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건공장군 김성조 현양위원회 위원장·수필가)

주민의 선봉에 서서 내 향토 제주도의 평화를 수호함으로써 내 가족과 내 조국이 산다는 교훈을 목숨 걸고 보여준 정의의 용사가 있었으니 바로 제주 을묘왜변(1555)의 4인 돌격대이다. 이외에 왜장을 사살한 김몽근(金夢根)의 공이 있으나 정병(正兵)이었다. 이 이까지 합치면 을묘왜변의 영웅은 다섯 분이다.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제주 을묘왜변(제2차 을묘왜변)은 왜구들이 전남 해안의 제1차 을묘왜변에서 분탕질을 하다가 귀국 길인 6월 25~27일 고립무원의 제주성을 아예 점령하여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했던 변란이다. 제주 을묘왜변에서 승전을 이끌었던 전략은 목숨 바칠 각오로 자원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등장이었다. 70명의 엄호부대가 따르긴 하였으나 자원 결사대 4명이 말을 타고 적진에 돌격해 1000명의 왜군을 통쾌하게 격퇴시킨 것이다.

정로위는 조선 중종 7년(1512)부터 광해군 무렵까지 존속한 정예 군인으로 중종 5년(1510)에 삼포왜란을 겪으면서 만들어졌다. 정로위 김직손(金直孫)은 1555년 3월 부임한 김수문 목사와 고령김씨 재종간(再從間, 6촌형제)으로 목사와 함께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직손의 자(字)는 군보(君輔)이며, 을묘왜변 평란 공으로 충훈부도사(都事)에, 선조1년(1568) 야인 토벌 공적으로 병조참의에 특진하였고,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갑사(甲士)는 조선 의흥부(義興府)에 딸린 군인으로, 1401년(태종 1)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의 기간병인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하여 엄격하게 시취되었다. 김성조(金成祖, 1527~1575)는 결사대로 자원한 것이지 갑사로 시취된 바 없어 단순히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甲軍, 甲兵, 甲首, 甲卒)의 뜻으로 쓰인 것 같다. 김성조는 엄장리 말테우리 출신으로 제주목 산하의 지인(知印)으로 뽑혀 있다가 왜변을 당하자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책을 진언하고 장인댁(교수관 김양필)의 9살 난 웅마를 타고 치마돌격대를 자원하여 전승을 거두었다. 나주김씨 강화진 낭장 김인충의 5대손이다. 

갑사 이희준(李希俊)은 전주이씨 출신이나 상세불명하다. 같은 전주이씨 항렬인 이희손(李希孫, 1497~1566, 양녕대군의 현손)은 제주 병진년(1556) 왜변 때 전공을 세운 전관(前官 光州牧使)인데 영암 을묘왜변시 대처하지 못한 이유로 제주에 장류(杖流) 중이었다. 이희준과 이희손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이희손은 병진왜변의 전공으로 을묘왜변의 패전을 설욕하였고 유배에서 풀려 무관직인 오위장에 등용되었고 다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문시봉은 남평문씨 33세 입도 15세 제주사람이며, 영평동 제단비(1977)에는 건공장군으로 새겨 있으나, 문씨족보에는 그의 부 문윤창(文胤昌)이 전승공로로 건공장군행충무위부사직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은 아직 상세불명이다. 

이영권의 『새로 쓰는 제주사』(2012)에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가운데 보인(保人)만을 지적하여 현역군인이 아니라 현역을 돕는 예비 병력에 불과했다고 하나 갑사로 지칭한 김성조와 이희준, 보인 문시봉(文時鳳)도 무관이 아닌 한량 출신으로 돌격대를 자원하여 ‘갑사’라는 임시직을 받은 것이다. 김몽근은 정규군의 한 사람이었으니 군·관·민이 합동으로 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오현교 다리 동쪽 끝에 제주시가 세운 을묘왜변전적지 기념비. 전적지 비를 다리 위에 세운 사례는 세계에 유일하다. 2000년에 세운 다리 위에서 1555년의 전쟁이 벌어졌나, 어떻게 다리 위에 전적비를 세울 수가 있는가. ⓒ제주의소리
오현교 다리 동쪽 끝에 제주시가 세운 을묘왜변전적지 기념비. 전적지 비를 다리 위에 세운 사례는 세계에 유일하다. 2000년에 세운 다리 위에서 1555년의 전쟁이 벌어졌나, 어떻게 다리 위에 전적비를 세울 수가 있는가. ⓒ제주의소리

장하다! 이들 4명의 돌격대는 정병 김몽근과 효용군 70여명과 함께 을묘년(1555) 6월 제주성을 노리는 왜구 1000여명을 격퇴시킨 것이다. 왜구들은 이 해 5월 전라도 해안 일대에서 살육과 약탈과 방화를 일삼다가 귀국길이었다. 이 제1차 을묘왜변에서 달량진절도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 한온(韓蘊)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왜구에 잡혀갔고, 수사(水使) 김빈(金贇)과 광주목사(光州牧使) 이희손(李希孫)은  패퇴하였다.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만이 간신히 버텨내었다.

왜구들은 귀국길인 6월 25일 전라도-제주도-북구주를 잇는 해상권을 장악하고자 고립무원의 제주성을 아예 점령(제2차 을묘왜변)하여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했다. 

이때 제주관아의 지인(知印)이었던 열혈청년 김성조가 분연히 “향토가 급란을 당하매 대장부 마땅히 신명(身命)을 바쳐 왜적을 격퇴하리라.”하고 전사후생(前死後生)의 각오로 창의(倡義)하자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가 결성되었고 효용군(驍勇軍) 70인이 나섰던 것이다.

잔여군사와 주민들이 성담을 지키는 동안 말을 탄 돌격대 4명은 6월 27일 새벽 적진 한 가운데로 달려가 소수 정예로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고(以少擊衆), 효용군은 남수각 동쪽 절벽을 기어 올라가 같은 시각에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서성동격(西聲東擊)의 화살을 날렸으니 정병 김몽근은 적장을 사살까지 하였다.   

용감하고 늠름하여라! 이 군·관·민 총력전이 제주 을묘왜변을 전승(全勝)으로 물리쳤고, 다음 해(병진왜변)에 일어난 산발적인 왜구의 침입도 관민을 독려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사실이 조선실록에 등재되고 450년 후 제주시는 오현교(2000) 다리 위에 <을묘왜변 전적지>라는 구두 닦는 발판 표석을 세웠건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승전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역사를 망각하거나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의 미래는 어둡다. 

이에  늦게나마 '을묘왜변의 영웅 현창회'를 설립하여, 향토와 나라를 지킨 다섯 영웅의 삶을 기리고 향토수호의 정신을 전승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현창회는 을묘왜변의영웅들을 현창하는 사업 수행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따라 ①문헌 수집 및 출판 ②학술회의 개최 ③동상 및 기념관 건립 ④성역화 사업 ⑤각종 표창 같은 사업을 시행하고자 한다.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오늘날 우리는 을묘왜변의 영웅을 귀감으로 삼아 자유민주 향토발전을 위해 군관민이 합심합력하는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찾는 일과 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에 앞장설 것이다. 도민 여러분과 유지제현의 많은 협력을 바란다. / 김정택(건공장군 김성조 현양위원회 위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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