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변한 치료도 못받고 숨져버린 훈련병

1970년 4월 중순 나는 전남 광주 31사단 소속 육군 신병훈련소에 사병으로 입대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6월 초순경 모슬포 주둔 <육군 제주 경비부대>에 배속되었다. 소위 안방 군대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의 사병으로써의 군대생활은 초장부터 결코 순탄치가 않았다.

작전과(과장 김철우 대위, 부산 출신)에서 나를 차출하여 작전서기병으로 근무케 하였다. 작전과 서기병은 2급 비밀취급 인가를 받아야 하는 직책이었지만, 손바닥만한 모슬포 지역에서는 신원조회를 쉽게 통과할 수가 있었다. 조사나온 순경에게 담배값 정도 뇌물을 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보고서가 작성되던 시절이었다.

2~3개월 참 편한 군대생활을 보냈다. 단 하나 맘고생을 하게 만드는 것은 작전과 하사관이 점심 때만 되면 취사반에 가서 라면을 두개 얻어서 군수과 차고에 가서 디젤 기름을 얻고 반합에다 그것을 요리해서 갖다 바치는 식사당번 일이었다. 시커먼 연기가 나는 기름으로 요리를 했으니 냄새가 좋을 리가 없었다. 몇 번을 일부러 기름냄새나게 만들어다 주었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그만 두라고 했다.  나 보다 몇 개월 일찍 '짬밥'(=군대밥)을 먹기 시작한 김재기 일병이 대신 맡아서 잘 해 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안대  모슬포 파견대장 황기봉 상사가 작전과에 나타나 혼자 전화 당번을 서고 있는 나를 보더니만 , 내가 누구인지를 즉시 알아 봤다. "어~어, 너 어떻게 여기 근무하게 됐지?"

황 상사는 나의 할아버지로부터 1968년 경 '백조일손' 관련 일체의 서류를 압수해 간 장본인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할아버지는 낙담하고 실성하여 1969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못다한 '유업'을 나에게 넘겨주고....

"있다가 일과가 끝나면 내 사무실로 와!" 하면서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작전과 문을 황급히 나가 버렸다. 내 심장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그의 사무실은 행정반 몇 개 부서가 들어 있는 같은 건물 동쪽 편에 있었다. 그 황 상사는 부대장이 중령이었는데 그와 맞 먹었다. 그는 항상 사복차림으로 권세가 상당하였다. 일반 장교들은 '보안대에 불려가서 소위 쪼인트를 안 까인 사람이 없다'는 정도로 부대내 소문이 뒤숭숭하였다.

나 같은 졸병 하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릴 수 있다는 공포로 몇 시간을 떨어야 했다. 그와 '조우'하는 시간이 왔다. 보안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황 상사가 버티고 앉아 있었고 바로 옆에서는 한 사병이 조그만 곡괭이 자루에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나의 육감으로 아마도 저 곡괭이 자루로 나를 고문하려나 보다 여겨졌다. 나는 문을 등뒤에 열어 둔 채 황 상사가 걸상에 앉으라는 명령을 하는데도 앉지를 않았다. 나에게 그나 그 부하가 다가오면 나는 사력을 다해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의 집 뒷뜰에서 저들에게 매 맞아 죽을 일이 있나 싶었다. 그는 다짜고짜 "너는 작전과에 근무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당장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좋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 주십시오!"

"몰라서 묻나?"

"전혀 모릅니다."

그는 조금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대한민국에 충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군대에서 내 보내 주십시오. 의병(병으로 인한) 제대처럼 나를 '사상불온'으로 군대에 부적격자로 제대케 해 주십시오."

그는 나더러 그냥 나가라고 했다. 그와 조우가 끝나고 나는 넋을 잃고 내무반으로 돌아와서 할 일 없는 나날을 보냈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내 고모쪽으로는 아주 가깝지만 고부 이씨 편으로는 먼 친척 되는 이유근 대위가 우리 부대 군의관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위병소에 당도하자 마자 마중 나가서 나의 현재의 신상문제를 다짜고짜 고해 바치고 '나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좀 기다리게나, 우선 부대장에게 가서 신고나 하고 나서 보자"고 하면서 나를 달랬다.

