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인 고영숙은 첫 번째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리토피아)를 펴냈다.

▲말문이 트인 꽃잎들 ▲속 깊은 지층이 산다는 ▲거울을 꿈꾸는 물고기 ▲울컥, 터진 혓바늘의 비문들 등 총 4부에 걸쳐 저자는 시를 채웠다.

나를 낳아주세요
고영숙

오늘도 엄마를 뽑고 있어

구석에 기대 쉬는 엄마는 뽑기가 쉬워 오늘은 팔뚝이 굵은 엄마를 뽑고 내일은 다크서클을 드리운 엄마를 뽑을 거야 눈썹 문신을 한 엄마도 있어 세상엔 거짓말처럼 웃고 있는 엄마들이 수없이 많아 엄마는 팔딱이는 소문들로 요리를 하지 가끔 지루해진 소문을 한 번 더 끓이면 엄마 냄새가 나지 나는 길쭉하게 자라고 있어 날마다 내 생일이야 매일 나를 낳아줄 엄마가 필요해 갈색 골목에 레드카펫을 깔고 모든 저녁을 기다리는 엄마 떨리는 손목으로 꽃잎을 뿌리며 우아하게 걸어가고 있어 반값으로 할인된 엄마도 갓 인화한 증명사진을 들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엄마도 두근두근 증후군을 앓고 있어 일류도 지나고 나면 가볍고 간단히 오류가 되어 버리는 세상 어제는 건너편 마트에서 엄마를 세일하고 겨울 언덕바지에 떨어지는 음악은 항상 슬로모션으로 녹았다 얼기를 반복해 유통기한이 줄어들수록 손때 묻은 엄마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어

내일 아침은 엄마가 또 나를 낳을 거야


원본대조필
고영숙

이 책은 1942년 간행된 편년체 원전이다
쉰 적도 없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전 생애의 기록이고 삶의 보고서다
수많은 배경 중 뼈대 있는 정본을 세우고
종종 바람을 타고 다니던 호시절은
용을 써도 먹히지 않아 생략한다
구겨진 쪽의 빗금 간 시간이 펴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저항 없는 덮어쓰기로
찢길 일만 남은 목차가 먼지를 쓸어내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우는 낯선 필체
위태로운 행간마다 둥둥 떠다닌다
바람은 곳곳마다 무수한 구멍을 내고
낡은 문장들에서 물큰한 울음소리가 묻어나온다
역주행에 쓸려간 물살의 흔적
기진한 몸뚱어리가 사본의 발끝으로 점점 지워진다
서늘한 등짝, 목구멍에 밀려드는 어둠처럼
흩어진 슬하의 이름들이 하나하나 지문처럼 찍히는 밤
페이지를 넘길수록 몸피가 줄어든다
풀이 죽은 문장들, 맨 끝줄 가까스로 매달리거나
긴 묵독 끝 더듬더듬 통증의 출처를 필사한다
안간힘으로 버티는 낡은 종이
아직 폐기되지 않아 원본대조필 효력이 유효한
아버지

작품 해설을 실은 백인덕 시인은 “고영숙 시인의 첫 시집은 결코 ‘양도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한, 슬픔을 향한 곡진한 자기 고백이 주류의 정서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애처롭게 미화되거나 외적 세계와 결합하여 섣불리 거대 서사의 일부로 함몰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끈질긴 자기 탐색과 시적 숙고를 거쳐 ‘슬픔이 아닌 것, 혹은 슬픔을 넘어서려는 것의 양태樣態’로 여러 차례 되돌아보게 하면서 우리 앞에 현시한다”고 소개했다.

고영숙 시인.

저자는 책 머리에서 “아프다 소리 한 번 못한 채 생은 아직 초입인데, 나 살자고 얼떨결에 받아든 첫 문장이 하필 당신, 한 꺼풀씩 전생을 돌려 깎은 지환指環이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고영숙은 제주 출생으로 2017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수상했다. 2020년 ‘리토피아’로 등단했고, 현재 다층 동인,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리토피아, 136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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