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4) 아버지와 나는 참 애틋했습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하는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글
돈내코 선영 장지. ⓒ 강충민
아버지를 겨울 들판에 묻고 돌아왔습니다. ⓒ 강충민

아버지를 겨울 들판에 묻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돈내코 선영 장지에서 내려와 아버지가 병원으로 가시면서 비어있던 집을 정리하다 보니, 이미 시간은 밤 10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각시가 운전하는 차에 설핏 졸았던지,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창문을 내린 탓에 찬 눈바람이 쏴악 하고 들어 온 다음이었습니다. 아버지 장례를 다 치르고 난 뒤 차가운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수요일(12월 22일)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정신없이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모시느라 미처 감정을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입관을 하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났습니다. 모든 기력이 쇠할 만큼 끊임없이, 끊임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꺼이꺼이 숨넘어갈 듯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참으로 우스운 건 그렇게 울음을 토하다가도, 밥때 되면 배고프고, 한걸음에 달려와 준 내 벗과 같이 얘기를 나누다 보면, 깔깔대며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를 겨울 들판에 묻어 놓고 온기가 남아있는 내 집으로 가는 길에 그런 부끄러움이 차디찬 눈발처럼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참 애틋했습니다. 

아버지는 때론 까닭 없는 화와, 매와 날선 말로 아들을 힘들게도, 아프게도 하신 적도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공천포 바다에 수영 배우러 몇 번을 가도 물에 뜨지 않자, 그 많은 자신의 친구들 앞에서 “지 엄마 닳아서 제대로 하는 게 없다.” 했던 아버지.
중학교 때 밤늦게 집에 왔다고, 그때까지 있던 내 친구 집에 무턱대고 전화해서 그의 아버지에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종잡을 수 없는 아버지의 분노 상황에 어리둥절했고, 예측할 수 없는 감정변화에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유독 나에게 심했고, 그런 감정 행위 뒤에 10분도 채 안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는 행동은 참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뒤끝이 없었지만 나는 그 “뒤끝 없음”이 오히려 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온통 내가 있어 되려 나를 아프게 한 거라고 그를 겨울 들판에 묻고 온, 눈발 흩날리는 밤 도로에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돈내코 선영 장지. ⓒ 강충민
돈내코 선영 장지에서 ⓒ 강충민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효돈 신효마을, 걸궁행사 때 아버지는 키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커서 맨 앞에 포수 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집으로 이동할 때 아버지가 한구석에서 나를 부르고 허리춤에서 몰래 “땅콩돈부” 과자를 주셨습니다. 행여 그 과자가 떨어지면 어쩌나, 아버지의 자세가 엉거주춤했으리라는 생각은 그때는 못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군대에 보내놓고 보고 싶은 마음을 편지에 적어 5일마다 훈련소로 꼬박꼬박 특급등기로 보냈던 아버지

대학 3학년 때 주말에 집에 오지 않은 아들, 걱정되고, 보고 싶다고 물어물어 과사무실로 찾아오셨던 내 아버지.

아버지는 내 아들, 당신의 손자 손을 잡고 이발소에 가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내 아들이 태어나고 걸을 수 있게 되자 당신 차를 운전하지 않고, 손자 손을 잡고 신효 앞동산 이발소까지 걸어갔습니다. 180이 되는 큰 키에 이발하고 돌아오는 길, 먼발치에서도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아이스크림 먹는 손자와 손을 잡은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참 느렸습니다. 동네사람들에게 당신 손자 다 보여주려는 듯 느렸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이 많았습니다. 화도 많았습니다. 웃음도 많았습니다. 좋으면 좋다 하시고 싫으면 싫다 꼭 하셨습니다. 늘 당신 기분이 우선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젊을 적, 고생을 많이 하셨기에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 했습니다. 신발을 사도 메이커만 선호하셨고, 화려한 색깔의 모자와 선글라스를 좋아하셨습니다. 당뇨에 홍삼엑기스가 좋다 들었다고 떨어질 때면 꼭 얘기했습니다. 나이 들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가 오히려 나는 좋았습니다. 

작년 겨울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100만 원짜리 코오롱 롱패딩을 입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주시 의류매장에 와서 아버지가 가장 맘에 들어 하는 검은 색의 그것을 사드렸습니다. 정작 그렇게 사드린 롱패딩을 아버지는 아껴서 방에 걸어두기만 하시고, 몇 번 입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동네에 나갈 때는 그리 추운 날도 아니었지만 그 패딩을 입고 나가셨다 들었습니다. 신협에 근무하는 동네 형님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돈내코 선영 장지. ⓒ 강충민
돈내코 선영 장지에서 ⓒ 강충민

올해 아버지는 그 패딩을 단 한 번도 입지 못했습니다. 올해 2월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제주대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를 차디찬 겨울 들판에 묻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와 똑같이 잘 울고, 잘 웃고, 잘 화내는 아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아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겪는 아버지의 빈자리에 나 혼자 유난 떨고 있습니다. 

한라산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시내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아버지 가시고 나자 눈이 많이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 아들 힘들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맞춰 가셨나 봅니다. 그리고 이 하얀 눈을 보면서 내년 첫 제사 때는 올해 입지 못한 롱패딩을 아버지 영정 옆에 걸어 입혀 드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이 편지는 슬픔을 같이 해준 분들에게 정제되지 않은 감정으로 보냈던 것을 다시금 정리해서 보냅니다. 혹여 제 고마움을 받지 못한 분들에게 제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를 겨울 들판에 묻고 닷새가 지난 아침
2021년 12월 29일 

강충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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