바로 뒷날 그는 나를 의무실로 불렀다. "오늘부터 위생병으로 여기서 근무해! 부대장 허락을 받았어."

위생병은 장교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참말로 특과 중 특과였다. 군의관 명령이면 인사과의 외출증도 필요가 없이 위병소를 무시로 출입할 수가 있었다.

의무실에서는 군가족과 일반인들도 군의관의 명령 또는 허락하에 돌봐 줄 수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처방약의 작용 부작용에 대해서, 주사 놓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조그만 수술하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가르쳐 주었다.  몇 달 안되어서 능숙한 '돌팔이'가 되어 갔다. 밤이면 약학사전을 펴 놓고 공부했다. 참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는 우리 위생병을 특과로만 놔 두질 않았다. 위생병도 군인이라면서 총검술과 태권도 사격 등을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위생병 셋이 있었는데, 군위관과 위생병 둘이 부대내 '특등사수'로 선발되었다.

그와 함께 무의촌 진료를 나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로 해녀들이 많은 해변 마을로 나갔다. 대부분의 해녀들은 만성 중이염을 앓고 있었다.

그이는 한 1년 나와 함께 지내고 만기 제대를 하고 나가고 후임으로 안 대위가 왔다. 서울의대 출신이라면서 혼자 목에다 힘을 주고 부대장도 통제불능의 소위 '개판군인'이었다. 장발에다 사복차림으로 의무실을 무시로 드나 들었다. 정문으로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정문을 통과하려면 한 참을 올라갔다가 의무실로 다시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가까운 울타리 담을 넘어서 출입하였다. 보초들도 있지만 아무말도 못했다. 의무실내 환자 치료나 돌보는 일은 우리 위생병에게 거의 모든 전권을 주다 시피 했다. 급한 일이 아니면 나를 부르지 말고 위생병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1972년 3월경으로 기억된다. 우리 부대 주 임무는 제주도내 예비역과 보충역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보충병으로 훈련 받으러 들어오는 사람들은 참말로 '핑계'가 가지각색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소집된 절반 이상이 훈련 부적격으로 귀향 조치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온갖 '빽'을 동원하여 빠지기 작전을 하기 때문에 할당된 보충역 인원(약 200명)을 확보하는 것은 또 다른 작전을 요했다. 군의관은 온갖 압력과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

중앙정보부, 보안대, 헌병대, ...모두 '하이에나' 처럼 달려 들었다.

나는 보충역 선발 과정에서 주로 체중과 신장 그리고 혈압을 측정 기록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일반인들은 상식적으로 자신의 체중과 신장 정도는 평소에 알고 있었다. 나는 대충 물어보고 그들이 보고하는대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실수가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토요일에 입소를 위한 신체검사를 마치고 선발된 훈련병들은 각 훈련병 막사에 배치되었다. 월요일이면 연병장에서 간단한 입소식을 마치고 훈련에 들어가게 된다. 일요일 저녁 늦게 내무반 한 하사관이 막 입소한 훈련병 한 사람을 부축하고 의무실로 들어왔다. 군의관은 일요일에 출근하지도 않는다. 나의 상급자들도 모두 외출하여 버리고 나 혼자 텅빈 의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 하사관이 말하기를 "이 훈련병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하루 종일 굶고 있다. 배가 아프다고 한다. 의무실에 입원시켜야 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자고 했고 입실 수속을 간단하게 기록해 뒀다. 메트래스를 침상에 깔고 그를 눕혀 놓고, "죽이라도 먹고 싶으냐? 먹고 싶으면 내가 취사반에 가서 누렁지라도 얻어다가 끓여 줄 수 있다"고 물었다.

