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공간 오이 연극 ‘4통 3반 복층 사건’

제주 극단 예술공간 오이에게 창작극 ‘4통 3반 복층 사건’은 특별한 작품이다. 초연을 올렸던 2018년은 마침 제주4.3 70주년이었다. 무엇이라도 일조하자는 마음에 이 작품으로 무려 7개월이라는 장기 공연을 시도했고 어려움 속에 일정을 잘 마무리했다. 당시에 만난 오이 단원들은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비교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기사 : '7개월 대장정' 마친 제주4.3 연극, 진화는 계속된다) 제주 연극계뿐만 아니라 예술계 전체로 봐도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매해 한 편 씩 제주4.3을 알리는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일명 ‘제주4.3 기억과 공감 연극프로젝트’의 신호탄이기도 하다. 예술공간 오이는 ▲4통 3반 복층 사건(2018~2019)을 시작으로 ▲프로젝트 이어도(2020) ▲고사리 육개장(2021)까지, ‘4.3’이라는 무게를 기꺼이 감내하며 자신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4통 3반 복층 사건’이 2년 만에 돌아왔다. 두 번의 소극장 무대(제주문예회관, 예술공간 오이)가 아닌 대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14일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 기획 공연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만난 작품은 한층 넓어진 물리적 공간을 안정감 있게 채웠다. 동시에 본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군살 없이 뻗어가며 멋진 ‘체급 전환’에 성공했다.

ⓒ제주의소리
14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4통 3반 복층 사건'의 출연진들. ⓒ제주의소리

1. 

작품은 2018년~2019년부터 이어온 기조를 큰 틀에서 유지한다. 복층 구조의 무대 세트는 1948년 과거 제주와 현 시대 대한민국 어느 도시가 공존한다. 한쪽에서는 산으로 피한 제주도민들이 총소리에 하나 둘 쓰러져 가고, 한쪽에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목표를 상실한 청년 상식(배우 전혁준)과 대학 동아리 동료들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생과 사의 경계가 종이 한 장 보다 얇은 지옥도에서 제주도민 순임(김소여)은 “내 목숨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이기에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입술을 깨문다. 그에 반해 청년 상식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현재를 향해 과거는 말한다. 

“살아라.”

네가 딛고 사는 이 땅은 위정자들의 전리품이 아닌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피땀 흘리며 지킨 유산이다. 너는 미미한 파편이 아니다. 네가 느끼는 심장 박동은 과거 수만 명의 생명들이 그토록 갈구한 떨림이다. 그렇기에 네가 겪는 지금의 고민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니 살아라. 악착 같이 살아서 스스로를 증명해라. 현재를 포기하지 말라.

이런 메시지는 과거와 현재가 맞닿아 있는 복층 무대와 함께, 다른 시공간에서 각각의 역할을 부여 받은 '1인 2역' 배우들을 통해 한층 부각된다. 결혼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갈등하는 현재의 연인(남석민-전여경)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동굴 안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과거에서 명석(전혁준)은 사랑하는 여자 순임(김소여)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지만, 현재에서는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미래(김소여)가 상식(전혁준)을 실의의 구덩이에서 꺼내고자 과감한 충격 요법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4통 3반 복층 사건’은 현재의 결핍을 과거가 채워주는 보완적인 서사 구조로 일면 보인다. “거대한 아픔 앞에서 내 고민은 작아진다”는 상식의 대사처럼, 청년 세대가 그저 미완성의 존재로 비춰질 우려도 있다. 취직이 좀 늦고 할 일이 없어도, 생사를 오가는 순간 보다는 낫지 않냐는 비교도 나올 법 하다.

하지만, 서사의 이면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존재한다. 과거가 존재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자들이 계속 기억해야 한다는 것. 현재 살아있는 그들이 역사를 받아들일지 말지 여부에 따라 ‘과거의 미래(역사의 미래)’가 결정된다. 과거를 지울 수도 계속 남길 수도 있는 힘을 지닌 현재, 그 중에서도 청년 세대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이유다. 이런 면에서 ‘4통 3반 복층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경험이 현재를 채운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하는 역사 인식까지 뻗어나간다. 

2. 

이 작품은 4.3이 배경이지만 어느 특정 지역, 시점,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 격발하는지 모르지만 때마다 울리는 총소리, 이내 쓰러지는 사람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동굴로 피하는 주민들 정도가 과거 설정의 전부다. 폭력의 주체 역시 쏠리지 않는다. 물론 총기나 동굴에 불을 피우는 장면을 고려하면, 실제 역사처럼 군경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짐작해본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왔는지, 바다에서 올라왔는지”라는 피난민의 대사처럼 양 극단 사이에서 고통 받아야 했던, 그때 대다수 도민들의 눈높이를 맞춘다. 

