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련·부춘화·부덕량 열사,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주 출신 첫 선정 

사진 왼쪽부터 김옥련, 부춘화, 부덕량 열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사진 왼쪽부터 김옥련, 부춘화, 부덕량 열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이자 제주지역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던 ‘해녀항일운동’을 이끈 김옥련·부춘화·부덕량 열사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제주도 출신이자 국가 포장을 받은 사례로는 처음이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김옥련·부춘화·부덕량 열사를 ‘2022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정된 세 명의 해녀는 일제와 해녀조합의 수탈, 착취에 항거하며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제주시 구좌읍 일대에서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다.

해녀항일운동은 여성이 주체가 돼 여성을 중심으로 이뤄진 항일운동으로 230여 회에 달하는 시위, 연인원 1만 7000여 명이 참여한 제주 최대 규모로 이뤄졌다. 

해녀항일운동은 제주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1918년 10월 7일), 조천만세운동(1919년 3월 21일)과 더불어 제주지역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된다.

김옥련·부춘화·부덕량 열사는 모두 구좌읍 하도리 출신이다. 부춘화 열사는 15세, 김옥련 열사는 9세, 부덕량 선생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물질을 시작했다. 

1930년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해조류 부정판매에 항의하던 하도리 청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녀들은 함께 저항하기 시작했다.

1931년 12월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한 하도리 해녀 회의에서 세 사람은 대표로 선출됐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택해 하도리 해녀 300여명은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한다. 해녀조합의 부조리를 규탄하자 그에 공감하는 해녀들이 합세하면서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성난 해녀들의 쇄도는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이어졌고, 구좌면사무소까지 다다랐다. 

일제 당시 경찰 최일선 기관인 주재소 경관대가 총칼로 무장해 시위를 해산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면사무소 지부장은 책임지고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해녀들은 곧바로 다음 장날인 1월 12일 다시 규합했다. 구좌면 뿐만 아니라 정의면(현 성산읍), 연평리(현 우도) 해녀들도 가세했다. 

이들은 세화리 장날이자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 겸 해녀조합장인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 도사가 순시 차 구좌면을 통과하는 날에 제주 일대 해녀들을 이끌고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김옥련·부춘화·부덕량 열사는 해녀들을 규합하며 시위에 앞장섰고, 모든 해녀 투쟁 참여자를 대표해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 요구조건을 내밀며 제주도사와 직접 협상했다.

이에 제주도사는 요구조건을 5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갔으나 일제는 무장경찰을 출동시켜 강제탄압에 나섰고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수십 명의 청년을 체포했다.

김옥련·부춘화·부덕량 열사는 경찰에 체포돼 미결수로 수 개월간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고초를 겪었고 안타깝게도 부덕량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져 1937년 28세 나이로 사망했다.

부춘화 열사 역시 목포경찰서 유치장에 압송돼 6개월 후 석방됐으며 1995년 88세로 운명했다. 김옥련 열사도 일본 경찰에 검거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2005년 94세로 사망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03년 부춘화 선생, 2005년 부덕량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으며, 김옥련 선생에게는 2003년 건국포장을 수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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