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21) 이소영, ‘별것 아닌 선의’, 어크로스, 2021.

이소영, ‘별것 아닌 선의’, 어크로스, 2021. 사진=알라딘.
이소영, ‘별것 아닌 선의’, 어크로스, 2021. 사진=알라딘.

친애하는 동료, 이소영 선생님(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의 글을 처음 우연히 읽었을 때를 기억한다. 너무도 아름다운 글을 읽을 때의 충격. 나는 비록 글쓰는 일이 힘들다고 늘 엄살 부리는 게으름뱅이지만, 이 무능한 독자에게도 다행스럽게도 두 눈은 아직 살아 있었던가. 금세 그녀가 탁월한 에세이의 장인임을 알아챘다. 그녀는 일급의 에세이스트이다. 그간 기성 작가가 펴낸 수십 여권의 산문집을 동시에 심사해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작가’ 이소영의 에세이에 대한 나의 평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더욱 공고해졌다. 

이토록 우아하고 다정한 책을 두고 이렇게 멋없는 문장들로 글 길을 열어 본다. 탁월한 책을 앞에 두고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게 재능 없는 평론가의 윤리라고, 서툰 독자는 항변해 본다. 책을 읽을 모두가 알게 될 사실을 전문가의 평가인양 굳이 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별것 아닌’ 권위에 기대어서라도 그런 말들을 앞세우고 싶었다.

나는, 가까운 이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더 깊게 이해했다고 느낀다. 깊은 대화를 했을 때보다 글을 통해서 오히려 더 깊이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다(물론 그 생각이란 대체로 착각이겠지만). 더 깊은 생각의 울림을 얻는다. 그러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독자’라고. 이 또한 직업병이 아닌가 싶은 자괴감, 여기에 비슷한 고백을 하는 작가들과 동류가 되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섞인다. 물론, 사실은 타인의 마음을 지독하게도 헤아릴 줄 모르지만, 글을 통해서는 간신히 이런저런 생각을 해내는 연습을 문학 공부를 통해 조금 더 했을 뿐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무 글에서나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 그런 글만이 내 마음의 움직임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했다. ‘별것 아닌 선의’에 실린 에세이들은 그런 힘이 있다. 그 힘을 우리는 흔히 문학적 재능이라고 부른다. 물론, 문학적 재능이란 미문을 꾸며내는 언어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가 직조해낸 문장들은 성찰과 윤리의 올곧은 힘 덕분에 아름답게 빛난다.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듬어 안으려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는 지극히 섬세해서 여리지만, 더없이 따스하다.

‘별것 아닌 선의’의 또 다른 힘은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그녀의 기억은, 정말로 힘이 세다. 나는 가장 가깝고, 자랑스러운 학문적 ‘동업자’인 그녀가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의 한 분야인 ‘기억 연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녀도 글에서 적고 있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효과처럼, 그녀가 지닌 기억의 곳간이 풍요롭다는 사실을 정확히 안다. 그 기억들이 부끄러움과 절망, 좌절의 순간일지라도 이 암담한 시간을 그녀는 타인을 향한 이해와 배려로, 그리고 소망과 기도의 시간으로 바꿔놓는 마술을 부린다.

기억은 글쓰기의 귀중한 재능이다. 그녀는 사소한 기억의 조각으로부터 공감을 끌어낸다. 때로 아프고, 때로 슬며시 미소짓게 하는 이야기들을 발굴해낸다. 그 기억은 아마도 타고난 기억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윤리라고 말할 만한 적극적인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미 기억에서 잊힌다 해도 좋을 만한 누군가와의 사소한 추억, 심지어는 누군가와의 다툼의 기억까지, 이런저런 기억을 통해 그녀는 타인과 오래 함께 하고 타인을 깊이 헤아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기억의 연금술은 행복의 연금술일까. 다른 이들과 어울렸던 행복한 기억은 우리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이렇듯 나한테만 의미를 갖는 사소한 장면이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백 가지는 된다. 한 기억을 다섯 번씩 불러낸다 하더라도 살아가며 오백 번의 아픔은 견뎌낼 수 있을 테다. 그 가운데 하나를 꺼내어 썼으니 여전히 아흔아홉 개 남았다.
(237쪽)

그렇다면 그녀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별것 아닌 선의’는 저자의 신념이 아니라 차라리 저자의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나는, 독자가 아니라 그녀의 가까운 동료로서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곁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자주 베푸는 ‘큰 선의’의 수혜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녀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나 역시 안간힘을 쓴다 해도 이처럼 놀라운 글들을 써내는 저자의 마음을 끝내 온전히 헤아리지는 못할 것을, 안다. 

어쩌면 ‘별 것 아닌 선의’의 저자는, 글쓰는 게 힘겨워 주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되도록 멀리하는 편인 나 같은 위인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맞다, 그녀는 진정으로 글쓰기를 즐긴다. 그렇다고 그녀가 은근히 위트 넘치는 표현을 즐기는 것에서만 이 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라고 글을 쓰면서 아무런 수고와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바보 같이 부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삶에서 글을 길어 올린다. 글쓰기는 그녀의 삶 속에 다시 스며든다. 글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고, 글에 담긴 작지만 의미 있는 다짐과 소망은 그녀의 삶을 웃음과 상처와 더불어 한 발 한 발 나아가게 한다. 그녀는 글쓰기로 살아간다. 나는, 그녀에게 글쓰기가 삶의 치유이자 간절한 기도의 예식임을 직감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읽고 감동하는 것은 그 글에 담긴 진심을 믿기 때문이다. 

이토록 한심하고 불완전함에도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 전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지닌 쓸모 중 하나라면, 나는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글을 쓰고, 더욱 마음을 담아서 쓸 것이다.
(70쪽)

그녀가 계속 쓸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마음이 계속 안온할 수 있으리라.

# 노대원

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대산대학문학상(평론 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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