그는 죽도 먹고 싶지만 복숭아 통조림 한통을 사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취사반에 가서 누렁지를 얻었고 PX에 가서 통조림을 하나 샀다. 죽을 반합에다 끓여서 먹으라고 권했는데, 그는 몇 숟갈 들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통조림도 국물만 좀 마시더니만 못 먹었다.

그러다 보니 저녁 10시 정도 되었다. 이제 취침할 시간이라면서 자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잠도 이루지 못했다. 배가 너무 아프다는 것이었다. 나는 의무실에서 흔한 암포젤을 꺼내어서 두어 스픈 주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는 기력이 점점 쇠해지면서 신음소리가 더욱 심해졌다.

나는 겁이 났다. 나 혼자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겠구나 싶어서 군의관에게 전화로 연락을 했다. 밤 11시쯤 되었다.  군의관은 1시간이나 지나서야 의무실에 나타났다. 복통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는 몰핀 주사를 한 대 넣었다. 그러나 복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여 보니 이건 분명히 쇼크상태였다. 군의관 더러 부대장이 쓰는 1호차를 내 올 테니 빨리 제주도립병원으로 후송시키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 군의관은 혼자 처리할 수 있다면서 계속해서 치료를 했다. 밤을 세워서 해 봤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그의 복부를 보니 풍선처럼 불러 올라, 돌팔이 내가 보기에도 위장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위급상황인데도 군의관은 고집이 대단했다. 아침 8시 부대장이 출근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대장에게 보고하고 후송하더라도 하자는 의견이었다. 졸병인 나로써는 속수무책이었다.

부대장이 들어오고 보고가 끝나서 후송 명령을 받고 하는데 거의 10시가 되어 버렸다. 또 부대장은 무슨 속셈인지 그 가족들을 불러오라는 것이었다. 그 속셈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가족으로는 안덕면 서광에 사는 홀어머니와 그의 외삼촌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대 차량을 내어 주지 않고 그 가족들에게 정문에서 환자를 인수해 버렸다. 택시를 타고 제주도립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모슬포를 출발하여 제주시로 가는 도중 한림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가 도중에 숨을 거뒀다는 비보가 들어왔다.

나는 넋을 잃고 멍하니 무심한 하늘만 쳐다 보았다. 하루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보안대, 헌병대, 범죄수사대, 중앙정보부 등 각 요원들이 몰려왔다. 군의관은 체포되었다. 나도 자초지종을 수차례 각 기관 수사요원들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졸병인 위생병에게는 아무런 책임 같은 것이 없었다. 악몽만 같았다.

멀쩡한 젊은이를 그것도 삼대독자라고 하는 남의 집 귀한 아들을 개만도 못한 죽음으로 내 몰았으니...

군의관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지만 무슨 빽을 썼는지 아무 탈 없이 제대를 했다.

그의 유가족들은 훈련중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군 부대장과 인사과장은 그를 입소명부(일일보고서)에서 고의로 누락시키고 훈련병이 아니라고 처리하고 말았다. 정말로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훈련 중 사망사고는 그 부대장에게는 승진 상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죽은 자만 억울하다.

▲ 이도영 편집위원
나는 당시 군의관과 인사과장의 관등성명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망자의 성명은 기억할 수가 없다. 단지 안덕면 서광리 출신이란 것만 기억한다. 죽음 뒤에 신체검사 기록부를 검토해 보니 그의 체중은 잘 못된 보고였다. 그이 바로 앞에 사람 것과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70 KG. 실제 그의 체중은 45 Kg 미만으로 추정된다, 너무나도 깡말라 있었다, 만성 위궤양으로.

모든 이들은 그 사건을 까마득하게 잊혀져 갔겠지만, 나는 평생을 '살인 방조죄'로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 때늦은 참회를 한다. 그 유가족에게 참말로 미안하고 죄송하기 짝이 없다.

혹시 누가 이 사람이나 그 유가족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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