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50) 늙은이 지팡이는 방구석에 세워 두고 간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몽둥이 : 지팡이
* 구들 구석 : 방구석
* 세와 뒁 : 세워 두고

사진=픽사베이.
잠깐 바깥에 나가 콧바람이라도 쐬어야 하는데,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천근만근이다. 그래서 없어선 안될 것이 지팡이다. 사진=픽사베이.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늙음을 숙명으로 맞이한다. 늙으면 2백 6개라는 뼈마디 어디 한 군데 성한 데가 없이 삐걱거린다. 젊은 시절 그렇게 날듯이 활개 치며 다녔는데, 언제 이렇게 폭삭 늙어 버린 것일까. 한숨짓고 눈물지은들 무슨 소용이랴. 인상 무상이라 한 말에는 인생은 풀잎의 이슬, ‘초로(草露)’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가. 인생이 덧없는 것이다.

인생은 유한한 것이다. 자연의 정한 이치라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우주의 섭리다. 그걸 알면서도 늙음이 겪어야 하는 괴로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몸이 성하지 않으니 몸을 오몽(움직임)하기가 어렵고 힘들다. 이웃집 출입마저 어려울 수가 있다. 

약을 먹고 물리지료를 받아도 그때뿐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않는다. 정형외과를 찾아가면 으레 의사 입에서 나오는 말, “퇴행성입니다.” 늙어서 수술을 한다든지 하는 외과적 방법은 신중을 기하는 게 좋고, 웬만하면 그럭저럭 물리치료나 받으며 살아가라 한다. 늙는 이라면 늙음의 길목에서 반드시 서글픔을 겪게 되는 대목이다.

잠깐 바깥에 나가 콧바람이라도 쐬어야 하는데,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천근만근이다. 그래서 없어선 안될 것이 지팡이다. 지팡이는 늙은이에게 요긴한 필수품이다. 버팀목이고 지지대에 다름 아니다.

노인이 쓰는 지팡이를 보면 많이 낡아 있는 게 눈에 띈다. 요즘 철제 지팡이가 나오지만 이것도 닳는 정도만 더딜 뿐이지 세월의 무게에 겨워 점점 조악(粗惡)하게 돼 간다. 그래도 지팡이는 노인과 여생을 함께했던 가장 정 든 물건이다. 자식이라 한들, 또 친한 벗이라 한들 지팡이만 할 것인가.

그렇게 손때가 묻은 지팡이도 주인을 따라 저승길에는 동행하지 못한다. 주인이 죽고 나면 그가 살던 방구서게 세워진다. 밤낮 짚고 다니던 임자 잃은 지팡이가 쓸쓸히 방구석에 세워져 있는 지팡이의 풍경이 눈에 밟힌다.

혹여 젊은 사람이 홀로 서 있는 고인의 유품인 지팡이를 아무렇지 않게 보아 지나치면 안되리라.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옛 어른의 아름다운 행적 한둘 회상 속에 떠올리며 잠시 눈 감고 묵념해야 할 것이다.

‘늙으니 몽둥인 구들 구석에 세와 뒁 간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장면인가.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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