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소리 人터뷰] 어르신그림책학교에서 제주어로 담은 ‘내 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를 운영하는 설문대어린이도서관의 강영미 관장(맨 왼쪽)과 직접 그림책을 만든 양정순, 장원선 할머니(왼쪽부터).ⓒ제주의소리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를 운영하는 설문대어린이도서관의 강영미 관장(맨 왼쪽)과 직접 그림책을 만든 양정순, 장원선 할머니(왼쪽부터).ⓒ제주의소리

1957년, 그 때 나이는 열 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서귀리를 떠나 보목리로 갔다.

그러지않아도 배를 곯던 시절, 오랜기간 병원신세를 지던 아버지의 빚까지 떠안은 어머니는 홀로 2남2녀를 키우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 밭에서 어머니는 흥얼거리다, 넋두리를 하다, 울다를 반복하셨다. 가여운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러 나섰지만 아직 열 살 아이인 걸, 밭에서 시간은 왜 그리 안 가던지, 여기만 오면 한 시간이 일 년 같았다. 바다에서 친구들과 놀고 싶었다.

보목에 앞 바다는 구두미라고 불렸다. 밥 먹을 때가 되면 얼른 배를 채운 뒤 구두미 바다에 들어가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무더운 여름밤이면 바다 앞 언덕에 사람들이 초석을 들고 모였다.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며 잠에 들었다. 은하수도 북두칠성도 삼태성도 선명하게 보이던 시절이다.

“거기서 보낸 5년이란 세월이 그 이후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도 너무 길게 느껴져요. 아직도 그 추억이 정말 생생합니다”

올해 일흔다섯 양정순 할머니가 인생의 첫 번째 그림책 제목을 ‘구두미 바당’으로 지은 이유다. 처음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에서 주제를 정할 때 생각은 많은데, 도대체 어떤 걸 써야 할 지 몰라 고민이 깊었다. 인생을 쭉 더듬어보니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내 마음의 빛나는 보석 같은 순간을 꼽다보니 열 살의 자신을 만나게 됐다.

“그림도 소질이 없고, 글에도 자신이 없다”며 걱정하던 양 할머니는 “처음 책을 냈을 땐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이젠 자부심도 생기고 자랑스럽게 여기기로 했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미소를 짓게 됐다.

2016년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를 통해 탄생한 그림책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글과 그림으로 담았다. ⓒ제주의소리
2016년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를 통해 탄생한 그림책들.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글과 그림으로 담았다. ⓒ제주의소리
양정순 어르신의 책 '구두미 바당'에는 어머니를 도우러 밭일에 나섰지만 친구들과 바다에서 놀고 싶어하는 어린 소녀의 심정이 잘 나타난다. 가지 않는 시간을 거북이 시계로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아래쪽 이미지는 장원선 어르신의 책 '옛날에는'의 일부. 밭일을 하다 콩잎을 따서 나무 아래에서 먹는 기억을 담았다.  ⓒ제주의소리
양정순 어르신의 책 '구두미 바당'에는 어머니를 도우러 밭일에 나섰지만 친구들과 바다에서 놀고 싶어하는 어린 소녀의 심정이 잘 나타난다. 가지 않는 시간을 거북이 시계로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아래쪽 이미지는 장원선 어르신의 책 '옛날에는'의 일부. 밭일을 하다 콩잎을 따서 나무 아래에서 먹는 기억을 담았다. ⓒ제주의소리

1939년생 장원선 할머니는 자신의 첫 그림책에 10살 이전의 기억을 담았다. 한림읍 상명리에 살던 장 할머니의 가족은 4.3에 휩쓸려 키우던 돼지도, 식량도, 집도 모두 잃어버렸다. 집에 불이 타자 다른 사람의 밭 한 켠에 임시로 나무집을 만들어 살았다.

