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쉰 여덟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사진=픽사베이. ⓒ제주의소리
고려대장경 법주기에 따르면 석가가 돌아간 뒤 기원전 540년 전 후에 발타라존자 권속 900여명이 탐몰라주(탐라-제주로 추정) 곳곳에 살면서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그 흔적은 마을마다 절왓(寺田)이 있다. 사진=픽사베이. ⓒ제주의소리

1. 한라산 영실 존자암(靈室尊者庵)

‘존자암은 원래 한라산영실에 있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제주도, 2012. 10. 5)’에 보면, 제주판관을 지낸 김치(金緻) 글에는 “존자암에서 수정(修淨)스님을 만났다. 영실이 원래 존자암의 터다. 영실 동남쪽 산허리에 수행굴이 있는데, 부서진 온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1694년에 제주목사였던 이영태가 지은 ‘지영록’에도 “원래는 영실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존자암이 있던 폐사지에는 계단과 초석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영실휴게소 부근이 존자암의 옛터였을 듯싶다. 

이형상 목사(1653-1733, 1702-1703년 제주목사)는 “대정 지역에 유일하게 존자암이 있는데, 초가 몇 칸만 남아 있고 스님은 살지 않는다. 다만 임금의 명을 받든 사신이 한라산에 오를 때 자고 쉬어갈 뿐이다”고 존자암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제주도에서 유일한 부도라고 알려진 석종형 부도가 절의 맨 위쪽에 있다. 이 절에서는 그 부도를 두고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와 다른 견해도 만만치 않다. 부도의 생김새로 볼 때 조선 전기의 부도로 추정되는 탓이다. 제주 불교의 메카였다가 파괴되고 황폐화된 뒤 다시금 중창(重創)되고 있는 절이 존자암이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보면, 1651년 암행어사로 왔던 이경억(李慶億)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존자암은 유명한 절로 알았더니 이제 보니 황폐하여 쓸쓸한 옛 터일세, 한 방은 두어 개 서까래만 남아 있네. 바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이 별로 없고, 남쪽 지방 스님은 예불이 어색하다. 가을 하늘의 노인성(老人星)을 바라보니 속세 생각 이미 사라지네. 높은 산에 위치한 절, 영실은 일반인들이 잘 찾지 않는 절. 존자암의 흥망성쇠도 가고 오는 만물의 이치 속에서 존재하리라.’

제주불교의 발원지 한라산 존자암, 대장경과 고려 대장경에 의하면, 부처님의 16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발타라존자(跋阤羅尊者)가 한·중·일 나라 가운데 최초로 세운 사찰로 인도 영취산 같은 도량을 찾아 지었고 초기 이름은 ‘영수리’ 그 후에 ‘영실’로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중요한 단서가 병풍바위가 있는 ‘볼레’오름, 볼레는 보리수나무, 불교에서는 불래(佛來)오름. 500장군은 500나한, 나한(羅漢)은 일체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자격을 지닌 불교의 성자이다.

나한이란 범어 아라한(阿羅漢, Arhat)의 줄임말로 소승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자라는 뜻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서 석가에게서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구제하라는 임무를 받은 자. 불가의 불제자 가운데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16나한’이라고 하며 이들은 무량의 공덕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 열반에 들지 않고, 세속에 거주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자(尊者)다. 부처가 열반한 뒤 제자 가섭이 부처의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 때 모였던 제자 500명을 500나한. 368개의 오름도 368의 반반(半半) 나한일까? 이유인즉 중산간에 있는 오름은 오름 높이의 반(半)은 땅 속에, 반(半)은 지상에 나와 있음이 불가에서 말하는 사람처럼 영혼과 육신이 하나. 상즉불이(相卽不二), 물리적인 접근점이다.

서귀포 존자암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서귀포 존자암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 서귀포 존자암,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절터

제주도 기념물 제43호. 존자암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존자암은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곳 동굴에 마치 스님이 도를 닦는 모습과 흡사한 돌이 있어 세상에 수행동(修行洞: 수행하는 동굴)이라 전해졌다”고 한 것이 최초이다. 그런데 효종 초에 간행된 ‘탐라지(耽羅志)’에는 “존자암의 애초의 위치는 영실이고 지금은 서쪽 기슭에서 밖으로 10리쯤 옮겼는데, 곧 대정 지역”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존자암은 효종 이전에 그 위치가 영실에서 대정지경으로 옮겨졌으며, 따라서 지금의 존자암지는 17세기 중반 이전의 존자암의 터전인 셈이다.

