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37) 김순화 어르신 이야기 ②

밥이 보약이라 했습니다. 바람이 빚어낸 양식들로 일상의 밥상을 채워온 제주의 음식은 그야말로 보약입니다. 제주 선인들은 화산섬 뜬 땅에서, 거친 바당에서 자연이 키워 낸 곡물과 해산물을 백록이 놀던 한라산과 설문대할망이 내린 선물로 여겼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진경 님은 제주 향토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입니다.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1에서 소개된 지난 1~25회 원고는 제주의 음식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서술이었습니다. 이어 ‘제주댁, 정지에書’ 시즌2로 마련된 26회 원고부터는 제주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매월 한 분의 삶을 풀어낸 글을 격주로 소개하면서 그 속에 DNA처럼 배어있는 제주음식 이야기를 함께 교감하려 합니다. 인터뷰에는 일러스트 작가 '色色님'도 동행해 현장에서 영감을 찾아낸 아름다운 삽화도 매회 선사합니다.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인의 삶과 제주음식에 깃든 지혜를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글]

처음에 어르신이 오합주를 만드는 데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설명해 주셨지만,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일반적으로 제주에서 오합주를 만들 때 들어가는 재료는 “오메기청주, 꿀, 계란, 참기름, 생강”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어르신의 오합주 만드는 방법을 듣고서야 김순화 어르신의 오합주가 이해가 되었다.

“오합주에는 계란 또시(그리고, 또를 의미하는 접사)... 청 또시.... 참기름 또시... 찹쌀 또시..... 누룩. 여기에 끓인 물이 있어야 해. 끓이지 않으면 안되어.”

참고로 옛 어른들은 꿀을 “청(淸)”이라고 부르시는 경우가 많으시다. 즉, 김순화 어르신의 오합주는 찹쌀, 누룩, 청, 계란, 참기름, 정제수를 준비해야 만들 수 있었다. 어르신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전하자면, 우선 찹쌀이 알알이 오똑오똑 설 정도로 푹 쪄서 준비한다. 누룩은 자루 안에 담아서 잘 부숴두고 그 자루 채 준비한다. 물은 한 번 끓여 식혀둔다. 

단지에 잘 쪄진 찹쌀을 넣고 정제수를 붓는다. 잘 부숴둔 누룩도 자루 째 넣는다. 여기에 달걀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루 안에 띄워 놓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달걀이 깨지지 않게 조심히 올려 두는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참기름과 청(꿀)까지 넣는다.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 2~3일 두면 누룩과 찹쌀이 반응하여 발효가 시작되어 술이 살아서 춤을 춘다고 했고 그렇게 완성된 오합주는 술이 되면 빨리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한꺼번에 많이 해 둘 수 없었다고. 시간이 지나면 초(식초)가 되어 버려서 오합주의 기능을 잃고 식초로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먹을 때는 계란을 깨서 섞어 마셨단다. 그렇게 만든 오합주는 김순화 어르신 집의 보약이다. 보통 제주 음식이 조리과정이 간단하고 단순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 오합주는 쉰다리처럼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효에 걸리는 시간은 짧지만 준비하는 정성과 마음은 짧지 않았다. 한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먹거나 몸이 아픈 사람에게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정성을 기해 만들어야 하는 음식이자 보약이었다. 

찹쌀과 누룩을 마련하고 꿀과 청도 준비해야 했다. 정성으로 쌀을 쪄야하고 깨끗한 물은 길어온 후 끓여 식혔다. 한겨울 갓 쪄진 뜨겁고 달큰한 찹쌀밥에 참기름을 섞어 그냥 먹어도 얼마나 꿀맛일까 싶지만 그 유혹을 꾹 참고 단지에 넣어 보약이 되기까지 기다린다. 오히려 생강은 옵션처럼 느껴졌다. 생강까지 넣으면 더 좋았지만 어르신댁의 오합주에 생강은 필수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어릴 적 감기몸살에 심하게 걸렸던 날 친정엄마가 배대추찜을 오랫동안 쪄서 그 뜨거운 배찜을 숟가락으로 긁어가며 떠 먹여 주셨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배찜을 먹으면 신기하게 금방 몸이 나았다.

