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근 인문스튜디오협동조합 노리왓 이사장

내 고향 ‘귀덕’은 조용하고 평범한 마을이다. 대부분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 우리 마을 사람들은 불어오는 자연과 세상의 풍파를 있는 그대로 맞고 순응하며 불평 없이 단단하게 살아왔다. 그들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시간에 굴하지 않고 별다른 생색도 내지 않은 채 그저 자신들의 세월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땅을 보듬어 온 것이다. 

마을 안에서 내가 가장 고민한 부분은 ‘귀덕’이라는 한 장소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꾸려가야 할 마을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것이었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 그것은 ‘귀덕밤마실’이라고 하는 문화행사를 통해 만들어졌다. 마을의 옛 장터 문화를 복원해서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문화의 장을 만들어 보자는 뜻으로 시작한 행사는 태어난 곳과 상관없이 ‘마을 주민’이라는 한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이 직접 마주하고 우리 마을만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즈음,  JDC 마을공동체 사업에 공모를 하게 되었고 사업을 통해 마을 안에 비어 있던 공간이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교육과 문화의 플랫폼인 ‘귀덕향사’  로 탈바꿈했다. 공간이 생기자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게 되면서 제주의 인문학적인 요소를 요리와 교육, 문화 예술 사업으로 확장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인문스튜디오협동조합 노리왓’이라고 하는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 

‘귀덕밤마실’과 ‘귀덕향사’를 통해 이루어진 여러 가지 교육 문화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지만, 주민 전체의 참여를 끌어내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있었다. 특히 마을의 어르신들이 새로운 문화를 누리시지 못하고 소외되지는 않으시는지에 대한 걱정은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그 때 실마리를 제공해 준 것은 한림읍사무소의 주민참여예산을 통해서 하게 된 ‘마을아카이브 사업’이었다. 

출발은 지역 어르신들의 살아생전 모습을 잘 기록하고 어르신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자손들이 함께 보며 기쁘게 추억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세밀하게 기획하고 한분 두분 인터뷰를 하는 과정이 계속되며 아카이브 사업은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분들의 살아온 시간들에 묻어 있는 마을의 옛 풍경과 생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제주의 소중한 역사를 담는 작업이 되었다. 

이렇게 모인 마을의 역사는 우리 마을의 정체성을 다듬는 일이었고, 이런 지역성을 기반으로 협동조합은 제주문화예술재단의 ‘고치가치 프로젝트’ 사업을 유치해 지역의 문화 예술 전문가와 함께 제주와 마을 고유의 문화를 활용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진행할 수 있었다. 

여전히 진행중 이지만 우리 ‘귀덕1리’의 알찬 성과는 ‘귀덕밤마실’이라는 소통의 출발점과 ‘귀덕향사’라는 플랫폼 공간, ‘인문스튜디오협동조합 노리왓’의 고민, 거기에 지역의 행정적인 지원과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모든 일들은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마을은 지역 문화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계속 움직이고 행정기관은 문화복지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더 과감한 투자를 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함께 하는 꾸준한 노력들은 분명 마을에 새로운 피를 돌게 하고, 로컬문화전성시대에 제주의 큰 축이 되어 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문화를 나누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마을의 가치라 믿으며 2022년이 그런 가치를 더 단단하게 다지는 한 해가 되길 기대해 본다. / 이남근 인문스튜디오협동조합 노리왓 이사장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