상식에게 이 세상은 정치인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만든 불합리하고 왜곡된 세상이다. 그러나 상식의 동아리 선배 파도(강영지)는 다르게 보라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민중들의 희생과 노력이 켜켜이 쌓여서 지금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땅을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천혜의 자연, 아름다운 관광지 제주는 누가 만들었을까. 중앙 정부? 관료? 자본과 정치를 등에 업은 토호 세력? 아니다. 그야말로 쓸려나가는 대학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묵묵히 제 자리에서 가정을 일구며 후손을 키워낸 한 명 한 명이 지금의 제주를 만들었다.  

클라이맥스에서는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유서를 품고 살아가는 상식을 향해, 미래는 강력한 한 방으로 삶의 의지를 일깨워준다. 제 정신이 아닌 상식을 향해 "살아"라고 던지는 미래의 경고 아닌 경고는,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순임-명석-미래-상식 네 사람의 시간이 한 순간에 교차되면서 일시에 풀어내는 강렬한 결말이다.

뿐만 아니라 극 전반에 걸쳐 시대 분위기를 잘 반영한 대사와 유머는 관객을 덜 지루하게 만든다. 여기에 대극장 ‘4통 3반 복층 사건’은 새로 추가한 설정들을 매끄럽게 덧입히며 작품의 기존 장점을 한껏 키운다.

이번 공연에서는 동굴 피난민들이 새로 추가됐다. 서로 굶주렸지만 몇 없는 감자를 나눠 먹고, 안타깝게 젖먹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밖으로 나가면서 마지막 만남이 될지 모르는 감정의 교환 등 동굴 안 사건들을 짧게 보여주면서 속도감과 여운 모두를 잡는다. 혼백이 된 희생자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마치 가족사진처럼 한 곳에 모여 시선을 집중시켰고, 동시에 한풀이 춤을 추가해 비극을 한층 부각시켰다. 촛불을 든 4.3 희생자의 서글픈 노래와 노래패 동아리 OB멤버들의 민중 가요(마른 잎 다시 살아나)가 교차하는 연출은 연기와는 사뭇 다르게 관객의 감성을 자극했다.  

앞선 두 차례(2018, 2019) 공연은 작품을 쓴 전혁준이 각각 단독 연출, 공동 연출을 맡았다. 이번 공연은 홍서해가 연출 뿐만 아니라 각색까지 소화하며 밑그림을 그렸다. 소극장 작품을 더 큰 공간에 옮기는 것 이상으로 무대·배우·극본 등 많은 부분이 달라졌음에도, 어디 한 곳 튀어나오거나 들어가는 경우 없이 균형 있게 모양을 잡았다고 느꼈다.

글·연출의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날렵하게 연기에 집중한 전혁준, 당찬 순임을 연기한 김소여, 덕선-수아를 연기한 전여경, 넉살 좋은 모습의 남석민, 묘하게 얄미운 경찰의 부지원, 짧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현수,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 홍수지·김태형·이진혁·김승재. 그리고 넓은 무대에서 원 없이 소리친 강영지와 김경미.

사족이지만 동굴 입구로 설정한 무대 계단을 들어가고 나오는 연기가 배우마다 제각각이었고, 총소리와 함께 장면(명석 총살 전)이 바뀌는 부분은 앞뒤 모두 비극적이지만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와 옥의 티로 기억에 남는다.

3. 

2018년 문예회관 소극장 초연, 2019년 예술공간 오이 두 번째 공연, 그리고 세 번째 ‘4통 3반 복층 사건’까지 지켜보면서, 이번에는 상식이란 인물에 보다 눈길이 갔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째, 경찰 공무원을 준비했다가 실패하고 몇 군데 회사도 들어갔지만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 신세. 그는 취업, 연애, 결혼에 대한 회의뿐만 아니라 정치 혐오, 거대 담론(역사, 사회문제)에 대한 낮은 공감을 보인다. 그럼에도 인권에 어긋한 일부 경찰에 실망하고, 기계처럼 살생하는 돼지 도축 일거리는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는 등 나름대로 나답게 세상을 살고 싶다는 바람은 마음에 품고 있다.

언급한 특징들은 최근 2030세대와 상당부분 겹쳐 보인다. 청년들이 자주 마주하는 감정 가운데 하나가 불안함이라면, 그런 불안함을 아픔의 역사로 소통하는 ‘4통 3반 복층 사건’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하는 시대와 호흡하는 예술 안에서 ‘4통 3반 복층 사건’과 예술공간 오이는, 꾸준한 발전 의지를 바탕으로 오늘날 제주4.3을 알리는 연극예술의 선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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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살다간 사람들과
이곳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곳에 살고 있든
어느 시간에 살고 있든
온전히 본인만의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잊지 않겠다는 말을 저 위로 보내고 싶습니다.
이 자리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연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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