존자암의 규모에 대해서는 ‘남사록(南槎錄)’에, “존자암은 아홉 칸인데, 지붕과 벽은 기와와 흙 대신에 판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까닭을 당시 스님과 오고간 대화 내용을 인용하여, “산중의 토맥은 점액이 없고 또 모래와 돌이 많아서 벽을 바르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기와는 반드시 육지에서 사와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593년(선조 26)에 전라남도 강진에 사는 스님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방호(防護)를 서기 위해 제주에 들어왔다가 임무를 마치자 곧 재물을 내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 광해군 초기에 제주 판관을 지낸 김치(金緻)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는 존자암을 정사(靜舍)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전에는 이곳에서 국성재(國聖齋)를 올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존자암지(尊者庵址)

3. 영실 존자암, ‘영수리(靈鷲)’에서 ‘영실’로 변화된 게 아닐까? 

불교 발생지인 인도에는 독수리 날개를 펼친 모양이 바위가 있는 동북부 라즈기르(王舍城) 영취산(靈鷲山)이 있다. 부처가 꽃을 들자 제자 가섭만이 빙긋 웃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說)한 곳으로 석가모니가 45년간 공을 드리며 지낸 현장이다. 국내는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가 있는 산 이름도 영취산이다. 존자암을 감싸는 한라산 영실(靈室), ‘영수리(靈鷲)’에서 ‘영실’로 변화가 된게 아닐까? 모음 우+이=이로 우가 탈음되고 ㄹ 받침이 합축됐다. 불래(佛來)오름의 병풍바위는 독수리 날개 모양이고, 지형은 독수리 ‘텅애’ 로 독수리의 실(室)이다. 영실(靈室)은 죽은 사람의 영궤(靈几)와 그에 딸린 모든 것을 차려 놓는 곳, 혹은 불교에서 영혼의 위패를 두는 빈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4. 탐라는 인도의 탐몰라주(耽沒羅洲)의 탐모라, 탐라?

부처 석가모니(BC 563?-483?)의 제6제자, 나한 발타라 존자(跋陀羅 Bhadra, 목욕을 즐기는 가운데 물의 신성성으로 도를 득함). 본래의 이름은 발타라루지(跋阤邏縷支)인데 뜻은 현애(賢愛)이며 서인도인이다. 그는 사론(邪論)을 파하여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존자는 논법에 대해 투철하게 관통하였으며 학풍이 순박하고 계행(戒行)은 엄격하나 마음은 자비했다는 평가다. 발타라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실 때나 외출할 때나 늘 가까이에서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던 제자이다. 900명의 제자와 함께 인도 탐몰라주(耽沒羅洲)에서 불교의 진리를 가르친다. 돈황 천불동 76굴에 그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탐라국(耽羅國, ?~ 1404년)은 제주도의 왕국이었다. 통일신라 때까지 한반도의 나라들과 교류를 하고 후삼국 시대에 고려가 분열된 삼국을 통일한 뒤 현으로 복속됐다가, 15세기 초반에 조선의 태종 시기에 완전 병합됐다. 탐모라국(耽牟羅國) 또는 섭라(涉羅) 명칭은 신라 선덕여왕 시기인 632년, 황룡사 9층탑 4층에서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라고도 지칭됐다. 고려 대장경(1011-1087) 법주기(法住記)에는 탐몰라주(耽沒羅洲)가 범어(梵語)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있다. 탐몰라에서 ‘몰’자가 탈락되서 탐라가 된 셈이다.

가장 궁금한 것이 물의 신(神) 발타라 존자(跋陀羅, Bhadra)가 왜 제주를 찾았을까? 답은 세계에서 가장신성한 물(神聖性, Heiligkeit)을 통한 불교의 전파다. 4대 원소는 물, 불, 공기 흙인데, 으뜸인 물은 정화와 신성함의 의미로 인간사회에 존재한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도 흐르는 큰 강물 유역. 사람이 양수를 터뜨리며 물속에서 태어나고, 신을 받아들이는 세례 의식에서 축수하고, 죽어서 몸을 씻기고 성수로 축수하는 순간까지 물은 항상 인간의 삶의 여정을 같이 한다.