들나물로 끼니를 때우는 게 일상이었다. 밀가루 껍데기들을 구한 뒤 맷돌에 갈아서 먹었는데 이걸 먹고 나면 변비에 걸렸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밥 한 번 배부르게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어느 날은 운 좋게 고구마를 구해 밭에서 가족들과 삶아 먹었는데, 그 날 밤 오빠가 몰래 챙긴 고구마를 숨어먹는 걸 보고 화가 났던 일이 기억에 그대로 있다. 밭을 매고, 친구들과 뛰어놀던 기억도 생생하다.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장 할머니는 자녀들을 낳고 난 뒤에야 한글을 스스로 깨쳤다. 그녀는 여든의 문턱에서 글과 그림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을 담아냈다. 이 안에는 평생 고생하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도 담겨있다. “지금도 밤에 자기전에 어머니 생각밖에 안난다”고 눈물을 훔치던 그녀는 “그 때는 처음이라 잘 못했는데, 지금 그리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를 통해 45명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작가가 탄생했다. 

도서관운동을 통해 탄생한 제주 최초의 사립 작은도서관인 설문대어린이도서관의 활동가들은 위기에 놓인 제주어를 아이들에게 전승하고, 어르신들의 삶의 이야기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2016년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은 1년이 걸린다. 출간 전 25번을 만나면서 어르신들의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주제를 정하고, 그림을 익히고 그린다. 사진은 2017년 참가자들이 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모습. ⓒ제주의소리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은 1년이 걸린다. 출간 전 25번을 만나면서 어르신들의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주제를 정하고, 그림을 익히고 그린다. 사진은 2017년 참가자들이 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모습. ⓒ제주의소리

한 권의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탐색해보고, 글과 그림을 익히는 과정은 단기간에 이뤄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1권의 책을 만들기까지 1년 짜리 코스가 진행되고, 25번의 수업과 만남이 진행됐다. 책여우라는 이름의 출판사도 냈다.

처음엔 낯설어하며 ‘할 얘기가 없다’던 어르신들은 저마다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아흔을 앞둔 한 할머니는 일제 때 징병되고, 4.3에 휘말리다 6.25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남편의 이야기를 털어놓었다. 평생 과일가게 안에서만 지내던 누군가는 ‘나만 힘들게 사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다.

자식들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늦은 밤 종이 위에 풀어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2019년 청주에서 열린 대한민국독서대전에서는 어르신 작가들이 제주어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해 주목을 받았다.

강영미 책여우 대표(설문대어린이도서관장)은 “대한민국의 가장 격동기를 살아온 분들이고 많은 이야기를 지닌 분들”며 “어르신들이 삶을 풀어놓으시면서 마음도 치유받으시고, 한 권의 책을 낸 작가가 됐다는 성취감을 느끼시는 것을 보면서 뿌듯하고 사명감이 든다”고 말했다.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 중인 책 '새벽별은 베롱베롱'. 어르신 8명이 정성스레 쓰고 그린 옛 이야기들이 담겼다. ⓒ제주의소리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 중인 책 '새벽별은 베롱베롱'. 어르신 8명이 정성스레 쓰고 그린 옛 이야기들이 담겼다. ⓒ제주의소리

걱정은 지속가능성이다. 도서관 자체가 후원으로 운영되는 곳인만큼, 이 프로그램 역시 활동가들의 재능기부와 노력으로 가까스로 이어가고 있다. 책을 낼 예산이 마땅치 않아 곤란을 겪을 때가 많지만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 어르신들의 눈동자를 보면 포기할 수 없다.

책 ‘새벽별은 베롱베롱’ 크라우드펀딩에 나선 것도 어르신그림책학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제주 어르신 8명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낸 이 책에서는 산파할머니를 모시러 어두운 밤을 언니와 달려가던 일, 6.25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육지로 물질을 갔다 산전수전을 겪은 일 등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펀딩은 2월 6일까지 진행된다.

강영미 대표는 “어르신들이 가진 이야기도 많고 전달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더 많은 어르신들을 만나고 싶다”며 “그림책이라는 매체가 제주의 보물창고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문의=설문대어린이도서관(064-749-0070)
[새벽별은 베롱베롱] 크라우드 펀딩=텀블벅(www.tumblbug.com/bookfox/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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