어르신은 골감주도 찹쌀을 이용해 자주 만드셨다고 했다. 물론 옛날 먹을 게 없던 시절에는 차조로 감주를 만들기도 했지만 식게(제사)때나 중요한 날에 만드는 감주는 찹쌀을 구해 와서 만들려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르신이 찹쌀로 만든 식혜는 차조로 만든 것처럼 탁하지 않고 투명하고 맑은 색을 띠었다. 음복할 때 사람들에게 식혜를 나눠 주면 식게에 모인 사람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한다.

“아 맛있다. 아 맛있다.”

곤밥도 귀했던 시절, 찹쌀은 또 얼마나 귀한 곡식이었을까?

그 찹쌀에 엿기름물을 이용해 당화시켜 만든 맑은 식혜는 차조로 만든 회색빛의 탁한 골감주와는 또 의미로 특별하고 귀한 음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르신은 이 찹쌀로 만든 골감주를 약으로도 먹었다. 우슬뿌리를 푹 달인 물에 찹쌀밥과 골가루를 넣어 당화시켜 우슬식혜를 만들어 많이 마셨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렇게 먹은 것이 지금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지탱해서 걸을 수 있는 거라 굳게 믿고 계셨다.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순간이 오면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들이는 어르신의 정성은 김순화 어르신의 음식에 대한 철학과 마음가짐이 보이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어르신의 감주였다.

어르신 댁에서 겨울철에 꼭 해 먹는 음식 중 하나인 꿩엿도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음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어르신은 꿩엿도 찹쌀을 이용해서 만든 경우가 많았는데 보통 꿩 3~4마리에 찹쌀 2되, 골가루 1되가 필요하다고 했다.

꿩을 잡아 꿩고기를 삶는다. 꿩고기가 살짝 익으면 뼈를 발라 살은 건져두고 꿩 뼈는 넣고 조금 더 우려낸다. 이 우려낸 물에 찹쌀밥을 해서 놓고 여기에 골가루도 넣어 아랫목에 따뜻하게 두고 자고 일어나면 찹쌀밥이 둥둥 떠 있다. 미끌거렸던 찹쌀밥은 종이처럼 찰기가 없어지고 골(엿기름)에 의해 당화된 찹쌀물이 스며든 꿩 우린물은 달큰해져 있다. 밥과 골가루를 건져내고 순수한 액체만 그때부터 계속 끓여낸다. 불 조절을 잘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바닥이 눌어붙을 수 있기 때문에 불 앞을 지키고 있어야 했고 다른 일은 좀처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엿물이 바짝바짝 해가면 건져놓았던 꿩고기를 다시 넣고 졸이기를 계속 해야하는데 이때 고기를 넣는 시간이 중요하다. 너무 일찍 넣으면 고기가 수분이 빠져 꽈당꽈당해지기 때문에 고기 씹는 맛이 좋지 않다고 한다. 또 너무 늦게 넣으면 물컹거리기만 하고 쫀득함이 없어지기 때문에 엿물이 졸아드는 시기를 잘 잡아야 한다고. 이렇게 만든 꿩엿은 남편과 아이들의 겨울철 보약이었다.

제주의 겨울이 다른 지역보다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겨울은 겨울, 추운 겨울에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엿도 별미이자 건강식이었다. 겨울 들어가면 특히나 엿들을 많이 만들어 두셨다고 한다. 호박엿은 늙은 호박 한 통을 전부 이용한다. 호박 껍질을 벗기고 듬성듬성 썬다. 여기에 밥공기 하나 정도의 물만 있으면 호박엿의 재료는 끝이 난다. 다른 엿처럼 엿기름이 따로 필요 없고 호박에서 나오는 끈끈한 진액으로도 충분히 엿은 만들어 진다고 설명하셨다. 물도 한 공기 정도만 필요하다고 했다. 솥에 호박과 물을 넣고 자작하게 계속 끓여낸다. 낮은 불에서 오래오래 끓여내면 물을 증발하는 대신 호박에서 수분과 진액이 나오기 시작하고 그렇게만 해도 호박엿은 완성이 된다고 했다. 오래 끓여내면 달큰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호박은 꾸덕꾸덕해지면서 색이 진하게 된다. 여기에 흑설탕 조금만 보태 더 끓여내다가 마무리하면 한 겨울철 영양 간식이자 힘을 내게 해 주는 호박엿이 완성이 된다. 물론 육지의 엿처럼 딱딱한 엿이 아니다.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 액체에 가까운 엿이다.

