에서 수많은 수예 작품들이 탄생했다. 고요하고 아늑한 이 곳은 사랑방이자 작업실이면서 수련장이다. 신혼살림도 이 좁은 공간에서 보냈다. 아이들 둘도 모두 여기서 낳고 제사 명절도 다 지냈던 마술같은 공간이다.  ⓒ제주의소리
수예점 한 켠에 가득 쌓인 형형색색의 털실들. 장인의 손끝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수예점 한 켠에 가득 쌓인 형형색색의 털실들. 장인의 손끝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소리

동네 사랑방이 되어야 진짜 수예점

목화수예점 안으로 들어가면 털실로 가득한 좁은 회랑(回廊)을 지나는 기분이 든다. 흰 실로 매듭지은 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뜨개질을 하는 장인이 보인다. 앉으면 가득 쌓인 부드러운 재료들이 아늑한 벽이 된다.

“여기서 살림을 시작했어요. 옛날엔 이렇게 물건 종류가 많지 않고 단출했지요. 남편과 둘이 살다 첫째가 태어나고 둘째가 태어나고, 네 명이 여기서 지내게 됐죠. 명절과 제사도 이 안에서 다 지냈어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정까지 불을 켰다. 성실함과 꾸준함은 서서히 빛을 보게 됐다. 모자, 목도리, 스웨터, 가방... 하나 둘 입소문이 퍼지면서 주문량과 함께 뜨개질을 배우는 사람도 늘었다. 재료 구입만 하면 수강료를 받지 않는데다 장인의 손기술이 섬세하고 꼼꼼했기 때문이다. 

“돈 벌 목적으로만 한다면... 굵은 실 가지고 듬성듬성 빨리 뜨면 돈 벌기 좋긴 하겠지만, 나는 장기적으로 10년을 입어도 똑같고, 평생 간직해서 입을 수 있는 것을 원했어요”

자신감이 붙었다. 국내 타 지역, 해외에서 주문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모방하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하는 습관도 목화수예점의 명성을 더했다. 공무원이었던 남편이 쉬는 날 배달을 도와야 할 정도였다. 동네 사랑방이 되면서 사람들은 목화수예점에 앉아 뜨개질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1980년대, 송경열 장인이 두 아들과 함께 지금 목화수예점 자리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이제 마흔, 서른여덞이 됐다.ⓒ제주의소리
1980년대, 송경열 장인이 두 아들과 함께 지금 목화수예점 자리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이제 마흔, 서른여덟이 됐다. ⓒ제주의소리
목화수예점 안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송경열 장인. 그녀는 인터뷰 중에도 대바늘을 놓지 않았다. ⓒ제주의소리
목화수예점 안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송경열 장인. 그녀는 인터뷰 중에도 대바늘을 놓지 않았다. ⓒ제주의소리

“밤 10시, 11시 늦은 시간까지 하니까 좋다고 하더라고요.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얘기하고 뜨개질 하다 가도 되니까. 홈쇼핑 제품 누가 뭐 불러달라면 불러주고, 인삼같은 것도 한꺼번에 많이 불러서 나눠 먹고. 대추도 불러서 나눠 먹고. 만물상회에요 만물상회. 그래서 여기 단골들하고는 그냥 가족같아요”

처음 제주도에서 몇 개 안되던 수예점이, 50군데로 불어나고, 다시 하나 둘 사라지는 그 긴 시간 동안 목화수예점은 한 자리를 지켰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거치면서 목화수예점은 공동의 기억이 됐다.

“여기 앞에 제주중앙여중이 있잖아요? 옛날에 학생들 방학숙제로 뜨개질 하면 제가 가르쳐 주기도 했었어요. 학교 다닐 때 한 번 배웠다가 나중에 아기 엄마가 돼서 다시 뜨개질 하러 온 학생들이 있어요. 또 외국에서 살다 몇 십년 만에 와서 ‘아직도 하고 있으려나’하고 들렀던 사람도 있어요. 저를 보고 너무 좋아하는 거 있죠. 그러면 서로가 행복한 것 같고, 지금까지 하길 참 잘 했다 생각이 들죠.

