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살 수 있다면, 여행을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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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 (36) 남원읍 태흥리 여행가게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인 고봉선 작가가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글] 

‘가게’란 작은 규모로 물건을 파는 집이다. let's go에서의 ‘~가자’ 또한 제주에서는 ‘~가게’로 표현할 수 있다. 처음 여행가게를 떠올렸을 때, 난 이 둘을 뜻하는 이중적인 의미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여행가게에서의 ‘가게’는 단지 ‘shop’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 남원읍 태흥리 ‘여행가게’에서 만난 정양미 씨의 목소리는 티끌조차 없이 맑았다. 봄날 깊은 산속에서 노래하는 새와 같았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남원읍 태흥리 2층 길갓집 1층에 있는 책방, 여행가게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여행가게의 출발”

결혼 전에는 물론 2008년 결혼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하던 부부는 지쳐 있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2015년, 부부는 양가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않고 퇴직했다. 그리고 제주에서 한 달 살이를 하기로 했다. 정양미 씨는 제주로 오기 전날까지도 업무인수를 위해 야근했다. 그 정도로 일이 많았다. 지칠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그렇게 휴식을 찾아 제주에 왔다. 

양가에 일이 생겨도 금방 갈 수 있는 곳, 제주에선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출퇴근 걱정은 물론 야근도 없다. 아침마다 동네를 산책했고, 배고플 땐 먹었다.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다. 정말 꿈같이 달콤한 한 달이었다. 

예전에는 정말 빡빡하게, 일 분 일 초를 다투며 지하철을 탔고, 역삼으로 출근했다. 근무가 시작되면 점심때 잠깐 쉬고, 또 오후 업무가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날 야근에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퇴근하는 길에도 늘 뒤통수를 당기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도무지 개운한 날이라고는 없었다. 묵직한 날들의 연속, 시계의 부속품처럼 살아야 했다.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한 달로는 부족했다. 부부는 한 달을 더 머물기로 했다. 두 달을 지내도 지루함은커녕 여전히 좋았다. 아예 머물기로 하고, 머무를 곳을 찾아다녔다.

두 달, 아무리 지쳐 있었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기엔 긴 시간이다. 더군다나 수입이라고는 전혀 없이 소비만 하다 보면 슬슬 걱정도 된다. 늘 일을 해오던 사람으로서 쉬는 데도 한계가 있다. 

종달리는 작은 마을이다. 가구 수도 적지만 마을 끝에서 끝까지 거리도 짧다. 탁 트인 데다가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이는 것도 좋았다. 부부는 종달리에서 작은 펜션 하나를 매입했다. 그리고 소장했던 책 900여 권으로 북스테이를 꾸몄다.

날마다 산책하던 어느 날, 오래전 담뱃가게를 하던 곳에 “임대”라고 붙어 있었다. 시골에서 삼춘들이 그렇게 임대를 써 붙이며 내놓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상하다고 여기며 붙여진 번호로 전화했다. 집이 비어 있다며 들어가 보라고 했다. 9.92m²도 될까 말까 한 점방, 사람의 손때마저 다 바랜 무척이나 낡은 곳이었다. 

2016년 말, 10년이니 5년이니 기간을 번복하면서 계약했다. 자본이 있으면 전문가라도 부르겠지만 부부는 직접 두 팔을 걷어붙였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수리하는 데 7개월이 걸렸다. 안에는 두 개의 테이블, 입구에 테이블 하나를 더 놓았다.

구멍가게는 문을 열 때도 나올 때도 설렜고, 그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즐거웠던 유년 시절이 있다. 그런 기억으로 사랑방 같은, 향수를 불러올 수 있는 동네의 작은 구멍가게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름도 여행가게라고 하였다. 2017년 7월 1일, 책과 차, 찻잔을 진열하고 팔기 시작했다. 여행가게의 시작이었다. 주인 할머니는 10년이고 20년이고 오래 하라며 힘을 주셨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코로나19와 여행가게 수칙. “부들부들 코로나”, 코로나19를 조심하자는 의미의 흉내 내는 말이 생생함을 더해준다. 이 표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잠시나마 행복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퇴거 통보”

