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38) 이성지 어르신 이야기 ①

2018년 11월, 한림에 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이었다. 

도내에서는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지 않고 운전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터라, 돌아올 때는 오로지 감으로 낯선 길을 운전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4시와 5시 사이였을까. 서쪽 수평선 가까이에서 비추는 햇볕이 벽에 반사돼 자그마한 동네집들이 황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동네 좁은 2차선 길을 천천히 운전하고 있는데 내차 앞으로 참새 대여섯 마리가 문이 열린 돌창고 안으로 쌩하고 들어갔다.

참새를 쫓던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참새가 들어간 돌창고 안으로 향했고 뉘엿뉘엿 지고 있는 햇살 또한 활짝 열려진 돌창고 안으로 함께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이끌림이었는지 나는 차를 바로 세워 차에서 내렸다.

돌창고 문 앞에서부터 나던 익숙한 냄새, 그리고 돌창고 문을 통해 오고가는 참새들의 지저귀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돌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창고 안에는 시간을 거스른 듯한 광경과 함께 한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안녕하세요.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뭐긴, 정미소지.”

내가 알고 있는 정미소의 그림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 할아버지의 정미소는 반세기 전의 정미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어르신의 정미소가 너무 궁금해 어르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만 짧게 듣고 할아버지에게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되겠느냐고 물어봤다. 흔쾌히 또 오라고 하시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그 번호를 받은 나는 바로 “방앗간할아버지”라고 저장했다.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와야지 했던 한적한 동네의 정미소는 그렇게 내 기억에서 잊혀져 갔었다.

이후 최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오메기술을 매 해 집에서 담그시는 서광리의 어르신도, 모슬포에서 누룩을 만드시는 어르신도, 서귀포시 월평마을의 한 어르신도 신기하게 모두 같은 말씀을 하셨다.

“보리 이거 빻으려면 아무 곳이나 가면 안돼. 내가 가는 그 방앗간으로 꼭 가야해. 그 방앗간은 무릉2리에 있어.”

어르신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씀하는 그 방앗간. 나는 오랜만에 핸드폰을 열어 방앗간할아버지를 검색했다.

ⓒ김진경
무릉2리에 위치한 이성지 어르신의 정미소. ⓒ김진경

며칠 후, 나는 3년 만에 무릉2리의 돌창고 정미소 앞에 다다랐다. 

3여 년 전의 돌창고도 그대로였고 돌창고를 드나드는 참새들도 그대로였다. 돌창고로 들어가는 햇살 역시 여전했으며 돌창고 정미소 할아버지도 그대로였다. 3년이 마치 3일전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동화 같은 돌창고 정미소의 할아버지는 어떤 제주의 곡식 이야기를 펼쳐주실까 나는 내심 기대가 되었다. 간단하게 정미소 내부 설명을 듣고 안거리의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눈이 커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르신이 시골마을의 조그마한 정미소를 하는 평범한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다. 예전 첫 인상도 푸근한 농부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강렬하게 벽 한 쪽을 채운 상패들과 훈장, 붉은 모자들이라니. 나는 어르신이 어떤 어르신인지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김진경
어르신의 빨간 모자. ⓒ김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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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이 받은 훈장. ⓒ김진경

1931년 6월, 무릉2리에서 태어난 올해 92세 이성지 어르신은 이제껏 내가 만난 남자어르신 중 가장 연세가 많으셨다. 

“어르신, 해병대셨어요?”

“응. 나 해병대 3기야.”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시기에 보청기를 끼고 계셔서 돌창고 안에서는 대화가 매끄럽지 못했었다. 그런데, ‘해병대 3기’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안경 너머 어르신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허리는 꼿꼿하게 펴져 있었고 안광에서는 호랑이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무릉2리에서 산남도정공장을 운영하시는 이성지 어르신은 4.3과 6.25의 역사의 가운데에서 맹렬하게 살아오신 어르신이다. 4.3으로 인해 피폐해 진 당시 제주의 시간은 상당히 괴롭고 고통스럽고 무서웠던 나날들이라고 하셨다. 먹을 것은 없어 받는 고통은 물론 하루하루의 목숨도 보장받을 수 없었던 삶에 이성지 어르신은 이렇게 사느니 해병대에 들어가기로 다짐한다.

“그때 해병대에 지원해서 들어가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 그땐 그냥 죽을 몸이었으니까.”

ⓒ김진경
이성지 어르신을 소개한 참전용사 자료집. ⓒ김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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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이 간직하고 있었다가 이성지 어르신에게 줬다는 어르신의 군입대 당시 사진. ⓒ김진경

그렇게 해병대 3기로 지원할 당시, 제주에서는 수천 명이 입대를 지원할 정도로 많은 청년들이 몰렸다고 한다. 형제들이 모두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고 입대 나이가 되지 않아 울분을 토하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입대 상황에서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특성상 더더욱 지원자가 몰렸는데, 이렇게 폭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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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지 어르신 자택에서 발견한 2008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정분회 단체 사진. ⓒ김진경

이성지 어르신 뿐 아니라 함께 입대한 제주청년들은 모두 죽을 각오로 훈련에 임했다. 다른 부대와 달리 참혹할 정도로 고된 훈련이었다고 하지만 당시 제주의 현실보다는 오히려 나았다고 한다. 그렇게 이성지 어르신과 같은 마음을 가졌던 제주 사람들은 1950년 8월 1일 해병대 3기생 1661명이 자원입대 했다. 이어 지원한 4기는 대한민국 최초 여자 해병대 12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제주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 죽으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모든 군인들이 똑같이 생각했었다고. 그래서 제주 지역 군인들은 훈련 중 이탈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이성지 어르신은 산북 지역에서 해병대를 지원하셔서 제주농고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후 통영상륙작전, 이어 인천상륙작전까지 참전하셨다고 한다. 그야말로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던 어르신이었다.

어르신의 청춘은 그렇게 뜨거웠고 용맹했다. 

그래서였을까. 어르신의 방을 가득 채운 빨간 모자들과 사진들, 훈장들은 어르신의 역사이자 지금의 어르신을 만들어 준 이야기였다. 전역 후 타지생활을 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를 운영하게 된 사연도 조금은 특별했다. 1950년대 이후 제주에 방앳공장이나 정미소는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는 곳은 이성지 어르신의 정미소가 유일하다.

ⓒ김진경
성실함과 최선으로 정미소를 한평생 운영하신 어르신께서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셨던 청년 시절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 일러스트= 色色 ⓒ제주의소리

나는 조금은 특별한 이성지 어르신의 인생 후반부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왜 아직도 제주의 할머니들의 하나같이 이성지 어르신의 정미소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지 이유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아흔을 훌쩍 넘으셨는데도 귀가 조금 불편한 것 말고는 노쇠함은 커녕 용맹함과 고고함이 엿보였던 어르신의 기운은 참 강렬했지만 그래서 더욱 좋았다. 나는 이성지 어르신 부부가 함께 만들어가는 무릉2리의 정미소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

#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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