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22)  강영봉·김순자,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 사전, 한그루, 2021

대학 초년 시절 선배 집에 놀러 가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수많은 책들 누군가의 책장에는 마치 시집들의 잔치인양 온갖 시집들이 가득했고, 또 누군가의 책장에는 말로만 듣던 금서들이 숨죽이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그 가운데 한 권이 내 손에 들려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빌려달라고 했지만 한 번도 돌려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 선배도 그럴 줄 알고 내주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지금은 퇴직교수인 안 모 선배의 집에서 보았던 사전들이다. 한 두 권도 아니고, 십 수 권, 그것도 전공과 무관한 다양한 분야의 사전들.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사전은 한 나라 문화의 척도야!”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그렇다. 사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분야의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는 뜻이자 그러한 지식이 체계화하여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식이 누군가 또는 어떤 집단에게 독점되면 허영과 오만에 빠져 끝내 사장死藏되고 만다. 사전은 이러한 지식의 사장에서 벗어나는 가장 편리하고 행복한 길이다. 

말모이, 옥스퍼드 영어사전, 그리고 대한화사전

사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11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편찬하기 시작한 《말모이》이다. 비록 출간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가 편찬한 《우리말 큰 사전》에 앞선 최초의 우리말 사전임에 틀림없다. 특히 동명의 영화가 상영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같은 이유로 사이먼 윈체스터의 《교수와 광인》이란 책과 동명의 영화를 통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얽힌 일화가 새삼 기억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역시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이다. 이름인 ‘철차轍次’는 송대 문호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을 좋아했던 부친이 둘째 아들인 소철처럼 둘째로 태어난 그에게 의도적으로 지어준 것이라 하니 의미심장하다. 모로하시 데쓰지는 중국에 관비로 유학하면서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1927년 대수관서점大修館書店의 사장 스즈키 잇페이(鈴木一平)의 요청으로 사전 편찬에 착수하여 1943년 제1권을 완성하고, 1959년 마지막 제13권(현재는 보권 포함 15권)을 출간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백내장으로 인해 한 쪽 눈을 잃었고, 스즈키 잇페이는 대학에 다니는 장남을 퇴학시키고 차남은 대학입학을 만류하여 식자공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1945년에는 동경대공습으로 인해 칸다(神田, 데쓰지의 고향)에 있던 출판사가 전소하는 바람에 어렵게 만든 활자를 모두 잃는 일도 벌어졌다. 표제어 목판 활자는 이시이 모키치(石井茂吉)가 8년간에 걸쳐 만들었다. 

전체 수록 한자 49,964자, 어휘는 50만 개. 중국 역대 가장 많은 한자를 수록한 《강희자전》보다 많은 숫자를 실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자와 간자簡字는 물론이고 일본식 한자를 모두 실었으며, 성어, 숙어, 격언, 속어, 시문 전고典故, 인명, 지명, 관직명, 연호, 식물명, 정치경제용어, 현대 한어 등 그야말로 한자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각별히 중요하다. 사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일생일업一生一業’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는 사전 외에도 유가 경전과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우리나라에도 《중국 고전 명언사전》(김동민 등 공역, 솔, 2004), 《장자 이야기》(조성진 역, 사회평론, 2005), 《공자, 노자, 석가》(심우성 역, 동아시아, 2003) 등이 번역 출간되어 있다. 

《교수와 광인》의 ‘광인’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하나의 사전을 만드는 일은 방대한 자료수집과 세밀한 분류를 위한 오랜 시간과 공력만이 아니라 심상치 않은 집중과 몰입, 끈질김과 인내심, 그리고 협업이 요구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런 까닭에 사전 편찬은 때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대한화사전》이 편찬되어 세상에 나온 후 한자의 본향인 중국인들이 받았던 충격은 남달랐을 것 같다. 그런 까닭인지 수십, 수백 명의 학자,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중문대사전》(대만 1960년대), 《한어대사전》(중국 1975~1994년)이 세상에 나왔다. 내용은 《대한화사전》보다 풍부할 수 있으나 사전 편찬과 관련된 감동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사전》

