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주발전아카데미-1강] 심규호 전 석좌교수 ‘제주와 중국의 오랜 인연’

제주도 행정동우회(회장 김형수)는 지난 9일 미래컨벤션센터에서 ‘포스트코로나시대 제주발전 아카데미’ 첫 번째 강좌를 진행했다. 

제주발전 아카데미는 제주경제에 영향이 큰 중국 문화를 이해하고 경제 교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시작은 심규호 전 제주국제대학교 석좌교수가 ‘제주에서 바라본 중국’이란 주제로 진행했다.

심 전 석좌교수는 먼저 서불과차 전설부터 시작해 원나라 지배, 화교 정착까지 제주와 중국의 오랜 인연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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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호 전 교수가 9일 '포스트코로나시대 제주발전 아카데미' 첫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와 중국의 만남은 기원전 진나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약을 찾아 동도(東渡)한 ‘서복(서불)’이 제주 서귀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다. 서복이 정방폭포 절벽에 새겼다고 알려진 마애명 서불과지(徐巿過之)는 서귀포의 지명 유래이기도 하다.

심 전 교수는 서복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고찰했는데, ▲해상교류의 흔적 ▲해상항로의 존재 ▲경제적 교섭 ▲신선의 땅이라는 환상 ▲신화로의 접근 ▲문화적 상사(相似)와 상이(相異) 등으로 분석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 제주를 언급한 부분(주호라는 큰 섬이 마한의 서쪽 바다에 있다)을 통해서도 제주 명칭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주와 중국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섬 자체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시기는 바로 원나라 때다. 원나라는 1273년 여몽연합군이 삼별초 진압을 위해 제주에 들어오면서 제주 지배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100년 뒤, 일명 ‘목호의 난’이라고 알려진 전투로 인해 제주에서 원나라의 영향력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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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비록 세력은 사라졌지만 1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뿌리내린 문화는 지금도 남아있다. 심 전 교수는 “간드락, 눈미, 물오름, 마농, 망이망이, 어멍 같은 언어는 원나라와 몽골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면서 “여기에 괸당, 우잣, 장남, 피치가죽, 확확 같은 제주어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제주인 가운데는 바다에서 표류해 중국으로 건너간 경우도 있다. 최부, 이방익, 장한철이 대표적이다.

이후 근대 시기로 접어들면서 화교들이 제주에 찾아오기도 했다. 1950년 중국 난민들이 산지천에 정박한 일명 ‘중국피난선’은 제주 화교를 상징했던 조형물이기도 하다.

심 전 교수는 “한국 화교는 1992년 이전의 구화교와 신화교로 나뉜다. 구 화교의 경우 1840년부터 1910년까지 1단계, 1910년부터 1931년까지 2단계, 1931년 7월에 벌어진 일명 만보산 사건부터 1945년까지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51년 제주 화교 양낙산과 형제들은 중국인 학교 ‘제주화교소학’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양낙산은 “제주는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 했던 고향과도 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심 전 교수는 "실제로 제주는 수교 이전에도 이미 중국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고, 문화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제주의 지정학정 요인 외에도 해상을 통한 교류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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