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립무용단 정기공연 ‘녹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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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립무용단의 제54회 정기공연 '녹담'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제주도립무용단이 올해 활동을 정리하는 정기 공연을 선보였다. 11월 30일 제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제54회 정기공연 ‘녹담(鹿潭)’이다. 이 작품에 대해 김혜림 예술감독(안무자)는 “한라산 백록담 설화의 여백에다 현대적 상상력을 발휘해 순리와 순환,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생명들에 대한 아름다운 서사를 그려낸다”고 소개한다.

‘녹담’은 설화를 온전히 재현하기 보다는, 꿈(夢)이라는 무의식과 자연·이상향의 가치, 그리고 공동체를 지킨 제주인들의 노고까지 창작의 영역을 넓힌다. 작품은 2막(6장)으로 진행한다. 1막은 백록 설화의 환상과 꿈을 연결하고, 2막은 위대한 자연 속에서 환상과 현실을 마주한다.

앞서 말했듯 ‘녹담’은 단순한 설화 재현을 탈피한다. 인류의 시작을 원초적으로 상징하는 젊은 남성 무용수의 신체를 시작으로, 작품은 다양한 상징들을 등장시킨다. 섬의 탄생을 내포한 붉은 무대, 고귀한 진리를 품은 작은 현무암, 사냥꾼과 동물 뿐만 아니라 바람-불-돌담(흑룡)-바다를 상징하는 무용수들, 전설 속 존재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일상 속 신성(神性). 

그렇게 작품은 제주 섬 모든 생명을 유지시켜준 오랜 자연의 가치를 신비한 옛 이야기를 통해 일깨운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수백, 수천, 그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가치들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의 부름에 귀 기울일 때, 묵묵히 노동을 감내하며 공동체를 지켜온 어머니들을 발견하고 그들이 곧 우리들의 신화이자 전설이라는 재발견으로 매듭짓는다.

이런 주제는 무대 연출, 무용수들의 연기, 음악의 힘으로 구현된다. 특히 전작 ‘이어도사나’, ‘자청비’에서 주목 받은 조명 활용은 ‘녹담’에서 한 단계 발전한다. 조명을 무대 안에 설치해 객석으로 비추면서 동시에 연기 장치를 연계한 연출은 백미로 꼽을 만 하다. 빛과 연기가 어우러지며 탄생한 신비한 공간감이 객석으로 퍼져나가고, 빛을 가로막으면서 무대를 가르고 닫는 효과도 형성한다. 

돌문화공원에서 사전 제작한 프롤로그 영상, 무대 위쪽에서 영상을 비추며 구역을 생성하는 연출, 얇은 막에 물리적인 변형을 주고 조명까지 입힌 장치화, 출연진 개개인에게 맞춘 지정 조명들, 흩날림이란 이미지를 극대화한 작은 종이들, 적극적인 오케스트라 박스 활용 같은 무대 연출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동시에 무용수들의 날개가 돼 줬다.

무용수들의 연기에서는 높은 집중력을 느낄 수 있었다. 1막 초반 긴장감 있게 좌우를 오가는 여성 무용수들의 군무는 일체감을 뽐냈고, 젊은 남성 무용수 2명의 호흡도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여줬다. 무구를 치면서 즉석에서 종이를 접어 소품으로 활용하는 진행 역시 인상적이다. 강진형 지도위원의 부채춤 독무는 팽팽한 장면들 사이에서 여백과 비움으로 다가와 깊은 여운을 남겼다.

특히, 해녀춤은 기존의 춤과는 새로운 변화를 느낄 수 있어 꽤 흥미로웠다. 해녀 물질에 대해 수직 동선보다 바닥을 훑는 수평의 동선을 강조했는데, 수평의 몸짓은 일종의 붓이 돼 바다 속 풍경을 그렸다. 그림 내용만 놓고 보면 다소 단순하지만, 그림이 무대 배경으로 활용되고 전체 과정이 매끄럽게 이어져 의미를 더한다. 군무, 독무, 2인무 등 춤의 매력을 최대한 관객에게 선사하기 위한 구성과 역할 배분도 눈에 띈다. 

‘녹담’에서 등장하는 음악은 타악기, 현악기, 건반, 전기기타, 전자음악, 음성 등 중심이 되는 악기는 달라도 무겁게 힘을 강조하는 공통된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인터스텔라’, ‘다크나이트’ 등의 영화 작품에 참여한 작곡가 한스 짐머를 떠올리게 한다. 곡 자체는 무대의 성격을 좌지우지 할 만큼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다만, 거의 모든 곡마다 위에서 언급한 특성이 반복돼 클라이맥스까지 가면 웅장함 보다는 오히려 조금 피로한 느낌을 안겨줬다. 

1부는 주제를 상징하는 서사와 구성을 나름 갖췄지만, 2부는 그보다는 시각화를 강조하는 듯 보였다. 각기 다른 매력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반대로 불균형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무대, 연기, 음악 등 다채로운 매력을 갖춘 ‘녹담’이지만 가장 주목할 점은 예술감독 겸 안무자 김혜림의 창작 영역이다. 앞선 ‘자청비’, ‘이어도사나’를 통해 제주 설화에 주목했던 김혜림은 이번 신작을 통해 비로소 제주인까지 예술적 시선을 뻗어간다.

삶을 일군 평범한 제주 여인들이 바로 제주도 공동체의 신화라는 인식, 그에 어울리는 회화 예술 활용(이명복 작가의 인물화)은 제주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읽혀진다. 

설화·자연 뿐만 아니라 제주인, 문화, 역사까지 뻗어가는 예술감독 만의 해석을 더 기대해도 될까. 무엇보다 제주의 가장 큰 상처인 4.3은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이런 바람이 비단 기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녹담’을 통해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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