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69) 김준기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지리산은 한반도 남단에서 가장 높고 깊은 산이다. 또한 지리산은 지리적인 높이와 깊이의 수치 이상으로 장대한 역사적 서사를 품고 있으며, 특히 현대사의 깊은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지리산둘레길’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자산이 있다. 그것은 지리산 주변을 굽이굽이 휘감고 도는 약 300km에 거리의 걷는 길이다. ‘지리산둘레길’은 걷기라는 신체적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을 공동체와 마주하며, 자연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마침내 우주와 생명의 뜻을 새기고자 하는 수행의 장이다. 이러한 ‘지리산둘레길’의 가치를 예술적 실천과 융합하고자 하는 예술 프로젝트가 있다. 2014년에 첫 걸음을 내딛은 <지리산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우주적 정신성을 바탕으로 생명과 평화의 예술을 추구하는 <지리산프로젝트>는 생명평화의 의제특정성과 지리산의 장소특정성을 살리는 ‘특정적 예술’이며,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연결하는 ‘융합의 예술’이고, 도시와 지역과 국가를 넘나드는 ‘사이의 예술’을 지향한다. <지리산프로젝트>는 그동안 ‘우주예술집’(2014), ‘우주산책’(2015), ‘우주여자’(2016), ‘평화예술대토론회’(2018), ‘이시가키 카츠코 개인전’(2019) ‘생명평화’(2019) ‘타이치 요나하 개인전’(2020), ‘임채욱 개인전‘(2020) 등의 전시와 레지던시, 토론 등을 추진해왔으며, 올해는 ‘여순과 지리산’을 주제로 답사와 퍼포먼스, 토론 등을 진행했다. 

<지리산프로젝트 2021: 여순과 지리산>은 여순사건과 지리산을 연계한 프로그램으로서, 제주도와 여수와 광주, 강원, 충청, 경기, 서울 등 전국 각지의 예술인들이 모여서 학살과 항쟁의 서사를 돌아보며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였다. 이 행사는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1948년의 역사적 사건을 재성찰하며, 여순사건의 현재성을 평화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배움의 시간을 위하여 ▶여수와 순천의 항쟁지를 답사하는 <여순항쟁답사>, ▶평화예술을 지향했던 작고 작가 정재철의 유작을 되살리는 <정재철기림사업>, ▶제주와 여수, 광주, 지리산, 수도권 등 여러 지역 사람들이 함께 하는 <평화예술토론회> 등으로 이뤄졌다. 

올해의 <지리산프로젝트>가 여순사건에 초점을 맞춘 것은 ‘여순사건 특별법(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2021.6.29.)에 주목하여, 반란과 항쟁, 토벌과 학살의 서사로 얼룩진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마주하는 예술적 실천의 출발점을 만들기 위함이다. 여순의 항쟁 정신은 제주도와 닿아있으며, 지리산으로 이어지고, 광주로 되살아났다. 이러한 역사적 연결고리에 주목하는 제주도와 여순과 광주와 기타 지역의 예술인들과 종교인, 시민들이 함께 모여 여순항쟁의 주요 장소를 답사하고, 현장 토론회를 가지며, 지리산 실상사에 모여 평화예술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첫째 날인 10월 16일 토요일에는 <여순항쟁답사>를 했다. 제주와 광주와 여수 순천 예술인들이 여순평화예술 전시와 창작 현장을 찾아 평화예술 연대의 장을 여는 자리로서, 여순항쟁의 역사적 현장을 답사하며 여순의 항쟁과 학살의 진실과 만나는 기회였다. 박금만 개인전 관람에 이어 역사 연구자 주철희 박사가 이끄는 여순항쟁지 답사를 했다. 여순항쟁의 진앙지였던 14연대 주둔지 방문과 여수인민위원회 활동의 중심지 진남관 등에서 일행들은 역사의 현장을 통하여 실상을 마주하는 역사인식을 체험했다. 이어서 오랫동안 한센인 마을로 고립되어있던 곳을 예술재생으로 개방한 박성태 작가의 에그 갤러리를 찾아 공동체예술의 의미를 공유했다.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여수 예울마루에서 열린 박금만 개인전.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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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 박사의 여순항쟁지 답사.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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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에그 갤러리에서 열린 집담회.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둘째 날인 10월 17일 일요일에는 남원 실상사에서 <정재철기림사업>을 진행했다. 정재철 작가는 한반도의 여러 도시와 지역은 물론, 대륙과 해양을 종횡무진하며 공동체와 생태, 재생, 연결, 과정, 비물질, 평화의 가치를 추구한 예술가이다. 정재철의 작고 1주년을 추념하는 사업으로서, 그가 기르던 유기(遺棄) 식물들을 실상사 경내에 옮겨 심었다. 또한 도법스님과 정재철이 함께 만들어왔던 대숲 법당에서 붉은 실 끈을 엮는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고인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자리를 가졌다. 버려진 화분의 식물들을 거둬들여 정성스럽게 키워온 정재철의 행위는 생명평화의 윤리적 실천이자 예술적 실천이었다. 대나무 숲을 정리하여 법당을 만든 것 또한 생명과 종교적 영성을 연결한 개념예술이다. 작고 작가의 작품을 살아있는 사람들의 행위로 재구성했으니, 이제 정재철의 식물성 퍼포먼스는 지속가능한 개념예술로 되살아난 셈이다. 

이어서 실상사 선재집에서 열린 <평화예술토론회>는 여순 사건을 항쟁과 학살의 맥락에서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법제정과 함께 더욱 구체화하기 시작한 올해, 생평평화운동의 본산인 지리산 실상사에서 종교인과 연구자, 예술인 등이 함께 역사적 유산을 동시대의 과제로 재구성하고 그것을 평화예술로 승화하여 토론회를 열었다. 박태규의 오월미술, 정연두의 DMZ 평화예술, 김봉준의 치유예술 등 참가자들은 각자의 관점으로 평화예술을 이야기했다. 이날의 토론 자리를 열어준 도법스님은 평화라는 개념은 평화가 깨지는 순간에 또렷하게 그 가치가 드러난다는 점을 전제로 평화의 조건 만들기를 강조했다. ‘평화가 깨지고 있는 사건의 현장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개입하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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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철이 기르던 유기식물들을 실상사 경내에 옮겨 심었다.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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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대숲법당의 실끈 설치 작업. 정재철 원작, 바람 그물을 참가자들의 협업으로 되살렸다.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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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선재집에서 열린 평화예술토론회. 사진=김준기. ⓒ제주의소리

1980년대 이래 ‘4.3사태’가 ‘4.3사건’으로, 나아가 ‘4.3항쟁’으로 그 정체성을 새롭게 찾아온 것처럼, ‘광주사태’ 또는 ‘광주학살’도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 ‘광주민중항쟁’으로의 정명 과정을 거치고 있듯이, 2021년 올해를 기점으로 ‘여순반란사건’은 ‘여순사건’으로, 나아가 ‘여순항쟁’으로 제 이름을 찾는 정명(正名)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대립과 갈등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한반도에서 제주와 광주와 여순은 반란과 학살, 사태, 사건, 항쟁 등의 명명을 쉽사리 정리하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 사용하는 중립적인 용어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 ‘제주4.3’, ‘광주5.18’처럼, ‘여순10.19’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 또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불가피한 이름이 아닐까. 역사는 망각의 어둠을 뚫고 자라나는 기억투쟁의 산물이라는 점. ‘여순10.19’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일이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 중국어, 일본어, 영어 번역본은 추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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