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남성의 당연한 권리나 역사·문화의 일부 아닌 ‘범죄’

1996년 6월 한 강간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모든 일간지에 소개된 일이 있다. 두 명의 남성이 한 여성을 성폭행한 뒤 구속됐는데 문제는 이 여성이 성 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대법원에서 강간죄가 아니라 강제 추행죄로 결론을 내렸다.

강간죄의 대상은 ‘부녀’로 한정되어 있는데 피해자의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해 보니 뒷자리가 1로 시작했던 것이다. 대법원은 “성 염색체나 본래의 성기구조, 남자로서의 생활기간, 여성으로서의 생식능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여자로 볼 수 없다”며 강간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이 판결은 우리 사회가 어디에 준거점을 두고 규정하는지 잘 보여준다. 범죄에 대한 판결임에도 불구하고 범죄 성립 당시의 상황–성폭행 당시 범죄자와 피해자 모두 여성임을 의심치 않았다-보다는 생의학적 규정에 기대어 범죄의 중대함을 놓쳐버리는 과오를 저질렀다. 이 판례에 의하면 연예인 ‘하리수’는 일생동안 어떤 경우에도 ‘강간’을 인정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이처럼 성폭력이라는 것은 법정에서 피해자의 피해를 관철하기 힘든 가장 큰 4대 강력 범죄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성폭력이 사회 통념적으로 여성에게 중요시되는 순결과 연결되어 피해사실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으며 대체로 남녀 둘만이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므로 항상 정 반대의 진술서가 확보되고 주로 피해자는 자신이 얼마나 정숙했고 본인이 유도하지 않았음을 아주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우스운 꼴이 된다. 우습게도 성폭력은 피해여성이 ‘죄의식’을 갖고 가해남성이 ‘피해의식’을 갖는 매우 특이한 범죄이다.

합의를 한 것은 죄를 경감시키는 게 아니라 유죄를 인정하는 증거

지역사회에서 지난 5월17일 발생한 한 담임교사에 의한 아동 성 추행 사건은 사건 발생 90일이 지난 지금도 가해 교사에게 법적인 처벌이나 신분에 아무 변화를 주지 않았다. 해당 교육청은 단지 가해교사에게서 모든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진술서 하나만 달랑 받고는 법적인 결과에 따라서 징계를 결정할 예정일 뿐이다. 상당히 많은 성폭력사건이 그렇듯 특히 9살짜리 진술과 50대 교사의 진술에서 어느 것이 유리할까? 10세 미만의 아동진술이 일관되고 논리적이며 상대방의 거짓말을 뛰어넘는 조목조목한 반박의 진술이 가능할까?

아동을 진단한 의사에 의하면 한 두번이 아니라 10회 이상의 성추행이 있었고 정신적 치료를 위해 4주의 진단을 내렸다.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를 필요로 하겠는가, 게다가 가해교사의 부인이 돈을 주면서 합의를 유도하여 성폭력 합의금으로는 최고의 액수를 건넸다. 절대로 그런일이 없다는 피해자는 무죄를 주장해야지 왜 현금다발을 건네면서 합의를 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정황이 있어야 이 사건의 유죄를 증명하고 가해교사의 파렴치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신중한(?) 검찰과 교육청은 교사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천년동안 남성의 당연한 권리, 역사와 문화의 일부였던 성폭력… ‘범죄’

많은 사례에서 그 많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것은 무죄여서가 아니라 사회가,제도가 그들을 놓아주고 있는 것이다. 수천년동안 남성의 당연한 권리, 역사와 문화의 일부였던 성폭력이 여성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범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폭력 가해자로 고소당한 남성이 (억울한) 이유는 “(남들도 다하는데) 나만 걸렸다”는 심리다. 가해자가 처벌받는 경우가 워낙 드물기 때문에 처벌받는 가해자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남성문화는 강간범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재수없이’ 잡힌 남성이 ‘남성의 위엄’을 훼손한다고 본다.

한국형사정책 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일반여성들이 일생동안 경험한 성폭력의 유형은 가벼운 추행이 76.4%, 성기노출 74.5%, 성희롱 48.6%, 음란전화 46.3%, 심한 추행 23.7%, 강간미수 14.1%, 강간 7.7%, 어린이 성추행 6.5%등으로 나와있다. 성폭력 신고율은 전체 발생건수의 2.2%에 불과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의 여성이 피해자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경찰청 통계에서 2002년 접수된 성폭력 범죄는 1만1580건이다. 역산하면 한해 성폭력 발생건 수는 약 100만건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사회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보호하는데 더 적극적인 것은 아닌 지 생각해 볼 일이다.

청소년 성범죄자는 청소년 대상 업종에 절대 근무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최근에 제6차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공개가 있었는데 제주지역에도 7명이 포함됐다. 성매수 1명, 강간 5명 , 강제추행 1명이며 성매수 범죄자는 무려 101회에 걸쳐 10대 소녀의 성을 매수했고, 강간 5명은 모두 10대 소녀를 상대로 강간했다. 이들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나이는 20대 2명, 40대 4명, 60대 1명이다. 지금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2470명이 공개 됐는데 제주지역은 59명이 공개됐다.

국무총리 산하 청소년 보호 위원회는 최근 ‘신상공개제도 개선 방안’을 내 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청소년 성범죄자가 일정기간 유치원, 학교, 학원 등 교육·보육기간에 취업하거나 이를 운영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이다. 재발방지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안이고 우리의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접근 제한인 셈이다. 이런 개정안이 하루 빨리 마련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다수의 법운용자들이 남성의 시각에서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지 말고 법에 의해서 정확히 처벌하길 요구한다.

물리적 성폭력이 1차 피해라면, 성폭력 사건에 대한 가해자 중심적 해석은 2차 피해라고 할 수 있다.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다. 상처는 사회가 성폭력 생존자를 존중하느냐, 가해자 처벌의지가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동의 부모가 합의했다는 이유로 처벌의 증감이 달라지기 이전에 범죄의 유형, 대상을 면밀히 검토해서 집 다음으로 가장 많이 머무는 학교를 안전한 지대로 만들 수 있기 바란다. 이 땅의 수십만 학부모에게 희망과 신뢰라는 단어를 심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여성도 국민이고 싶고 그 범주 한 가운데 모든 피해자가 희망을 갖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란다.

※ 김영란 님은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제주지역의 여성단체인 '제주여민회' 공동대표입니다.   앞으로  '여성의 눈으로 세상보기'란 코너로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를 펼쳐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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