그렇게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주인 할머니의 아들로부터 퇴거 통보를 받았다. 1년 계약 중 공사 기간을 빼면 겨우 5개월, 생각지도 못했는데……. 허탈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퇴거 통보 이유는 많았지만, 부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주인이 시골의 낡은 점방을 내놓을 땐 ‘설마?’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침 부부의 눈에 띄었고, 가게는 금세 나갔다. 그리고 7개월 동안 부부의 손을 거치며 제법 모양새도 갖췄다. 뭔가 될 것 같다는 희망이 보였을 것이다. 주인집 아들은 자신이 뭔가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인집 아들이 들어 왔다. 부부는 장사 시작 5개월 만에 자신들의 손으로 심혈을 기울이며 꾸며 놓은 가게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태흥리에 빈 가게가 있었다. 종달리에서와 똑같은 아이템으로 이곳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임차, 임차인으로선 언제나 불안하다. 장사가 되는 것 같으면 집세를 올리거나 나가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저 꾸준히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여행가게 내부. 오른쪽은 책방, 왼쪽은 주방, 그 뒤편으로는 문구류를 판매하는 연필가게다. 주방과 책방 맞은편에는 수입차와 찻잔이 진열된 공간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터키에서”

이름에 걸맞게 책방엔 여행과 관련된 책들이 가득하다. 그만큼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뜻일 거다. 아닌 게 아니라 부부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현실 도피성 여행을 즐겼다. 남편도 같은 업종에 근무했으므로 어떻게든 휴가 기간은 맞출 수 있었다. 

가게 안은 살펴볼 것도 없이 새 책보다는 손때 묻은 책, 즉 중고책이 대부분이다. 구매한 것도 있고 여행지에서 가져온 책들도 있다. 여행을 가기 전, 부부는 항상 그 나라와 관련된 책을 구매해서 한두 권은 읽고 갔다. 

터키 일주 여행을 갔을 때였다. 전체 일주는 아니더라도 종횡으로 누비며 성 이스탄불에서 다시 이스탄불로 가는 중, 파묵칼레에 이르렀을 때다. 남편이 전적으로 의지하기도 했고, 지지도 많이 받았던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말조차 원활하지 않은 곳에서 당장 한국행 항공권을 구해야 했다. 다행히 어찌어찌 하루 정도 걸려서 올 수 있었다. 해외여행이라면 누구라도 계획을 세우고 떠난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황급히 돌아와야 하는 상황, 생각지 못했던 일정과 루트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조급함과 무거운 마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여행지가 정해지면 부부는 언제나 그 여행지에 맞는 책을 구매한다. 그렇게 여행지의 루트를 파악하고 그 나라의 전반적인 문화도 파악한다. 터키에 갔던 이유는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이슬람 문화를 접하기 위해서였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여행가게에는 대부분이 손때 묻은 책이다. 차를 마시며 읽다가 놓고 가면 그뿐이다. 책을 구매할 땐 반값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이슬람 여성의 전통 의상”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있는 터키는 우리에게 특별한 나라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는 어디서나 이슬람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나는 ‘이슬람’ 하면 히잡이 먼저 떠오른다. 히잡은 이슬람 여성들이 외출할 때 머리와 목을 가리기 위해 쓰는 베일로 얼굴 전부를 드러낼 수 있다. 일부 아랍권 국가에서는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이집트나 터키,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선택이다. 이 외에도 니캅, 차도르, 부르카 등이 있다. 니캅은 얼굴 아랫부분을 가리는 베일이고, 차도르는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망토형 베일이다. 부르카는 큰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가라는 정도가 가장 심한 의상으로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신앙과 겸손의 의미로 여긴다. 그러나 여성에게만 강제된 복장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무섭지 않을까, 처음 터키로 여행을 떠날 때 정양미 씨는 두렵기도 했다. 이슬람은 여성의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여기는 등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남자들이 터번을 쓰는 경우도 극히 일부였고, 라마단 기간을 지키는 것 또한 자유였다. 히잡이나 니캅, 차도르, 부르카 등에도 점차 익숙해지면서, 반감보다는 종교적인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백 명 중 90명 이상이 그렇게 하고 다닌다면 반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잘해야 60% 정도, 어떤 도시는 그 이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 손까지 가리는 사람이 있구나. 눈까지 가리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낯섦도 사라졌다. 처음엔 ‘얼굴을 다 가리면 밥 같은 건 어떻게 먹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상일 뿐이었다. 식당에서 봤더니 가리개를 살짝 들어서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그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트렁크에서 여행을 기다리는 책들이다. 책은 맞교환하기도 하고, 기부받기도 한다. 장르에 상관없지만, 여행에 관한 책이라면 더 반갑다. 모든 책은 반값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맨땅에 헤딩”

