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60) 대천 바다 배 지나간 자리에 표적 없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편집자 글]

* 대천 바당 : 대천 바다, 너른 바다의 뜻
* 페적 : 표적, 표시해 놓은 흔적 따위
* 엇(읏)나 : 없다

당연한 얘기다.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갈 때는 순간순간 바닷물이 뱃전에 부딪혀 물거품이 일 뿐, 배가 지나가고 나면 잔잔해지면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처럼 세상에는 어떤 일을 했었음에도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허무함을 직설하지 않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럴싸한 빗댐이다. 

우리 제주 선인들, 사물의 이치에 통달했기로 이런 비유가 나온 게 아닌가. 제주의 속담을 음미하다 보면 색다른 사유의 깊이와 폭을 느끼게 되곤 한다.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비슷한 속담이 있다. ‘꿩 구워먹은 자리’, ‘한강 배 지나간 자리 흔적 없다’가 한 맥락이다.

“대천바당에 배 지나간 페적 엇다” 하는데도 아득바득 표적을 새겨 놓고 하늘처럼 믿는 수가 있어 세상은 요지경으로 점입가경인가.

사진=픽사베이.
대천 바다 배 지나간 자리에 표적 없단 말, 백번 맞는 말인데도 귀에 담지 않음인지 세상엔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사진=픽사베이.

그런 자의 행태를 꼬집어 하는 말이 있다. 각주구검(刻舟求劍).

춘추전국시대 한 초나라 사람이 애지중지하는 큰 칼을 가지고 양자강을 건너던 도중, 그만 그 소중한 칼을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이 초나라 사람은 놀란 나머지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그 귀한 칼을 빠뜨린 위치를 뱃전에다 표시를 해 남겼다.

“칼이 떨어진 자리에 표시를 해놓았으니, 나중에 찾을 수 있겠지” 한 것.

배가 뭍에 다다르자, 그는 배에 표시한 것을 보면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칼을 찾았지만, 칼은 없었다. 이를 시종 지켜본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음과 융통성 없음을 비웃었다 한다. ‘각주구검’이란 성어의 유래담이다.

버스가 지난 뒤 손 흔드는 격이 아닌가. 대천 바다 배 지나간 자리에 표적 없단 말, 백번 맞는 말인데도 귀에 담지 않음인지 세상엔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일이 돼 가는 흐름을 읽지 않은 채, 그냥 자기 생각대로 될 줄 알고 행하고 실패하고, 심지어 그게 왜 실패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실패한 탓이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모른다. 한마디로 고집불통이요 소통 부재다. 

고금을 통틀어 시기(時機)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할 때와 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계책이나 전술 전략도 시기를 읽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다. 도로(徒勞)에 그치고 만다는 뜻이다. 

썩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 모르나, 한신의 배수진(背水陣)과 마속의 그것은 유사한 듯 같지 않다. 한신은 시기를 얻었으되, 마속은 그 시기를 전혀 읽지 못해 결국 패망했다.

개인의 일, 회사의 일도 한가지다. 직원이 하는 것도, 관리자도 그렇고 사장 또한 그렇다. 자신만의 환상에 빠진 나머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목전의 정황을 외면하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 싫어서 틀린 행동도 맞다고 우기다 보면 결국 바닥 모를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이다.

판단력이 둔하면 융통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해 세상 물정에 어두우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비슷한 말에 ‘수주대토(守株待兎)가 있다. 뜻 그대로 그루터기를 기다리며 토끼가 잡히기를 기다린다 한이다.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은 토끼를 발견했단다. 농부는 불로소득으로 얻은 그 토끼를 장에 내다 팔아 두둑이 돈을 챙겼다. 그 후로 농부는 일은 않고 매일 그루터기 옆에서 토끼가 나타나 부딪혀 죽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고, 마침내 그 농부는 농사만 망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에 정신 팔려 더 발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를 빗댐이다.

‘대천바당 배 지나간 자리에 페적 엇나.’ 사람들이 얼마나 약삭빠른가. 아마 요즘 세상에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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