오늘 소개할 책은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 사전》이다. 서두가 길었던 까닭은 《사전》 만들기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새삼 떠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서사인가 사전인가?」라는 제목으로 《제주어 마음사전》을 소개할 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나라에는 전국의 방언을 모은 총집은 물론이고 지역마다 각기 방언집이 나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초 어휘’를 활용한 ‘제주어 사전’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싶다. 물론 용례사전이 없는 것은 아니나, 방언사전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꽤나 두툼한 책을 받아들고 처음 생각한 것 역시 ‘기초 어휘’ ‘활용 사전’이란 말의 의미였다.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 사전》은 제주어 기초어휘 349개에 대한 방언형을 제시하고, 그 의미와 어휘 정보, 용례 등 실제 언어생활에서의 쓰임새 제시에 목적을 두고 있다.”(6쪽)

기초어휘란 “한 언어에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최소한의 어휘를 말한다.”(6쪽) 

말인 즉 제주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어휘를 골라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를 담겠다는 뜻이다. 각 기초어휘는 표제어에 따라 기본의미, 대응표준어, 방언분화형, 문헌어휘, 어휘설명, 용례, 관용표현, 관련어휘, 더 생각해보기 등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111컷의 사진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친절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제주어에는 고어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가장 많이 예로 드는 것이 바로 아래아 ‘、’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으로 한국어의 고어가 그대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 사전》에서 「문헌 어휘」를 보면 고어古語 사전류의 표제어가 제시되어 있다. 

제주어로 다리(각脚)는 ‘가달’이다. 기본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의 몸통 아래 붙어 있는 신체의 부분이라는 뜻인데, 문헌 어휘를 살펴보면 「처용가」에서 ‘가롤’이라고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달’이란 제주어는 ‘가롤’에서 온 어형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람을 뜻하는 제주어 ‘보름’(《용비어천가》2장), 구름을 뜻하는 ‘구룸’(《용비어천가》42장), 들을 뜻하는 ‘드르’(《용비어천가》69장) 등도 마찬가지이다. 

‘궨당’은 친족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방언형 ‘궨당’은 문헌 어휘 ‘권당’(번역소학언해》9:36)에서 온 말이다. ‘시가 권당’을 ‘씨궨당’이라 하는데, 이 또한 문헌 어휘 ‘쉬권당’(《부모은중경언해》16)에서 온 방언형이다. ‘궨당’과 비슷한 의미로 ‘덥, 덥덜사니’, ‘방답, 방상’, ‘우던’ 등이 쓰이기도 한다. ‘덥, 덥덜사니’는 같은 친족에 속하는 무리, ‘방답, 방상’은 ‘종친’, ‘우던’은 ‘종족’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방상’은 《한불조전》(1880:303)의 표제어로 나오는 ‘방셩(村)’이 ‘방셩>방성>방상’의 변화과정을 거친 방언이다. 용례는 이러하다. “가문잔치가 뭣인고 허면은 가문, 방상라 는 거, 거난 궨당덜 멕이는 잔치라(가문잔치가 뭣인가 하면 가문, 종친더러 말하는 것. 그러니 권당들 먹이는 잔치야).”(168~169쪽)

제주어가 다른 지역어와 크게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제주어로 산은 산山이 아니라 묘墓, 즉 사람의 무덤이란 뜻이다. 묗(《훈민정음》해례본: 용자례)에서 온 말이다. 용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라산더레 가당 보믄 막 웃데 산이 잇어(한라산으로 가다 보면 아주 윗대 묘가 있어).” 제주어로 山을 의미하는 말은 ‘오롬’, ‘오름’이다. 이는 향가 「혜성가」제5구 ‘악음岳音’과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1601) ‘오로음吾老音(오롬)’,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1653)에 ‘올음兀音(오름)’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땅이름 등에 ‘메’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방언형 ‘메’는 문헌 어휘 ‘묗’가 ‘묗>메’의 변화 과정을 거친 어형이다.(248쪽) 이렇듯 제주어는 고어가 살아 숨 쉬는 고대어의 저장고와 같다. 