예전에 뜨개질을 여기서 했던 강원도 분인데요, 뇌경색이 왔는지 병원에 입원했는데 말을 하지 못한대요. 그 분의 시동생이 이 소식을 알리면서 목화수예점의 실을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했어요. 병원에서 뜨개질을 했던 거죠. 나중에 어느 정도 잘 떠서 보내왔기에 제가 마무리를 잘 해서 완성시켜서 다시 보내드린 적이 있어요”

목화수예점 송경열 장인이 만든 스웨터. 한림수직 스타일 식의 꽈배기 무늬(장인은 이를 '전통무늬'라고 불렀다)가 눈에 띈다. 그의 섬세한 솜씨 덕분에 타 지역은 물론 해외에서도 제작 주문이 온다. ⓒ제주의소리
목화수예점 송경열 장인이 만든 스웨터. 한림수직 스타일 식의 꽈배기 무늬(장인은 이를 '전통무늬'라고 불렀다)가 눈에 띈다. 그의 섬세한 솜씨 덕분에 타 지역은 물론 해외에서도 제작 주문이 온다. ⓒ제주의소리
목화수예점 안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송경열 장인. 그녀는 인터뷰 중에도 대바늘을 놓지 않았다. ⓒ제주의소리
목화수예점 안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송경열 장인. 그녀는 인터뷰 중에도 대바늘을 놓지 않았다. ⓒ제주의소리

자연스레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뜨개질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녀에게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애들이 어릴 때 손님이 와서 ‘무슨 무늬 넣고 뜰까요?’라고 하면 우리 애들이 ‘꽈배기요!’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우리 엄마는 잘 뜨는데 왜 빨리 못 떠요’라고 말하기도 하고.(웃음) 두 애가 다 엄마가 뜨개질 하는 걸 좋아했어요.”

반듯하고 똑똑하게 자라난 두 아들을 보면 그녀는 “모범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애들이 엇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며 “아이들이 정말 착하다”고 거듭 미소를 띄웠다. 

남은 고민은 이 공간의 생명력이다. 평생을 담은 공간이자 마을 사람들에겐 소중한 사랑방인 이 곳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이 뜻을 이어갈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최근 인기 편집숍에 진열될만큼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받았기에 더욱 아쉽다.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며 진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다 가르쳐주고 싶거든요. 요새 뜨개질 카페도 잘 되거든요? 나중에 며느리가 들어와서 그쪽으로 관심이 있으면 카페 운영하라고 하고 나는 작품 만들고. 이렇게 원데이 클래스하고... 그렇게 하면 정말 따뜻할 거 같아요”

조카의 도움으로 개설된 목화수예점 인스타그램 계정(왼쪽). 목화수예점의 작품들은 카페와 함께 운영되는 한 제주시 원도심의 한 편집숍에도 진출했다. ⓒ제주의소리

뜨개질의 교훈-차근차근, 조금씩, 열심히

뜨개질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니들포인트, 코바늘, 대바늘... 모자, 목도리, 가방, 매트, 커튼 등 응용할 수 있는 게 무한대다. 이 상상력을 차분하게 펼치다보면 평안과 마주할 수 있다고 장인은 말한다. 옷을 뜨는 일은 일종의 수련과도 같다는 의미다.

“머리가 복잡하고 신경쓰는 일이 있을 때 뜨개질을 하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스트레스도 풀린대요. 마음이 안정되면서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그래서 이게 태교에도 좋고 치매예방에도 좋은 것 같아요.”

그녀는 지난 40여년을 반추해보며 “항상 최선을 다해서 별로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가족에게도, 옷을 만들 때도, 사람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줄 때도 항상 ‘차근차근, 조금씩, 열심히’를 마음에 새겼다. 

목화수예점 송경열 장인이 인터뷰 중 과거를 회상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는 지난 40년을
목화수예점 송경열 장인이 인터뷰 중 과거를 회상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는 지난 40년을 "떳떳하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제주의소리

“늘 한결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소망이에요. 사람들이 싫증을 느낄지는 몰라도 나는 늘 똑같은 사람이 좋아요. 변화가 많은 사람보다 항상 똑같은 사람. 목화수예점도 한결같이, 똑같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해요. 이 집이 뜯기지 않는 한은 그냥 이 자리에서 할 것 같아요. 여기서 되도록 그대로 하려고 안 옮기는 거에요.

옛날에 장사 잘 될 때 사람들이 더 큰 데 옮기지 않겠냐고 해도 내 수준에는 이게 딱 맞다고 생각했어요. 더 이상 욕심 안 부리고 그렇게 하면 되죠. 인생의 마무리를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품에서 배운 뜨개질은 평생의 친구가 됐다. 그 덕에 가족, 마을, 단골과 함께 오랜 시간 한결같은 행복을 나눌 수 있었기에 다시 돌아봐도 큰 축복이다. 더욱 감사한 것은 그녀에게 준 깨달음이다.

“뜨개질처럼 노력해서 안될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건너 뛸 수도 없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하지 않으면 완성이 안 되니까요.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건너뛰어서 대충해서 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살아있는 한은 뜨개질을 할 것 같아요. 손가락이 움직일 때까지 뜨개질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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