여행을 자주 다닌다는 이유로 주위에선 여행지를 추천해달라고 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정양미 씨는 특정한 곳을 추천할 수 없다. 자신이 가봤던 여행지는 다 좋았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닐 땐 며칠을 위해 업무를 당겨 처리하고 곧장 공항으로 가서 밤 비행기를 탔다. 약간의 무리는 있지만, 다음날 부부를 맞이하는 건 대만이나 홍콩 혹은 타이베이다.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 좋았다. 지금은 현지인이 마시는 차들을 직접 가져오게 되면서 여행의 기회가 더 많아졌다. 생계유지이기도 하면서 좋아하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또 하나의 기쁨이다.

가게에 놓인 물건들은 모두 수입품이다. 이는 주문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현지에 가서 가져오는 것이다. 처음엔 맨땅에다 헤딩이었다. 현지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일하러 가는 이유가 더 많이 곁들여진 여행은 일반 여행과 차원이 다르다. 그들의 문화며 정보는 필수다. 그래서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검색해야 했다. ‘차에 대한 문화가 있나? 차를 많이 마시나? 뭘 좋아하지? 어떤 차를 많이 마시지?’ 등을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면서 자주 갔던 나라는 결국 차 문화가 있는 나라였다. 대만, 베트남, 터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홍차를 물처럼 마시는 나라다. 우리는 홍차에 꽃이나 과일, 향 등이 가향된 것을 마시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그냥 먹는다. 그런데 러시아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실론티나 블랙티 같은 홍차에 흰설탕을 타서 먹는다. 꿀로도 유명해서 꿀을 타 마시기도 한다. 대만은 우롱차, 베트남은 연꽃차가 유명하다. 지금도 베트남에선 연꽃을 직접 덖어서 판매하는 브랜드가 많다. 터키 또한 커피가 유명하지만, 홍차로도 유명하다. 자연스레 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더 가게 되었다. 이 경우만 봐도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책은 정양미 씨에게 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손때 묻은 여행 이야기가 있는 곳 여행가게에서 손님 한 분이 책을 살피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화두”

서가 맨 위 라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고책이다. 그것도 대부분 절판된 여행기들이다. 순환의 의미로써 본인이 가지고 온 책을 바꿔 가기도 하고, 맞교환하기도 한다. 기부받기도 한다. 기부받는 책은 특별히 장르를 가리지 않지만, 여행책은 더 반갑다.

태흥리는 도심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인스타를 통해 알고 오는 관광객이 80%다. 이들 모두가 여행가게에 와서 만족하고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가게를 그만두게 될 때까지 화두일 수밖에 없다. 공들여 준비한 이 공간을 모두가 좋아해 줄 것인가. 이는 간절히 바라는 희망 사항이다. 그러면서도 도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양미 씨 역시 어딘가에 갔을 때 그 공간이 100%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게를 운영하는 한 끊임없이 배우면서 영원히 고민해야 할 숙제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아질까, 오직 그 길을 향해 갈 뿐이다. 

“잊지 못할 사람들”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살피고 가지만 현지에서 당황했던 적도 있다. 책의 내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안내서든 체험담이든 모든 건 글쓴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다. 반면 여행자는 자신의 시선에서 그 나라를 만난다. 친근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막상 가 보면 그렇지 않은 곳도 많다. 그래서 정양미 씨는 책의 내용을 믿는다기보다는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한다. 책에서 쟁점이 되는 것 중 해가 된다거나 불편한 것들을 파악하고 익히며 준비하는 것이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게 어떤 문화가 있는지, 사람들은 어떤 시각으로 뭘 좋아하는지 등을 중점으로 살핀다.