70%가 물로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한 생물학적인 필요성과 인간 마음을 정화시키는 필수적인 종교적 기능을 갖고 있는 물. 기원전 200년 고대 브라만교 경전에는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이여, 모든 이들에게 건강과 평화를 주소서, 샘물이여 사람들에게 고요를 선사하고, 빗물이여 만인에게 평온의 원천이 되어 주소서”라는 신성한 물에 대한 기도문이 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사상을 적은 가장 오래된 기록인 성경에서도 빛 다음으로 물을 중시했고, 창조 과정에서 둘째 날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밑의 물로 가르고 있다. 물은 인간사회의 핵심적인 요소로 창조되었는데 1950년대 종교사학자 미국 시카고 대학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 교수는 물은 “만물의 원천이자 기원이며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모아 놓은 저수지다. 물은 모든 형체의 요람이며 삼라만상을 떠받친다”면서 물의 원천적인 존재 자체를 칭송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루르드(Lourdes) 동굴에는 해마다 300만 명의 순례객이 치유의 기적을 받기 위해 동굴 안의 샘물을 찾아온다. 이곳에서 1858년 2월 11일에서 7월 16일 사이에 14세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 앞에 성모 마리아가 수차례 나타났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마호메트의 신앙의 절반은 청결”이라는 가르침을 받아 기도를 드리기 전 몸을 청결히 하는 의식을 갖는다. 발타라 존자가 살았던 때 존자암에서 성스런 물을 찾지 못했지만, 약 2000년 후 1980년대 와서야 제주 사람들이 ‘삼다수’의 성스러운 물을 찾았다. ‘탐라수’다. 2000년 후의 기적은 한라산과 368의 반반(半半)나한 오름에서 19년을 숙성하고 내려간 성수(聖水). 대설이 내린 영실, 발타라 존자 혼령(魂靈) 바람이 영실을 맴돌다 한라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정리하면, 발타라존자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성(神聖性, Heiligkeit)인 성(聖)스러운 물을 찾고, 불도(佛道)를 전파하기 위해 약1만 마일이 먼 바다를 건너 탐라(기원전 미정-1402)에 도착한다. 당시 이름도 없는 제주섬, 인도의 탐몰라주(耽沒羅洲)처럼 불렀을 제주 땅.

이능화(1868-1945)의 ‘조선불교통사하(下)’에는 발타라존자의 인도권속 9백여명이 아라한(阿羅漢)과 더불어 탐몰라주(지금의 제주)에 나눠 살았다고 밝히고 있다. 왜 900명이냐면, 인도 탐몰라주에서 불교의 진리를 가르친 그 제자들을 데리고 온 것으로 보인다. 발타라존자가 서거하면서 사리는 존자암 영실(靈室)에 봉안하면서 ‘영수리’가 ‘영실’로 바꿔졌을 것 같다. 그 예가 서광서리 오설록 남송이 오름(339m)은 하늘을 날고있는 독수리형태. ‘날=날다→남. 독수리 취(鷲)→남수리(Flying Eagle)’ 오름에서 ‘남송이’ 오름으로 변천됐고 동네사람들은 ‘남 소로기(鳶)’오름으로 부르고 있다.

존자암 터에는 상고시대 부도(浮圖)와 열평전후의 자연동굴이있고 자연석으로 된 불상이있다. 존자암은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신당 및 불사 소각정책 이전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김정(金淨)의 ‘존자암기(尊者庵記)’에는 “존자암은 고·양·부(高良夫)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세워졌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김상헌의 남사록에도 같은 내용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 대장경(1011-1087) 법주기에 따르면 석가가 돌아간 뒤 기원전 540년 전 후에 발타라존자 권속 900여명이 탐몰라 주(탐라-제주로 추정) 곳곳에 살면서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그 흔적은 제주의 마을마다 절왓(寺田)이 있다. 이 글을 발타라 존자께 봉헌(奉獻) 드린다. / 이문호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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