이 호박엿은 일반적인 고기엿들보다는 조금 더 묽은 제형으로 만들어 지는 것 같았다. 산모들에게도 이 호박엿 한 숟가락씩 떠서 먹으면 붓기도 빠지고 몸에도 좋다고 하셨다. 김순화 어르신은 그렇게 딸들과 며느리에게도 출산 후 호박엿을 만들어 보내셨다. 호박엿을 만드는 법을 나에게 말씀하시는 어르신의 눈빛과 목소리만 들어도 나는 알아차렸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손녀딸에게도 이 호박엿을 만들어 주실 것을.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어르신은 특히 손녀딸을 예뻐하셨다. 손자들 사진을 자꾸 보여주며 착한 아이들이라고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셨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돌아가신 남편이 오합주 해달라고 해도 “맨입에?”라며 볼멘소리를 했다고 말씀하셨지만 손과 마음은 이미 오합주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에게 남편은 그저 동네 농사꾼 정도라고 소개해 주셨지만 남편분에 대한 사랑은 집안 곳곳 그대로 느껴졌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그냥 동네 농사꾼이 아니신데요? 배우라고 해도 다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아이고 그냥 농사꾼이야. 농사꾼. 그 할아버지 살아 계실때 둘만 이시면 내가 항상 말했었어. ‘한사람씩 가야 합니다. (세상에) 난 사람이면 한 번은 가야하는 길. 같이 가는 것보다 한 사람씩 가야 합니다’라고 내가 할아버지한테 늘상 말했어. 사람이라면 모두 가는데 일찍 가는 것 뿐, 그 일찍 가는 것이 서러울 뿐이라고 말했었지. 그런데 그런 말 곧지 말 걸. 늙어도 오래 살고 싶지 누가 가고 싶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김순화 어르신의 말투와 억양에서 얼마나 남편 분을 사랑했고 그리워하고 계신지 느껴져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겨울이 다가오면 남편이 먹고 싶어 하는 오합주와 엿을 만들었을 어르신의 20대부터 70대,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매년마다 만들었던 김순화 어르신의 겨울 보양식은 지금은 남편 분은 없지만 어르신의 자제분들에게 여전히 보내지고 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내심 아니라고는 하시지만
본인 레시피를 말씀하실 때 나오는 자신감 묻은 엷은 미소에 TV에 나오시는 요리연구가의 포스가 느껴졌습니다. 일러스트=色色. ⓒ제주의소리

어르신의 핸드폰 배경화면에도, 어르신이 주무시는 안방에도, 어르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사진앨범 속 남편 분은 어르신의 애정 어린 손길이 많이 묻어있었다. 다시 한 번 어르신의 집을 찬찬히 돌아보니 남편분의 따뜻한 기운이 집안에 가득 서려있었다. 그리고 그 남편 분을 위해서 만들었을 어르신의 수많은 레시피는 어떤 것들일까? 어르신이 만든 음식의 든든한 지원군도, 열렬한 팬도 아마 남편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굳이 듣지 않아도 자연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가족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음식은 무엇일까? 집마다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만드는 음식에 과연 나는 그 격의 차이를 나눌 수 있을까? 찹쌀로 만든 어르신의 꿩엿과 골감주는 제주음식이 아니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어르신을 만나뵙고 집을 나오면서 든 생각이었다.

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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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진경. ⓒ제주의소리

얼마 전 백신을 맞고 몸의 컨디션이 영 아니었다. 기운을 겨우 차려 외할머니가 자주 해서 먹었다는, 친정엄마가 좋아하는, 내가 사랑하는 제주식 콩국이 생각났다. 장을 보고 끓여낸 뜨끈한 콩국 한 수저에 아픈 몸이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콩국 자체가 영양가가 좋아서였을까? 

마음이 연결되고 위로를 받는 음식. 이번 만난 어르신을 통해 유독 강하게 와닿았던 제주음식에 대한 또 다른 정의였다.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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