여행지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제주로 이주하면서 힘들어졌다. 그래도 잊지 못할 사람들은 그쪽에 가서 만난다. 티샵 등 자주 갔던 공간의 사람들, 늘 생각나는 이들에게 갈 땐 조그맣지만 한국적인 선물을 준비한다.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 경우에는 1년에 세 번 정도 간다. 벌써 5~6년이 되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염려도 되고, 문을 닫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된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여행가게에는 책방지기가 직접 여행지에서 사 온 차와 찻잔 등이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아일라”

‘터키’ 하면 나는 아나톨리아를 떠올렸었다. 그런데 요즘엔 영화 ‘아일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한국과 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공동으로 제작하고 2017년 발표된 아일라는 터키의 슐레이만 하사와 한국의 전쟁고아 이야기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한국전쟁 때 한국 파병군으로 선발된 기계부대원 슐레이만은 인민해방군에게 기습공격을 당할 때 평안남도 개천 군우리로 가는 도중 대학살 현장에서 떨고 있는 어린아이를 만난다. 슐레이만은 충격으로 말을 잃은 그 아이를 아빠의 마음이 아니라 실제 아빠로서 정성껏 돌본다. ‘아일라’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슐레이만의 보살핌으로 아일라는 실어증을 극복하고, 터키어도 배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6.25,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통일 구상으로 발발한 이 전쟁에서 많은 고아가 발생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전투병을 파견했던 터키는 앙카라 학원을 지어 한국 고아들을 보살폈다. 정부에서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그런 만큼 한국이라면 특히 더 반기는 터키인도 많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엔 한국전쟁 기념 공원이 있다. 친근함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선 노인만이 아니라 젊은이까지 한국 사람은 형제의 나라라며 반가워한다. 생경한 외국인을 낯섦이 아니라 ‘너희 나라에 가서 우리 같이 전쟁하고 그랬잖아’를 시작으로 대화의 물꼬를 튼다. 얘기란 게 그렇다. “어? 그래, 맞아”하고 건조하게 끝나지 않는다. “맞아. 터키가 우리 한국에 왔었어. 정말 고마워.” 이렇게 맞장구치는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단순하게 ‘같이 전쟁을 했었어’가 아니라 아일라와 같은 영화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깊이는 또 달라진다.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스물다섯 살의 청년 슐레이만이 믿는 것은 선과 사랑의 힘이다. 터키엔 조국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연인이 있음에도 아일라를 책임지기 위해 떠나지 못한다. 심지어는 사직까지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국을 떠나야 했다. 슐레이만은 터키에서도 대한민국 대사관을 드나들며 아일라를 찾았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스탄불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슐레이만은 죽음을 떠올렸다. 아일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죽고 싶지는 않았다. 행여라도 아일라가 구조팀으로 오지는 않았을까? 2002 월드컵 중계에서도 그는 계속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일라는 찾을 수 없었다.

기회는 간절함을 지닌 자에게 오는 것일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드라마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자가 찾아왔다. 그리고 아일라를 찾아주겠다고 했다. 우여곡절이야 없었을까마는 마침내 아일라를 찾았다. 일찍 남편을 잃고 한국 이름 김은자로 살아가는 아일라는 학교 청소부로 지내고 있었다. 영화도 영화지만, 실제 두 인물이 앙카라 공원에서 흘리는 눈물은 피보다 진한 눈물이었다. 영화 ‘아일라’에서 혈육은 피보다 더 진한 관심, 선과 사랑이었다. “아빠는 아이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산다.”라던 슐레이만의 대사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건물 안에는 여행가게와 또 다른 가게 연필가게도 있다. 연필가게에는 연필뿐만 아니라 엽서, 포스터 지우개 등이 있다. 여행지에서 문구류 구매도 즐기는 정양미 씨가 외국에서 직접 구매해 온 것들이다. 종달리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자리가 넓어지자 고민 끝에 남는 공간에 자신이 자주 쓰고 예정하는 세계 각국의 연필들을 모아놓았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 읽는 손님이 대부분”

여행가게에서는 커피보다 차를 중심으로 판매한다. 앞에서 밝혔다시피 해외 직구나 병행수입이 아니다. 직접 현지로 가서 가져오는, 현지인이 마시는 브랜드다. 지금껏 보지도 못했던 브랜드인데 현지에서 즐기는 차들이다.