그런가하면 제주어로 새롭게 형성된 글자도 있다. 예를 들어 ‘두리다’가 그것인데, 기본 의미는 나이가 적다는 뜻으로 표준어는 ‘어리다’이다. “우린 사삼사건 때는 두리난 려가 불고, 왜정 땐 곱으레 가나고(우린 사삼사건 때는 어리니까 내려가 버리고, 왜정 땐 숨으로 갔었고)” “막둥이로 컨 경 두린다게(막내둥이로 커서 그렇게 어리다). 

말은 홀로 살지 않고 더불어 산다. 그래야만 말의 본래 속성인 표시와 전달이 명료해진다. 사전도 그러하다. 용례를 통해 그림을 그려주면 보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이 활용사전의 본색이자 장점이다. 여기에 관련 어휘를 살펴보면 사전을 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예컨대, 두린아기, 두린아이, 얼아이, 얼애기 등은 어린아이와 관련된 말이다. 잠도 참 다양하다. 굴쿠리, 좀푸데, 좀충이(잠꾸러기).(798쪽). 두좀(누에가 두 번째 자는 잠), 베록좀(노루잠, 깊이 들이 못하고 자꾸 놀라 깨는 잠), 자단입(잔입, 자고 일어나서 아직 아무 것도 먹지 아니한 입), 좀비(잠비, 잠자라고 오는 비), 어스름좀(초저녁잠), 여시좀(겉잠), 첫좀(첫잠, 막 곤하게 든 잠), 홍게좀(귀잠, 아주 깊이 든 잠), 좀잠(한잠, 깊이 든 잠, 잠시 자는 잠).(799쪽)

사실 사전은 그리 재미있는 책과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단지 공구서工具書일 따름이니 필요할 때 찾아보면 그 뿐이다. 하지만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 사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중간 어디든지 펼쳐들고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생생한 용례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또한 본서의 큰 장점이다. 

일러두기에서 말하고 있다시피 문헌 어휘는 남광우의 《고어사전》, 유창돈의 《이조어사전》,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박재연 등의 《고어대사전》 등을 참조했고, 용례는 국립국어원의 ‘지역어 조사사업’, ‘민족 생활어 조사사업’과 제주특별자치도의 ‘제주어 구술 채록 사업’ 등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당연히 이전의 조사, 연구, 채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또 한 명의 이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43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만 2년 동안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서 근무했던 공무원, 나비박사로 널리 알려진 곤충학자, 서귀포시 토평동 입구 작은 공원에 흉상이 서 있는 인물, 바로 석주명石宙明 선생이다. 그는 자신이 쓴 《제주도방언집濟州島方言集》 서문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지라 공통방언의 경향만 알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했지만 제주도 방업을 수집, 채록, 정리한 그의 업적은 제주도 방언사에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이전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조선어방언 연구(朝鮮語方言の硏究)》와 고노 로쿠로(河野六郞)의 《조선방언학시고朝鮮方言學試攷》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으되 만약 선생의 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쪽팔려’ 어찌 할 뻔 했는고? 

또 다른 제주어 사전을 기대하며

시골말, 사투리, 방언 등등 표준말이 아닌 지방 언어에 대한 호칭은 여러 가지인데, 나는 제주어처럼 각 지역의 이름을 딴 호칭이 좋다. 서울에는 서울말, 대구에는 대구말처럼 지역마다 각기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제주어 기초어휘를 활용한 사전을 소개했지만 다음에는 또 다른 제주어 관련 사전을 읽어보고 싶다. 그 중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제주어를 활용하면서 제주의 모든 것을 망라할 수 있는 백과사전과 같은 책이다.

이런 책을 옛날에는 유서類書라고 불렀는데, 조선시대 이수광李粹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이나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그리고 중국 명대 《영락대전》이 대표적인 유서이다. 자전이나 사전에 비해 보다 방대한 분량에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는 지라 한 두 명의 공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어 국가 차원에서 일종의 문화사업으로 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가 ‘특별’한 ‘자치도’로 명색을 갖추고자 한다면, 이런 유서 하나 제대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책을 기대하면서 다시 한 번 펼쳐본다. 《제주어 기초어휘 활용 사전》에 ‘기대하다’는 뭐라고 했나? 

#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shim42star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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