발품 팔고 다니면서 새로운 차를 만나는 기쁨은 크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해외로 나가지 못한지도 일 년 반이 넘는다. 그나마 날씨가 추워지면서 차를 찾는 손님이 늘어서 다행이다. 손님들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일어설 땐 다시 꽂아놓고 간다. 구매하고자 할 땐 반값에 살 수 있다.

책 읽는 사람이 줄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너나없이 책을 읽는다. 실제로 내가 있는 동안에도 손님이 차지한 두 테이블 모두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곳엔 책 읽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손님이 여행자라서 여행에 관한 책에 더 흥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적당한 고요와 적당한 햇살은 책 읽기에 더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일부러 책을 들고 오는 손님도 계시다.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보는 손님도 많지만, 책을 보는 손님이 더 많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주방(좌)과 동판화(우)가 진열된 공간이다. 원어로 된 표지 디자인의 동판화는 딱 10점만이 남아 있어서 판매를 중단하고, 같이 보기 위해 소장하고 있다. 각국에서 가져온 동판화는 다른 것에 비해 색이 바래지 않아 좋다. 단점이라면 무거워서 많이 가져오기 힘들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특별한 손님들”

종달리 여행가게에서 만난 연애 커플이 있었다. 커플은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다시 여행가게를 찾아왔다. 연애 시절, 신혼여행, 첫 번째 임신 때, 그리고 아기를 낳은 후에도 두 번이나 왔다. 정양미 씨도 마찬가지지만 커플에게도 그런 시간이 흐른 것이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은 커플의 자녀가 연애할 때도 여행가게로 이끌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에게 흐르는 시간과 함께 정양미 씨는 커플과 공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원히 잊지 못할 손님이다.

다양한 손님이 있지만, 여행지에서 여행가게가 생각났다며 손편지를 보내는 분도 많다. 이런 의미가 쌓일수록 정양미 씨가 얻는 위로는 뜨거워진다. 작년엔 코로나19로 정말 어려웠다. 이때 그는 주방 맞은 편에 붙여둔 손편지를 읽으면서 힘을 얻었다. 손편지가 보기 힘든 요즘, 손편지를 읽으면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됐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일없이 웃음 한 점 베어 문다. 상담심리사 시절과는 전혀 다른 자신을 보는 것이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기분이다.

정말 공부하고 일만 했었다. 그러다가 제주에 와서 이런 공간을 꾸렸다. 그리고 손님들이 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 손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잘 기다릴 것인가? 그는 오늘도 준비하고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첫 손님이 오면 겨울날 창가로 드는 햇살만큼이나 반갑다. 하루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양미 씨도 가능한 첫 손님에게는 겨울날 햇살로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온기 가득 품을 수 있도록.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여행가게를 다녀간 손님들이 다른 여행지에서 보내온 손편지들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손때 묻은 여행 이야기가 머무는 곳 여행가게는”

여행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래서 더 불안한 날들이기도 합니다. 하루쯤 여행가는 기분으로 남원읍 태흥리 여행가게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한 잔의 차와 더불어 서가에 꽂힌 여행 이야기 중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다 보면 정말 한 잔의 찻값으로 여행을 살 수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차 문화도 경험하고 여행의 기분도 누려보세요.

찾아가는 길: 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 929
인스타: www.instagram.com/travelshop_jeju
영업시간: 화~토요일 11:00~18:00 (일, 월 휴무일: 인스타 공지함)

# 고봉선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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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 2021-12-07 17:58:42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건필!.
112.***.***.6

그래도 2021-12-07 13:10:20
잘 견디셨네요. 잘 될 거예요
119.***.***.18

태흥리 2021-12-07 12:24:02
자주 지나다니는 마을인데 이런 곳이 있었네요.
118.***.***.173

느닷없는 아들 2021-12-07 12:16:25
주인 할머니의 아들.
집 가진 것을 벼슬처럼 아무런 생각이나 배려없이 건들건들.
전형적인 제주의 못난 아들들... 아직도 있군요.
11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